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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23. 외전 2 = 마지막 늑대

작성자jager|작성시간09.02.10|조회수2,652 목록 댓글 19

솔타무라드 베노이스키.


  - 바이산그로프 베노이스키는 어떻게 됬는가?

  - 처형당했소.

  - 아타브  아타예프와 우마 두예프는 어떻게 됬는가?

  - 투항하고 유배되었소.

  - 우마 하지와 다다 잘마예프는?

  - 처형당했소.
  - 알리벡 하지 잔다스키는?

  - 처형당했소.

  - 솔타무라드 베노이스키는?

  -  .........

 

 

 

 

 


    솔타무라드 베노이스키. 그는 1807년에 체첸 씨족 중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베노이 테이프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1826년, 러시아의 예르몰로프 장군이 본격적으로 '반항적인 체첸인들을 징벌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농작물을 파괴하고, 두번 다시 반항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시작할 때, 19살의 나이로 처음 전장에 섰다. 예르몰르프의 원정은 처참하였고, 향후 체첸과 러시아의 관계에 있어 평화적인 수단을 거의 영원히 배제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1830년, 가지 무하마드가 최초의 이맘이 되어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성전을 선포하였고, 이후 감자트 벡, 샤밀에 이르기까지 이맘이 교체되었다. 이 기간 동안 체첸에서는 타수 하지라는 신학자 겸 전사가 강력한 지지를 얻었으며, 솔타 무라드를 비롯한 베노이 씨족도 타수 하지를 후원하였다. 그러나 아훌고 전투 이후로 다게스탄의 자신의 거점을 잃은 샤밀이 체첸으로 건너 왔고, 점차 타수 하지는 샤밀의 영향력에 의해 자신의 입지를 잃게 되었다.

 

  샤밀이 체첸 지역에서 자신의 신정국가를 확고하게 다지자, 베노이 씨족도 샤밀의 성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씨족 회의를 거쳐 자신들을 지휘할 사람으로 바이산그로프를 선정하였고, 그를 보좌할 사람으로 솔타무라드를 선정하였다. 다르고에 있는 샤밀에게 이 결과를 전달하자, 이맘 샤밀은 바이산그로프를 베노이의 '나이브' (사령관)으로, 솔타 무라드를 '마줌' (부사령관) 으로 임명하여 결과를 추인하였다. 이후로 샤밀의 성전에서 솔타 무라드는 체첸 최대 씨족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바이산그로프와 솔타 무라드는 그 뒤로 샤밀의 주요한 작전에 참가하였으며, 대개 바이산그로프가 베노이 씨족의 병력을 이끌고 샤밀의 작전에 참여하면, 솔타 무라드는 베노이 마을에 남아서 후방 지원과 보급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솔타 무라드가 항상 전장에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베노이를 직접 타격할 경우에 그가 수비를 담당하였고, 1845년 다르고 원정 당시에는 러시아군의 보급로 차단에 참여하여 2번이나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1847년, 바이산그로프가 한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러시아군의 포로가 됬을 때, 솔타무라드는 러시아군이 그를 포함한 여러 포로들을 그로즈니 요새로 이송한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솔타 무라드는 이 호송 행렬을 습격하였고, 그는 바이산그로프를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바이산그로프와 솔타무라드는 샤밀의 작전에 참여하지만, 점차로 신정국가의 운이 기울고 있었다. 특히 크림전쟁 이후에 기대했던 오토만 제국과 영국의 지원은 없었고, 오히려 전쟁이 끝나고 남은 20만의 러시아 대군이 코카서스에 투입되면서 중과부적의 상황에 놓였다. 점차로 다게스탄과 체첸의 여러 마을들이 함락되었고, 마침내 샤밀은 1859년에 다게스탄 구니브에서 3만의 러시아군 대군에게 포위되었다.  체첸의 베노이 마을은 아직까지도 러시아군의 진입을 저지하던 몇안되는 거점이었으며, 바이산그로프는 솔타무라드에게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구니브로 가서 샤밀과 합류하였다.

 

 

 

 

 

 

1859년의 러시아군 공격 진로. 파란 점이 베노이, 붉은 점이 구니브

 

  바이산그로프는 샤밀에게 베노이로 가서 계속 싸울 것을 진언하지만, 샤밀은 이미 투항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바이산그로프가 투항하는 샤밀을 쏘려고 했지만 등을 돌리지 않아 쏘지 못했다는 것은 체첸에서 매우 유명한 일화다. 이후 바이산그로프는 독자적으로 러시아군의 포위망을 탈출한 뒤, 다시 베노이 마을로 돌아와 솔타 무라드와 합류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충성하던 이맘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했다.

 

  러시아군은 샤밀을 사로잡은 뒤에 베노이로 가서 마지막 남은 체첸의 저항 세력을 뿌리 뽑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러시아군의 공격에 계속 저항하다가, 숲속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러시아군은 베노이 마을을 불태워서 투항하지 않은 그들에 대해 보복하였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체첸과 다게스탄의 모든 반란 세력이 뿌리 뽑혔으며,  다시 저항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구니브에서 러시아군을 돌파하는 바이산그로프

 

  그러나 바이산그로프와 솔타 무라드의 생각은 달랐다. 씨족 회의를 통해 다시 '하자바트' (성전)을 결의한 그들은 마을의 가축과 재산들을 숲속에 숨겨둔 채 러시아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가 1860년 5월로, 샤밀이 항복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 반란은 이후 러시아의 '토지 재분배' 정책과 산민들의 집단 이주 정책에 대한 반발에 힘입어 체첸 각지로 들불처럼 번졌다.

 

  러시아가 배치한 현지 주둔군 정도로는 이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다. 무사 쿤두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6월에 바이산그로프와 4번이나 접전을 벌였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셔야 했다. 이후 8개월 동안 베노이에 러시아군이 진입할 수 없었다. 사태의 시각성을 깨달은 러시아는 1861년 1월, 인근 3개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러시아군과 코사크 군을 집결시켰다. 7천의 러시아군과 4백의 코사크군, 그리고 7백의 체첸 현지 지원병이었다. 도합 8천이 넘는 병력으로 베노이를 공격하였다.

 

 

 

  솔타무라드와 바이산그로프는 이 병력을 상대로 버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대적할 방법이 없었다. 러시아군은 1861년 1월 25일부터 2월 11일까지 초토화 작전을 했고,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처음 작전을 할 당시에는 '산민들은 어디에나 나타나서 우릴 공격하고, 우린 어딜가도 그들을 잡을 수 없다'고 하던 쿤두코프 장군은 작전 종료 무렵에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이제 베노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 중에 러시아에 복종하지 않을 사람은 한명도 없으며, 무사히 남아있는 집 역시 한채도 없습니다. 모든 식량 창고는 파괴되었고,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고 또한 포로가 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은 바이산그로프와 함께 도주하였습니다. 솔타 무라드도 자신의 도적떼들과 함께 베노이를 떠났습니다.'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쿤두코프는 베노이를 포함한 인근 15개 마을을 파괴하고 해당 주민들을 산맥 아래의 평야지대로 강제이주 하였다.

 

 

 

 

 

 

 

  베노이의 반란이 제압된 지 한달 뒤인 3월 1일, 바이산그로프와 솔타 무라드의 은신처가 러시아군에게 포착되었다. 겹겹이 쌓인 포위망 속에서 바이산그로프는 자신의 말이 사살되자 한쪽 팔과 한쪽 다리로는 더이상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처형되었다.

 

  솔타 무라드는 이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바이산그로프가 러시아군에 잡히는 것을 알았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간신히 위기에서 살아남은 그는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의 복수를 위해 아르군 계곡에 있던 다른 체첸 반군과 합류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반란은 체첸 전역으로 번졌고, 아르군 계곡의 사토이에도 성전을 결의한 자들이 있었다. 과거 샤밀 휘하의 나이브 였던 아타브 아타예프와 우마 두예프였다. 러시아군 소장 바제노프가 지휘하는 5천 병력이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14개 마을을 불태웠지만, 그들은 몇번이나 포위망을 빠져나가 계속 저항하였다. 역시 러시아군은 추가로 병력을 집결하여 그들이 사는 곳을 초토화 하였지만, 아타예프와 우마 두예프는 숲 속으로 들어가 러시아군의 공격을 피했다.

 

 

 

 

 

 

산악지대에 매복한 체첸인들

 

  바로 이 무렵에 솔타 무라드가 그들과 합류하였다. 그들도 솔타 무라드의 명성을 익히 아는 터라 자연스럽게 반란의 한 축이 되었다. 솔타 무라드와 그의 지휘 하의 베노이 씨족 체첸인들이 합류하여 러시아군은 다시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여기에 10월에 다른 지역의 체첸 반란 세력들도 이들과 합류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솔타 무라드와 아타브 아타예프, 우마 두예프는 체첸 전역의 성전의 주모자가 되었다.

 

  러시아는 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이 반란을 뿌리뽑기 위해 8천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앞서 베노이를 불태운 쿤두코프 장군과 바제노프 소장 휘하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했던 투마노프 대령이 이 병력을 지휘하여 1861년 11월, 아르군 계곡 일대의 마을들을 불태우고 숲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아르군의 주모자들은 이 공세에 버텨낼 수가 없었다.  혹독한 겨울을 마을의 식량 지원 없이는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1861년 11월 26일, 아타브 아타예프는 사토이의 러시아군에게 항복하였다. 한달 뒤인 12월 26일에는 우마 두예프가 뒤를 이었다. 솔타 무라드는 끝까지 버텨보려고 했지만, 중상을 입은 채 러시아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고 수십개의 마을이 파괴된 샤밀의 항복 직후에 벌어진 이 반란이 종료되었다.

 

 

 

 

 

 

   러시아는 투항한 주요 반란 주모자들을 러시아 국내로 강제이주 시키려고 하였다. 아타브 아타예프는 포르코프 지역으로, 우마 두예프는 스몰렌스크로 각각 보내졌다. 솔타 무라드의 경우에는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바이산그로프처럼 교수형에 처할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산민들에게 반란 주모자의 최후로 대대적으로 선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솔타 무라드는 아직 자신의 성전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반란의 주모자이자 사형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엄중한 감시가 있었음에도 그는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자기 고향인 베노이로 숨어 들었고, 현상수배가 붙은 모반의 주모자로서 '아브레크' (도적) 가 되었다. 러시아군은 그를 추격하였지만, 베노이 씨족들은 무수히 사선을 넘나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러시아군에게 붙잡히게 놔두지 않았다.

 

 

 

 

 

아브레크의 모습

 

 

  그 뒤로 16년이 지나, 러시아와 오토만 제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코카서스에는 다시 모반의 기운이 싹텄다. 이미 오토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몇차례나 전면전을 겪은 한 하늘 아래 같이 있을 수 없는 원수였으며, 이들의 대립은 늘 코카서스 지역에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호기로 작용하였다.

 

    특히 1877년의 오토만과 러시아의 전쟁은 체첸인들에게 또다른 의미에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오토만 제국이 코카서스 지역에 파견한 장군이 샤밀의 둘째 아들인 가지 무하마드였던 것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처럼 러시아에 투항하는 대신에 오토만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장군의 자리까지 올랐다. 과거 샤밀의 신정국가의 후계자로 선정되기도 했던 이 유능한 샤밀의 후예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작전을 위해 체첸의 봉기 세력과 결탁하려고 하였다.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봉기를 노리던 산민들은 비밀리에 1877년 3월 16일, 사야산 마을 근처에서 회담을 가졌다. 60여명의 각 씨족의 유력자들이 모인 이 회담에서 러시아에 대항하여 또다른 성전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22세의 젊은 알리 벡 하지가 봉기의 주모자로 선정되었다. 전하는 말로는 알리 벡 하지는 이 자리에 같이 참여하고 있는, 과거 대러시아 항쟁에서 엄청난 경력을 쌓고 전설적인 명성을 떨친 70살의 노인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솔타 무라드였다.

 

  그때까지도 러시아의 추격을 피해 은신해 있던 솔타 무라드는 이 봉기에서 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그의 휘하에 집결하는 산민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러시아는 오토만과의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발발한 이 엄청난 사태에 신속히 대처해야 했다. 우선 산악지대를 휩쓴 반란이 산맥 아래의 평야지대로 번지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했다. 우선 모반자들이 산악지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처음 통과하는 샬리 지역에서 러시아군은 방어진을 편성했다. 샬리는 산악지대와 평야지대의 경계선에 있는 교통의 요지로, 그곳이 성전에 동참하면 '체첸 전역의 대 반란의 신호'가 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1만 5천에 달하는 병력을 집결시켰고, 90문이 넘는 포대도 배치하였다. 알리 벡 하지는 샬리의 저지선을 돌파하려고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러시아군은 한시름 돌린 채 재차 병력을 집결하여 반란의 주요 거점들을 함락시키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군은 우선 알리벡 하지의 주요 거점인 체첸의 동부 산악지대를 정리하려 하였고, 1877년 5월부터 테레크 군관구 사령관인 스비츠노프의 지휘 아래 일대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 알리 벡 하지의 고향 잔다크와 베노이 마을에 대해서는, 만약 반란군에 대한 협조를 끊지 않을 경우에는 '마을 전체를 저지대로 강제 이주'한다는 것도 공언하였다. 여기에 병행하여 반란의 주모자에 대한 막대한 상금도 내걸었다. 알리 벡 하지는 생과 사를 불문하고 수천 루블, 솔타 무라드와 다다 잘마예프는 수백 루블, 기타 가담자들에게는  25루블의 상금을 걸었다.

 

 

 

 

 

 

 

 그러나 알리 벡 하지와 다른 반란군들은 삼시르의 숲 속에서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비록 모든 체첸인들이 알리 벡의 모반에 동조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가 순수한 열정에 의한 성전을 주창했으며, 그로 인해 가혹하게 고통받는다고 모두가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며, 7월 6일에 수행된 6천 병력의 러시아군 공격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지휘관인 바티아노프 대령은 숲 속으로 병력을 깊숙히 밀어 넣기를 두려워 하여 체첸인 지원병들을 앞장서게 했지만, 그들은 러시아를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체첸인들이 러시아군을 기습하여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뒤에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갔다.

 

 1877년 7월 25일, 한숨 돌린 알리 벡 하지는 다시 대담한 공격을 가했다. 러시아군이 마케타 마을을 불태우고 135명의 '선동자'들을 베데노로 이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250명의 러시아군과 2문의 대포가 호송 행렬에 딸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알리 벡 하지와 솔타 무라드는 이 행렬을 기습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이 소식은 다게스탄과 체첸 전역으로 퍼져서, 침체에 있던 모반의 불꽃을 다시 불피우게 하였다. 샬리 지역에서도 러시아 정부가 금지한 '지크르' (수피즘의 기도를 위해 추는 춤)를 추기 시작하며 성전에 대한 동조 의사를 보였다.

 

  7월 29일, 샤밀 시절 다게스탄의 '나이브'이자 1860년 반란에도 참여했던 우마 하지가 이 반란에 동참하였다. '그들이 불태우고 파괴한 마을과 여러 씨족들에 대한 만행, 이슬람교도에 대한 이교도들의 탄압에 저항'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영향력이 상당했다. 여기에 8월 13일, 첸토리의 슐레이만이 스스로 '이맘 알리 벡 하지의 나이브'를 주장하며 코사크 인들의 거점을 습격하였다.

   이 때가 알리 벡 하지의 반란의 절정이었다. 1877년 8월 중순, 20대의 젊은 이맘 휘하에 47개의 마을들이 협력을 약속했다. 여세를 모아서 알리 벡 하지는 8월 22일 첸토리에 들어서고, 이어서 베노이를 지나서 8월 24일, 노자 유르트를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다시 동원 가능한 총 병력을 집결시켜야 했다.

 

 

 

 

 

 

  러시아군은 알렉세이 스메칼로프 소장의 지휘 아래 6천의 러시아군과 1천의 코사크군, 산민들을 집결하였다. 8월 26일, 제멘츄크 마을 근처의 능선에서 주력 부대끼리 격돌하였다. 전투는 격렬하였고 러시아군의 포격 속에서 산민들이 역습까지 가했지만, 물러서야 했다. 러시아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틀 뒤에는 그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고 또 다른 반란군의 거점인 첸토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 첸토리에서 주요 반군 지휘자들이 이미 숲 속으로 빠져나간 것을 알게 된 스메칼로프 소장은, 첸토리와 베노이 마을의 유력자들에게 자신의 방침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전했다. 계속 이렇게 나오면 마을 전체를 모두 이주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인질들을 마을마다 끌고 와서, 만약 반란에 대한 지원을 끊지 않으면 목을 메달겠다고 하였다.

 

  반란의 주력부대가 러시아군에 의해 격파되었고, 러시아군은 10월에 알리 벡 하지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습격했지만 그가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체첸 지역의 주요한 반란 거점을 장악했지만 9월 들어서 무하마드 하지를 중심으로 한 다게스탄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이들은 소그라틀 마을을 거점으로 봉기를 하였고, 러시아군의 자료에 의하면 다게스탄 전역의 13,140호의 산민 중에서 11,642호가 이에 동참했다고 한다. 과거의 반란에 비해 이 반란에서 다게스탄의 참여도는 엄청났다. 그때까지 살아 남았던 알리 벡 하지, 솔타 무라드, 우마 하지, 다다 잘마예프 등의 주요 지휘관들은 소그라틀로 이동하여 최후의 거점으로 삼았다.

 

 

 

 

 

 

다게스탄의 이맘. 무하마드 하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과정이 다시 반복되었다. 러시아군은 다시 병력을 집결하여 산민들의 주력을 파괴한 뒤 마을 각지를 불태우고 인질들을 잡았다. 1877년 11월 13일에 그들은 소그라틀을 포위할 수 있었다. 이때 알리 벡 하지를 비롯한 여러 반란의 주모자들은 러시아에게 투항할 것을  결의하였지만, 솔타 무라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모두 러시아군에 투항하였지만, 솔타 무라드는 이 마지막 포위망까지도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체포된 알리 벡 하지

 

  1878년 3월 16일, 알리 벡 하지, 우마 하지, 다다 잘마예프를 비롯한 17명의 반란 주모자들이 그로즈니 군사법정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리하여 6개월에 걸친 짧은 성전은 막을 내렸다.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던 터키와 러시아의 전쟁도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일방적인 공세 속에 터키의 패배로 끝났다. 마치 한순간의 바람처럼 체첸과 다게스탄을 휩쓸었던 반란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솔타 무라드는 혼자 살아남았다. 그는 처형당하지도, 유형되지도, 슐레이만처럼 오토만 제국으로 망명하지도 않은 채 베노이 인근의 숲속에서 은신하였다. 러시아는 그를 결코 잊지 않았고, 어떻게든 체포하여 반란의 주모자에 대한 본보기로 삼고자 했지만, 그는 러시아의 손에 죽지 않았다. 오랜 숲 속의 생활로 몸이 초췌해진 채, 과거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전우들이 모두 죽어간 것을 알게 된 뒤로 그는 심신에 병을 얻었고, 결국 1878년에 은신한 숲 속에서 죽고 만다.

 

 

 

 

 

 

 

솔타 무라드

 


   솔타 무라드 - 예르몰로프의 가혹한 공세 속에서 처음 칼을 잡은 1828년부터 고향 주변의 숲 속에서 숨을 거두는 1878년까지 그는 무수히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러시아를 향한 칼을 놓지 않았다. 그의 고향 마을 베노이는 그 과정에서 몇번이나 불탔고, 그의 친척과 친우들이 무수히 많이 사살됬으며, 그와 손잡았던 수많은 동료들이 러시아의 손에 전사하고 투항하는 속에서도 그는 끝끝내 러시아와 타협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마치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한마리의 늑대처럼 그는 그렇게 살다가 조용히 숨을 거뒀다.

 

 

 

 

 


   출처 :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www.syrtash.com/ru/history/empire/zelemkhan/
            http://en.wikipedia.org/wiki/Russo-Turkish_War_(1877%E2%80%931878)
            http://www.amina.com/kamina/76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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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2.15 그렇죠. 정말..
  • 작성자치우승천 | 작성시간 09.02.15 진짜 늑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 그야말로 투쟁의 대명사.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9.02.23 용기,명예,의무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09.27 러시아 장군 예르몰로프가 결국 체첸인들의 저항에 불을 붙였군요... 22세의 알리벡 하지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50년 동안 저항을 멈추지 않은 솔타 무라드는 정말 불굴의 전사군요... 영웅 바이산그로프에 필적할 만한 인물입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04 솔타 무라드!!!..제목처럼 완전 마지막 늑대와 같이 살다가 최후를 맞는군요..감동적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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