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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28. 후퇴 속의 역습

작성자jager|작성시간09.03.19|조회수3,258 목록 댓글 20

 

 

 

 

 

       "러시아는 체첸보다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모든 체첸인은 각각 러시아군 150명을 죽여야 한다."

 

 

                                                                               -  체첸 공화국 수석 이슬람 신학자

 

                                                                                            아흐마드 카디로프

 


   페르보마이스코예 이후 러시아의 공세는 한층 격렬해 졌다.  지난 휴전 기간 동안에 체첸측은 산악지대에서 중부 지방의 몇몇 거점들을 다시 장악하였고, 러시아는 이들 마을들을 재탈환하고자 하였다. 공격은 남동부 지역에서 시작됬으며, 우선 살만 라두예프의 고향은 노보그로젠스키가 첫번째 타겟이 되었다. 1996년 2월, 노보그로젠스키는 러시아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로서 그로즈니와 다게스탄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갔다.

 

   1996년 3월이 되자 러시아군은 남서부 쪽에서도 공격을 시작했다. 우선 잉구세티야 나즈란과 체첸 수도 그로즈니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인 사마스키를 먼저 공격하였다. 300명에서 400명으로 추정되는 체첸군은 이 공격을 5일동안 버틴 뒤에 심야에 러시아군 포위망을 포복해서 빠져나갔다. 방어 기간 동안 총 4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체첸군 

 

 

  사마스키를 함락시킨 러시아군은 여세를 몰아 남진하였고, 아코이 마르탄도 함락시켰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평야지대의 거점들이었고,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거점들 - 바무트, 스타리 야코이, 오레코보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특히 1,300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 바무트는 개전 이래로 러시아군이 한번도 장악한 적이 없었다.  1995년 4월의 집중 공세 때는 전차와 장갑차까지 동반한 러시아군의 공세를 4차례나 버텼다. 두다예프 대통령으로부터 '요새 바무트'라는 별명을 얻은 이 거점이 유지된 중요한 요소는 이웃 잉구세티야의 아슈티 마을의 체첸 난민들이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며 유사시 피난처 역활이 된다는 것이었다.

 

 

 

 

 

 

 

체첸 서부전선 상황도. 파란선이 대략적인 체첸군의 저지선. 붉은 화살표가 러시아 공격 방향

 

 

 

 

  러시아군은 이 정규군의 공세 이외에 지난번 수치에 대한 복수도 병행하였다. 1996년 3월 6일, 수도 그로즈니 남서부의 우르스 마탄에서 러시아 저격수가 살만 라두에프를 저격하였다. 살만 라두예프는 머리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러시아는 환호하였고 지난 5주 동안 벼르던 숙제를 끝냈다고 안도하였다. 그들 중의 누구도 살만 라두예프의 장례가 치뤄지지 않은 채 시신이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자가 없었다.

 

 러시아의 공세는 가열차게 진행되었고, 체첸군은 지난번 공세 때와는 달리 갖고 있던 기갑 장비와 중화기를 거의 소모하였기 때문에 정규전으로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파벨 그라쵸프 내무부 장관은 다시 한번 자신의 성공적인 공세에 대해 언론에 자랑스럽게 발표하였고, 러시아군도 이번에는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아슬란 마스하도프와 샤밀 바사예프

 

 


 그러나 1996년 3월 6일, 러시아군은 다시 한번 허를 찔렸다. 살만 라두예프를 죽였다고 발표한 그날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 1천명이 넘는 체첸군이 기습을 한 것이었다. 러시아군 주력이 서부와 동부의 전방에 있고 후방의 수도에는 도쿠 자브가에프의 친러시아 체첸 행정부의 요원들과 러시아 내무군이 지키고 있었다. 체첸군의 공격은 샤밀 바사예프와 루슬란 겔라예프, 과거 두다예프 정부의 문화부 장관이자 남서 전선 사령관이었던 아흐마드 자카예프가 지휘하였다. 자카예프는 구소련 시절에 연극배우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조하르 두다예프와 아흐마드 자카예프

 

 

 

 기습은 성공하였고 체첸군은 삽시간에 그로즈니의 남쪽 절반을 장악하였다. 이를 저지해야 할 자브가에프의 경찰들은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일설에는 사전에 체첸군과 내통한  상태였으며, 공격을 눈감아 주는 것은 물론 심지어 러시아군 위치까지 알려줬다고 한다.  체첸군은 일단 시내 중요 거점을 장악한 뒤에 포진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공격하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 연결하려고 할 때만 이를 차단했다고 하나. 그리하여 적의 인원을 파악하지 못한 채 시내의 러시아군은 지원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로즈니 중심가를 체첸군이 장악한 상태에서 조하르 두다예프가 시내를 방문하였다.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자카예프에 의하면, 두다예프는 체첸군이 마련한 안전통로를 거부한 채 단지 3명의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대로를 통과하여 시내에 들어섰다고 한다. 다예프 대통령은 방송국에 들어서서 자신들이 시내를 접수했으니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는 '대국민 담화'를 하였다. 이어서 사태를 파악한 러시아군이 반격을 가하고, 마스하도프는 대통령이 시내를 떠나야 한다고 간청하였고 두다예프는 3시간 정도 채류하다가 시내를 떠났다. 러시아군이 주변에 포진한 상황에서 감행한 두다예프의 대담한 행동은 체첸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중요한 역활이 되었다.

 

 

 

 

 

1996년 3월 공세 당시의 체첸군

 

 

  체첸군은 3월 9일까지 시내에서 버티다가 마스하도프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빠져나왔다. 이 전투로 러시아가 입은 손실은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100여명 전사였지만, 실제 전투에 있었던 지휘관들에 의하면 족히 400명은 된다고 한다. 두다예프는 이 공세는 시작에 불과하며, 앞으로 있을 큰 작전의 '리허설'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당시만 해도 모든 사람이 두다예프가 늘 하던 허풍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러시아 옐친 대통령은 다시 골머리를 앓았다.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날로 하락 곡선인데다가 체첸 전쟁이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그의 임기는 무한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1996년 6월에 대통령 선거를 하여 다시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산당의 제나디 주가노프를 이길 희망이 가물가물했다. 그로서는 이 인기없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유혈 사태를 종식시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런 차원에서 1996년 3월 31일, 옐친은 자신의 체첸 전쟁 종식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 골자는 즉각 휴전, 러시아군의 철수, 그리고 협상이었다. 서방 세계에서는 환호했지만 정작 체첸 땅의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대통령의 계획은 존중하지만 체첸 내의 테러 조직과 도적 소탕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옐친의 통제력이 장군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인지, 혹은 처음부터 통제할 생각이 없었던 건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쟁은 계속되었다.

 

 
  1996년 4월에 들어서자 러시아의 공세는 동부 전선에서 결실을 보았다. 산악지대인 노자 유르트 지역으로 넘어서는 초입에 있는 첸토리 마을이 4월 2일에 함락되었고, 3일 뒤에 그로즈니 남동쪽의 벨가토이가 함락되었다. 한번 탄력이 붙은 러시아의 공세는 베데노, 다르고, 베노이를 장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지휘부는 체첸 남부 산악지대 깊숙히 이튬 카일까지 물러서야 했다. 그 남쪽은 작은 마을 하나 없는 완전한 산악지대였다.

 

 

 

 

산악지대의 체첸군

 

 

  체첸군은 대적할 수 없는 러시아 공격을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빠져나갔다. 그들은 물자와 인원을 보존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영역을 다시 탈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동시에 러시아군에게 역습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안전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되면 더욱 가열차게 공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번은 동부지역 노자이 유르트 지역의 체첸군 일부가 북쪽으로 크게 선회하여 그로즈니 수도 북쪽의 거점을 타격하고 빠져나간 적도 있었다. 또한 쾌속의 진격을 하는 러시아군이 어느 순간 방심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때를 기다렸다.

 


 1996년 4월 16일, 체첸군은 샤토이 마을 근처의 야슈마디의 능선에서 기다리던 순간을 얻었다. 러시아 연방 245 기계화 보병 연대가 사토이를 지나 남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쪽에는 험한 산을 끼고 다른 한쪽으로는 계곡을 낀 좁은 길을 일렬로 전차와 장갑차를 이동시키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체첸 깊숙히 들어서면서 주변 지형에 대한 정찰이 부족한 채 위험한 지형에 들어선 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맨 좌측이 이븐 알 하타브

 

 

 

  러시아군의 행렬을 내려다 보는 산 위에는 43명에서 100명으로 추정되는 체첸군이 러시아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지휘관은 사우디 출신의 무자헤딘이었던 이븐 알 하타브였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 처음 총을 잡은 그는 이미 10년이란 엄청난 전투 경험이 있었다. 그는 선두의 정찰 부대가 지나간 뒤 본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후 2시 20분, 하타브는 본대 선두에 있는 전차를 미리 묻어뒀던 도로 매설 폭탄(IED)로 날려버렸다. 그걸 신호로 매복했던 체첸군이 일제히 러시아군 종대에 공격을 가했다.

 

 

 

 

 

 

 

 사토이 전투 상황도. 붉은 화살표가 러시아 행군 방향. 녹색 선이 체첸군 매복한 능선. 파란 화살표가 기습 방향

 

 

 

 

  선두의 지휘 장갑차에 있던 러시아군 테르조베트 소령은 전투 초기에 전사하였다. 체첸군은 선두의 전차와 장갑차를 파괴한 뒤에 후미에 있던 기갑 차량도 RPG로 파괴하였다. 그 다음 좁은 산길에서 앞 뒤로 막힌 나머지 러시아군의 연료 탱크, 수송 트럭, 장갑차를 공격하였다. 200명의 러시아군은 꼼짝없이 덫에 걸렸다. 긴급한 무전 연락을 받고 근처의 검문소에 있던 부대가 구원하러 왔지만 소용없었다.

 

 

 

 

 

 

공격 당시의 하타브. 무전으로 지시하고 있다.

 

 


  전투는 약 4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오후 6시가 되자 하타브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 공격으로 러시아군은 전차 1대, 장갑차 7대, 수송 차량 11대가 파괴되었고, 공식적으로 73명의 러시아군이 전사하였다. 체첸군의 피해는 3명 전사, 6명 부상이었다. 이 공격이 1차 체첸전에서 가장 유명한 매복 작전 중 하나인 샤토이 전투다. 하타브는 전투의 모든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하였고, 이 영상은 언론을 통해 공개되어 파벨 그라쵸프의 호언장담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그의 해임 요구가 다시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사토이 전투에서 파괴된 러시아 차량

 


  러시아로서는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고, 특히 1996년 6월 선거 전에 저런 참사가 반복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압도적으로 체첸을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체첸 정부 측과 협상을 해야 했다. 도쿠 자브가에프의 친러시아 정부는 이미 모두의 눈에 의미가 없었고, 두다예프 측과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협상이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보기에는 두다예프와의 대화란 정말 불가능했다. 1996년 4월 17일, 러시아 법무부 장관 발렌틴 코발레프는 '두다예프와 직접 대화란 불가능하며, 그는 러시아 법정에 자진 출두하여 자신이 행한 범죄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러시아의 눈에 전직 전략 핵폭격기 편대 지휘관은 말이 안통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를 통하지 않고 그의 체첸군 측과 대화할 어떤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리하여 1996년 4월 21일, 러시아 군은 그 방도를 찾았다. 바로 두다예프를 암살해 버리는 것이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
            http://en.wikipedia.org/wiki/Shatoy_ambush
            http://en.wikipedia.org/wiki/Ibn_al-Khattab
            http://amina.com/article/partition2.html
            http://amina.com/article/icprio.html
            Ser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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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3.23 두다예프는 그로즈니 봉쇄되기 전에 이미 샬리 지역으로 빠져나갔고, 그 뒤의 전투에도 실질적으로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지만, 당시 야전 지휘관들의 회고에 의하면 '정신적 지주'였다고 합니다. "러시아군이 여기까지 와줬으니 멀리갈 수고를 덜었다." "러시아 전차는 성냥갑에 불과하다" 이런 대담한 소리를 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하네요.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3.23 실질적인 작전은 마스하도프가 거의 총괄 담당했습니다.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10.27 악조건속에서도 정말 훌륭한 전사들이 많이 등장하네요... 정신적 지주인 두다예프의 암살이 성공할까?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06 불리한 조건에서도 역습을 가하다니 체첸군들의 투지도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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