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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20. 삼중 방어막

작성자jager|작성시간08.12.16|조회수2,908 목록 댓글 14

 

 

 

 

 " 1개 공수연대로 단 2시간이면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 러시아 국방부 장관 파벨 그라초프

 


    1994년 12월 11일, 러시아군은 마침내 '러시아 영토의 통일성 보전'과 '러시아 헌법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체첸 침공을 시작하였다. 총 병력은 4만에 달했으며, 230대의 전차, 454대의 장갑차, 388문의 대포와 박격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러시아 각지에서 차출된 5천에 가까운 내무부 소속 병력 (MVD)와 공수부대, 해군 육전대, 국경 경비대 병력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러시아가 위험해지면 떨쳐 일어난다는 테레크와 쿠반 코사크 인들도 4개 대대 규모를 편성하여 합류시켰다.

 

   러시아 국방부 장관 파벨 그라초프는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전쟁 5개월 전인 1994년 5월에 열린 브리핑에서 그라초프는 "러시아 북코카서스 군관구는 전쟁 준비가 되어 있으며, 군의 여단과 사단급 교체가 진행되고 신속 기동군의 편성을 마무리짓고 있으며 공군의 편성과 배치는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여기에 내무군 (MVD) 까지 정규군과 함께 편성하여 전투단을 만들었고, 그들은 '세계 어느 곳의 분쟁'에도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라초프의 설명에 따르면 말이다.

 

  그러나 군 내부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선 집결된 군의 구성이 너무 복잡하였다. 레닌그라드에서 극동 지역까지 각 군단 마다 1개 연대 씩 차출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과거 어떠한 인적 교류도 없는 상황이었고, 러시아 내무부 소속의 내무군 (MVD)와 국방부 소속의 육군 사이는 아예 관할 자체가 달랐기에 상호 긴밀한 협조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더욱이 소련 해체된 1992년 이후로는 어떠한 여단급, 사단급 훈련이 없었으며, 이러한 대 작전을 지휘할 만한 능력이 있는 장군들도 드물었다. 이 전쟁을  총괄 지휘했던 국방 장관 파벨 그라쵸프는 소련 - 아프간 전쟁의 베테랑이었지만, 그도 사단급 이상을 운용해본 경헙이 없었다.

 

 

 

 

 

 

러시아 전투기에 사격하는 체첸군. 체첸도 나름의 방공망을 갖추려고 노력하였다.

 

 


   러시아의 공세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는 체첸의 공군력의 파괴였다. 체첸군은 256대의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는 데, 80대의 L-29, 39대의 L-39 연습기, 3대의 미그 17기, 2대의 미그 15UTI기, 6대의 An-2기와 2대의 Mi-8 헬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11월 전투에서 수호이 24 전투기가 반 두다예프군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첩보도 있다.


    러시아 공군력에 비하면 비교하기가 민망한 수준이고, 이마저도 40퍼센트만이 전투가 가능했다. 그러나 체첸군의 비행기는 두가지 점에서 러시아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첫째는 체첸군의 비행기가 러시아의 핵 발전소나 다른 중요 시설을 향해  테러를 감행할 위험성이 있다고 봤다. 폭탄을 가득 채운 연습기로 건물에 들이박으면서 탈출 좌석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러시아 군의 진격에 기습적으로 공습을 가하여 작전에 지장을 초래하고 사기 저하를 불러올 수 있었다.

 

 

 

 

 

 

파괴된 체첸군 비행기

 

 

   러시아 공군은 140대의 전투기 (Su-25, Su-24, Su-22m)과 55대의 헬기 (Mi-24, Mi-8과 Mi-6)를 동원하여 체첸 내의 중요 비행장과 공군 시설을 폭격하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불과 몇시간 만에 체첸이 보유한 모든 비행기가 파괴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러시아의 앙숙이자 두다예프에게 동정적인 터키를 통한 어떠한 공중 수송도 차단하기 위해 A-50 조기 경보기와 5대 가량의 전투기를 띄어서 그로즈니 상공을 차단했다. 이제 하늘을 통한 체첸군의 공격은 불가능했다.


   이제 지상군이 개입할 때가 되었다. 러시아는 크게 3개 군을 편성하여 국경을 넘었다. 북쪽과 서쪽, 동쪽에서 넘은 이들의 군은 자연스럽게 북부군, 서부군, 동부군으로 불렸으며 각각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러시아군의 진격로

 

 

 

   북부군은  북 오세티야 모즈독에서 출발하여 남동족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체첸 북부의 전략 방어선이 될 수 있는 테레크 강의 교량을 확보하고 지역의 반 두다예프 세력의 협조를 얻는 것이었다. 이들의 핵심은 131 마이코프 기계화 보병 여단과 공수부대였다.

 

  서부군은 북오세티야 블라디카프카즈에서 출발하여 잉구세티야의 나즈란을 거쳐 동쪽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체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순자강을 따라 진격하면서 반항적인 남부 산악지대의 체첸인들이 서족에서 수도로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고, 동시에 두다예프에게 동조하는 잉구세티야인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페트릭 장군이 지휘하는 19 기계화 보병 사단과 21공수 여단이 주축이었다.

 

   동부군은 다게스탄의 키즐레이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3개 군 중에서 수도 그로즈니에 가장 가까웠지만, 체첸 제 2의 도시 구데르메스와 제 3의 도시 아르군을 제압할 책임이 따랐다. 거기에 전통적으로 러시아에게 가장 반항적이었던 남동부 산악지대의 체첸인들과 수도 그로즈니의 연결을 차단하는 막중한 임무가 따랐다. 129 기계화 보병 연대와 바딤 올로프 장군이 지휘하는 104 공수 사단이 핵심 병력이었다.

 

   12월 11일, 이들의 진격이 막 시작됬을 때만 해도 일선 병사들의 사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전차만 봐도 꽁지빠지게 도망칠  체첸 도적떼'를 상대하러 가는 것이며,  힘든 전투가 따를 것이라 별로 예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느 장교는 '그 놈들은 단순히 패배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두번 다시 반항할 수 없도록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고 12월 6일 인디펜던스 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들의 상대가 단순히 길가는 사람 납치하는 도적 패거리라 생각해지, 정규군과의 전면전을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피난가는 체첸인과 전선으로 가는 체첸군

 

 


   그러나 러시아군의 높은 사기는 진격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군의 침공에 항의하는 체첸인들의 항의 행렬이 길을 가득 메운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사람을 가차없이 죽일만큼 모질지 못했던 러시아 신병들은 이 상황에 대처하느라 진땀을 흘렸고,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체첸인들의 항의를 뿌리치면서 진격을 해야 했기 때문에 속도가 더뎌졌고, 러시아군의 사기도 떨어졌다. 특히 잉구세티야에서 출발한 서부군의 경우, 잉구세티야 대통령 루슬란 아우세프가 체첸인들에게 동정적이었고 자국 영내를 통한 러시아군 진격에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안좋았다.

 

 

 

 

 

 

 

그로즈니 외곽의 거점 지대 중 한 곳의 체첸군

 

 

 

  이것은 러시아군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두다예프가 준비한 첫번째 방어선이었다. 체첸 국경 지대의 시민들의 항의와 방해를 통해 러시아군의 진격을 늦추고 사기치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이는 상당한 효과를 얻었으며, 800명이 넘는 러시아군이 더 진격하기를 포기하였고 심지어 투항하기도 하였다. 다만 서부군과 동부군에만 해당되며 반 두다예프 세력이 강한 북부군을 상대로는 이 첫번째 방어막이 작동하지 않았고, 북부군은 예정대로 그로즈니를 향해 진격하였다.


    12월 12일, 개전한지 불과 하루 만에 북부군은 그로즈니 북서쪽 25킬로 떨어진 돌린스코예까지 진격하였다. 선두의 106 공수 사단과 56 공수 여단은 쾌속으로 진격하면서 큰 저항 없이 이 지점을 통과할 것을 예상하였다. 불과 며칠 뒤에 그로즈니 외곽에 도달하여 그라쵸프와 옐친이 예측하던 '빠르고 확실한 승리'를 달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격하는 러시아군

 

 

   바로 그 때, 체첸 최대 석유 정제소 중의 하나인 돌린스코에 공장 지대에서 여러 발의 로켓이 날아왔다. 트럭 위에 장착한 Grad 다연장 로켓이었다. 삽시간에 6명의 장교와 13명의 공수부대원이 전사하였다. 죽은 장교 중에는 선두에 있던 2명의 대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막 기습을 당해 얼떨떨한 러시아군을 향해 6킬로 떨어진 다른 방향에서 또 로켓이 날아왔다. 체첸군은 두 곳에서 매복한 채 러시아군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지에서 이동하는 체첸군

 

 

  러시아군은 즉각 반격하면서 공군 지원을 요청하였다. 공격 헬기가 바로 나타나서 체첸군의 매복 지점을 폭격하였다. 숲 속에 매복했던 체첸군은 러시아 헬기의 공격에 주의하면서도 계속하여 그라드 로켓을 러시아군 행렬을 향해 퍼부었다.  전투는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고, 러시아군은 10일이 넘도록 이 거점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2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두다예프는 자신이 보유한 포대와 전차, 장갑차 등을 두번째 방어선에 집중시켰다. 그로즈니 시에서 20킬로~30킬로 떨어진 여러 거점들을 연결하는 선으로, 페르보마이스코예, 사마스키, 톨스토이 유르트, 페트로파블로브스카야, 아르군 등의 마을과 도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점에서 체첸군은 매복한 채 러시아군을 기다렸다가 보유하고 있던 로켓과 포대를 이용하여 기습하였다.

 

 

 

 

 

 

체첸군의 2번쩌 저지선과 거점들. 돌린스코에는 가장 왼쪽의 파란원

 

   두번째 방어선은 서부군과 동부군의 진격을 늦추고 북부군의 진출을 방해하였다. 이 단계에 들어서자 러시아군 장성들 사이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늘기 시작하였고, 아직 체첸을 제압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사람이 생겼다. 그 중 한명이 북 코카서스 군관구 사령관이었던 알렉세이 미투킨 중장으로, 12월 18일에 병을 핑계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라초프는 더 분위기가 느슨해지기 전에 조치를 취할 필요를 느끼고 12월 20일에 북 오세티야 모즈도크로 날아가 참모회의를 주재한 뒤에 좀 더 과감한 공격을 주문하였다.

 

    야전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체첸군의 병력과 물자가 부족하였다. 작전을 시작한 지 20일이 넘어서자 두번째 방어선의 주요 거점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특히 동부군에 의해 그로즈니 동쪽의 한칼라 공군 기지가 함락된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104 공수사단이 선두에서 진격하여 공항을 확보하고 로스토프와 바쿠를 연결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속도로를 확보하였다. 거기에 아르군과 그로즈니를 연결하는 통로도 차단되었다.  체첸군은 이 곳을 확보하기 위해 7대의 전차까지 동원하여 12월 28일 한칼라로 역습을 가했다. 그로즈니와 아르군 양쪽의 체첸군이 협공을 가했지만 러시아 공수부대의 거점을 함락시키는 데 실패하고 전차 전부와 1대의 장갑차를 잃었다.

 

 

 

 

 

 

전차포를 손질하는 체첸군

 

    12월 말이 되자, 3개 축선에서 이루어진 러시아군의 그로즈니를 향한 진격은 거의 마무리 되었다. 북부군과 서부군 동부군은 모두 두다예프의 거점들을 함락시키고 도시 외곽까지 진출하였다. 러시아 공군은 주력이 시가지에 돌입하기 전인 12월 22일부터 도심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고,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의 북쪽, 서쪽, 동쪽에 포진한 러시아군은 대 공세를 준비하였다.

 

   그로즈니는 3면으로 포위되었지만, 남쪽은 열려있었다. 러시아 참모부는 수도의 주민들이 탈출하도록 도시의 남쪽 통로를 열어두었다고 했지만, 실상은 거기까지 봉쇄할 인력이 부족하였다. 이무렵에는 100만에 달했던 체첸인 중에 40만이 피난을 갔는 데, 수도에는 아직도 10만 가량이 남아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었다. 이들은 피난갈 수 있는 주변의 친척들도 없었고, 빠져나올 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12월 31일, 파벨 그라초프는 3면에 포진한 러시아군에게 그로즈니 시가지로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1995년 새해에 임박하여 수행된 이 대공세는 '신년 공세'라고 불렸으며, 그로즈니 시를 스탈린그라드 이후로 유럽에서 가장 황폐화된 도시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시가전의 신기원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체첸인들은 이미 지난 2년에 걸쳐 그로즈니 시내 전체를 3번째, 그리고 가장 강력한 방어막으로 구축한 채 러시아군을 환영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로즈니 중심가에서 기도하는 체첸군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Dolinskoye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Khankala
           http://www.guardian.co.uk/world/1994/dec/13/chechnya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6/yrusfail.htm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6/wounded.htm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5/chechpt2.htm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s
           Yossef Bodansky의 Chechen Jih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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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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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8.12.17 체첸군이 러시아군들을 초대해서 악으로 깡으로 기합을 넣게 만드는게 아닐까요?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2.18 2차대전 발지작전 때 '독일군에게 파리로 가는 골목길을 열어주고, 들어온 다음에 입구를 막아서 혼내주자'고 패튼이 말했지요.
  • 답댓글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8.12.18 유인 포위공격 인구요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09.03 아이러니하게 러시아 주민이 시내에서 폭격의 희생자가 되었군요... 러시아에 죽음으로 맞서는 체첸인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와 반대로 잉구셰티아는 너무나 평온한 것 같군요... 어찌보면 두다예프라는 영웅이 체첸인의 민족적 의식은 드높혔지만, 세속적 삶은 추락시키고 마는군요... 옐친과 두다예프,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협상은 요원하기만 하네요...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04 글 잘 보고 갑니다..수고하셨습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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