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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칼럼

우리는 과연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가?

작성자비빔밥(경기)|작성시간13.05.24|조회수661 목록 댓글 13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학자 중에 한명인 미셸푸코는

이성과 합리에 근거한 근대성 뒤에 숨어있는

권력의 이중성을 파헤치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본인이 성적 소수자로서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쳐 버리는

근대성이 감시와 처벌 시스템에 더 민감하게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대적 이성이 어떤 방식으로 현대 문명을 직조해 왔는가에 대한

그의 고고학적 연구는 화사한 화장발 뒤에 숨어 있는

거짓 이성의 폭력성과 배타성을 밝혀내기에 충분했지요.

어쩌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폭력과 억압, 그리고 통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좀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지요.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평등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건강한 화폐에 기반한 건전한 경제시스템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화폐 시스템이 본질적인 결함을 갖고 있거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특정 계층에게 호의적이라면

그리고 정치적 의도에 의해 쉽게 조작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경제 외부 환경에 의해 언제 어떻게 물거품이 될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

서양철학은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성찰의 과정에서 역사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해 왔습니다.

특히 근대 계몽주의 철학의 인식론적 오류는

인간 존재의 역사성을 무시한다는 데 있는데,

이러한 계몽주의 철학이 근대 이성의 성찰을 이끌어 왔다는 점에서

근대라는 무대는 ‘보편성’이란 철학적 추구가 주연이 되어

현대 문명의 위계질서를 확립해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근대적 이성 뒤에는 음흉한 ‘정치적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미셸푸코는 자신의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근대 이성 뒤에서 억압되고 숨겨진 역사적 사건들을 발굴해 냄으로서

근대 철학에서 배제된 역사적 성찰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합리성 뒤에서 이루어진 근대라는 이름의 폭력과

발전 뒤에서 이루어진 계급 착취의 음흉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셸푸코는 근대 이성의 이면을 파헤치는 자신의 작업을

‘고고학’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물론 미셸푸코의 이런 고고학적 작업에 불만을 느꼈던 사람들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리고 에이즈로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끌어내리고자 하겠지요.

그들이 과거 미네르바를 전문대 출신의 백수라는 이유만으로

헐뜯고 비방했듯이 말입니다.

..

제가 지난 글에서 단선적 진화론의 배경이 되는

정치적 음모에 대해서 말씀드렸었습니다.

이러한 음모는 우리의 학교에서부터 언론,

그리고 대중문화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단선적 진화론은 진화의 과정 속에서 역사적 역동성을 감추어버림으로서

현재에 비해 항상 함량미달일 수밖에 없는 과거를 쉽게 평가절하하고

지배계급의 통치 방식에 대한 반문 또한 어렵게 만듭니다.

어쨌든 지금이 과거보다 나으니 불평하지 말라는 식이지요.

..

경제 분야 또한 근대적 계몽주의에 입각

단선론적 진화론 관점이 여전히 지배적인 바,

학교에서도 돈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론들 또한 은연중에 현재의 시스템이 가장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임을

끊임없이 대중들에게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과거 금본위제를 전근대적인 과거의 유산으로 생각하고

정부 주도의 신용화폐나 전자화폐를 쉽게 신뢰합니다.

그리고 화폐에서 금을 추방하고자 하는 언론들의 주장에 쉽게 동조하지요.

사실, 정체불명의 근대적 이성이 계몽과 합리성이라는 미명하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부분에서

사실상 우리들의 모든 삶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통제와 관리는 현 시스템의 안정성에 기여하며

시스템의 문제점을 깨닫고 시스템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불이익을 주게 됩니다.

이처럼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견고하게 직조되어 있는

지배적 경제의 패러다임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패러다임의 붕괴는 아직 멀게만 느껴집니다.

내가 깨달았다고 모든 사람들이 깨닫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전히 99%의 사람들은 현 시스템을 옹호하고

정부와 관료들을 신뢰하며 금융 시스템을 전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들의 진의를 확인하고자 노력하기 보다는

삼성이 만든 평면 TV에서 나오는 지상파 방송사의 9시 뉴스를 더 신뢰합니다.

사실 굳이 컴퓨터를 켜서 힘들게 검색을 하거나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고역을 치루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근대적 이성이 최종 승자가 되고

현대 문명의 지배논리가 된 것은

합리성을 내세우는 근대 이성이 다른 사고방식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거나 효용성이 높아서도 아니고

근대 이성의 계몽으로 인해 대중들의 지적 수준이

급격하게 높아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근대 이성이 지배적인 문명의 논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부의 팽창’이라는 경제적 변화 덕분이었지요.

이전 글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석유자원과 기타 지하자원의 급격한 소진과

신용화폐와 파생상품들을 통한 급격한 신용 창출 덕에

우리의 근대는 물질 발전의 정점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이고

단선적 진화론에 바탕을 둔 근대적 이성의 논리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근대 이성의 계몽에 따른 국민들의 정치 의식수준 발달 덕분이라기보다는

‘부의 팽창’에 따른 경제적 여유가 확대되었기 때문으로 봐야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 계층은 자연스럽게 투쟁 의식을 잃게 되고

학생들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기보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며

어른들은 의미 있는 무엇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반항과 역동성에 대한 욕구는

스포츠와 대중문화를 통해서 해소되고 충족되지요.

..

문제는 이러한 근대 이성이 이룬

정치, 사회, 문화, 교육의 성과는

그 뿌리가 경제적 번영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면 근대 이성의 성과는

그 기반을 잃게 되고 숨겨진 폭력성이 표면화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근대 이성은 질서와 보편성을 추구하는 바,

보편적 다수에게는 질서와 균형감을 제공하지만

사회의 소수에게는 은밀한 폭력과 억압을 가하는 것입니다.

운 나쁘게 성적 소수자로 태어났거나

재수 없게 사고로 장애인이 되거나

아니면 우연한 기회로 대중들과 다른 방식의 사고를 하게 되면

근대 이성의 자발적 '민병대'에게 호된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과거 나치즘은 거짓 근대 이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근대성을 뒷받침 해주는 경제적 기반이 붕괴될 때,

거짓 근대 이성이 사회를 어떻게 기형적으로 변형시키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주의의 악몽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

다들 아시다시피 최근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반이

무리한 소비와 팽창이라는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과거 100년간의 번영이 기하급수적인 ‘자원’의 투입과

‘부채’의 팽창에 기반을 둔 번영이었기에

석유와 광물자원의 채산성이 떨어지고

과다한 부채로 인해 ‘부채 축소’ 현상이 일어나면

과거 빠르게 증대된 부의 크기만큼

그 축소의 크기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일어나도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야만 하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치명상을 입게 되는 데,

운 나쁘게 두가지 상황에 거의 동시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현대 문명의 기반인 경제가 위기에 처해있다면

우리의 현대 문명 자체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에너지 문제를 에너지 관점에서만 보고

마찬가지로 경제 문제를 경제 문제로만 보지만,

사실 에너지와 경제, 정치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현대 문명의 세부 부분들로

만약 그 문명의 기반인 경제, 즉 나무의 밑동이 뽑힌다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지금 경제 붕괴의 위험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위기, 더 나아가 문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

일단 이러한 위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구에서 부족한 ‘신용’과 ‘자원’을 우주의 다른 곳에서 가져오는 방법입니다.

만약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외계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죠!

둘째는 인류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 에너지의 효율성을 극적으로 늘리거나

우리가 원하는 형태로 마음껏 변형시킬 수 있는 기술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풍요의 100년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화제가 되는 3D 프린터가 새로운 소비의 장을 열어줄 수는 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자원을 활용도를 높이는 기술이 아니라

기존의 자원의 효용을 극적으로 높이는 기술입니다.

3D 프린터는 단지 우리의 삶을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 채울 수도 있고

스마트폰 처럼 기존의 다른 산업들을 붕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에너지 분야에 있어 과거 수준과 다른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요즘 미래의 에너지라고 난리인 셰일가스 정도로 위기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셰일가스는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과 환경 파괴(이 또한 미래의 비용)를 극복해야 하니까요.
에너지와 자원 문제는 고갈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비용'의 문제입니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시스템에 투입되는 에너지가 비용증가로 인해 절대적인 양 마져 줄어든다면

말 그대로 설상가상의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셋째는 글로벌 정치, 경제 질서와 환경의 극단적 재구성입니다.

음모론에서 말하는 ‘인구 감소’ 프로젝트나 ‘세계 3차 대전’이

셋째 방법에 들어가겠지요?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만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어쨌든 우리가 현 상황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다음의 셋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첫째는 갑작스런 붕괴입니다.

어느 순간 글로벌 경제가 붕괴와 함께 사회의 모든 Grid가 붕괴되며

통제 불능의 커져가는 악순환이 만들어내는 참상을 지켜봐야 될 겁니다.

먹고 마시고 싸는 삶의 모든 부분들을

현대화된 도시 시스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잠깐의 작은 불편도 큰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도시 문명 속에서 기존의 도시 기능 일부만 제한이 되도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아마 과거 홉스가 말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목도하게 되겠지요!

끔찍하지만 영화 '더 로드'의 비극적 상황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둘째는 길고 지속적인 축소입니다.

에너지 채산성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며 에너지 비용이 늘어나고

정부의 신용 창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용 팽창이 이루어지지 않아

근본적인 개선 없이 경제적 침체가 지속되는 상황입니다.

갑작스런 붕괴는 없겠지만 작고 큰 위기가 반복되며

결과적으로 피 말리는 침체가 지속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인은 개인대로 국가들은 국가들대로 죽을 맛이겠지요.

문제는 이 상황 속에서도 부의 지속적인 이동이 생길 것이라는 점입니다.

과거 ‘부의 팽창’ 시대에는 빈부의 격차가 심해져도

모든 계층의 절대적인 부의 크기가 커졌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지켜볼 세상은 불가피한 ‘부의 축소’ 시대입니다.

각 계층의 절대적인 부의 크기가 작아짐과 동시에

빈부의 격차 또한 극심하게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사회적인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국가 권력은 더욱 강화되고 사회에 대한 통제도 심해질 것이며

정치,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인접 국가들과의 군사적 충돌도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는 각 국가들의 신용 팽창 정책이 성공하는 경우입니다.

정부의 노력 끝에 개인들의 수요와 소비가 늘어나고

침체됐던 경제가 살아나며 결국 정부의 적자폭 또한 줄어드는 시나리오지요.

물론 가장 이상적이고 모든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입니다.

사실 이 시나리오대로 간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위 세 가지 시나리오 모두

각각 비현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무언가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는 점입니다.

의미 있는 반전을 이루어내기에는 그간 우리는 너무나 흥청망청 했던 건 아닐까요?

아니면 최소한의 숙제도 하지 않고 미루기만 했던 건 아닐까요?

최소한 자원을 채굴할 때는 거대한 지구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과

부채를 통해 미래의 것을 미리 땅겨 쓰기 전에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빚을 갚거나

아니면 패가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생각을 했어야겠지요?

생각이 게으른 사람들이 망하듯이

생각이 게으른 국가나 문명도 그 대가를 치루 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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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다스림 | 작성시간 13.05.24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비빔밥(경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5.24 다스림님도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 작성자미기(여수) | 작성시간 13.05.26 전 비빔밥님 글을 읽고 실행을 해버리는 사람이라^^..
    "이러한 철저한 통제와 관리는 현 시스템의 안정성에 기여하며
    시스템의 문제점을 깨닫고 시스템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불이익을 주게 됩니다." ㅋㅋ 시스템의 부품이나 노예화 가축화 하려는 시도에 늘 벗어나길 원하며 준비했었죠.
    시스템은 영원하지도 그렇게 강건하지 않은데 거기에 인생을 송두리째 맡길순 없기에.. 그리고 모든 관계에 있어 사랑이 아닌 관계에 있어선 이해가 얽혀 분쟁이 있고 여기에 견제력을 갖지 못하면 굴욕을 피해갈 수 없고.. 주어진 인간권리에 대한 주장과 논리전개에 나서서 실효적 효과가 있었습니다. 행동해야 한다는게죠.

  • 작성자자스민혁명(서울) | 작성시간 13.06.04 님의 글은 예리하십니다. 항상 그랬듯이.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성을 압도하는 인간의 잔인성, 폭력성들을 가끔 우리는 뉴스나 매체를 통해서 봅니다.
    그 기반이 무녀져버렸을때는 어떨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파국을 맞은 배경의 미드들로 잘봐온터라.
    인간의 이성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인것같아요.
    아슬아슬한 경제적기반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하는 듯합니다.
  • 작성자레프트사이드(서울) | 작성시간 13.06.18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님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서론부분의 미셸푸코와 관련된 이야기 외에는 문화 변천과 관련된 용어가 너무 낯설어서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군요.. 하지만 중간 중간 요점정리해 주시는 부분을 통해서 파악했습니다.

    비빔밥님을 글을 100% 흡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참고서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시간나면 한 번 만들어서 팔아먹어 볼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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