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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33. 시궁창

작성자jager|작성시간09.07.22|조회수2,577 목록 댓글 17

 

 

 

 마스하도프 최대의 정적, 살만 라두예프

 

 

 

   체첸은 전통적으로 외부의 강력한 적이 침략할 때 하나의 수장 밑에 뭉치다가, 적이 물러나면 자중지란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면에서 조하르 두다예프는 강력한 수장이었다. 소련군 공군 소장 두다예프 휘하의 체첸인들은 그의 위치에 한점 도전할 마음이 없었으며, 그의 강력한 아우라 속에서 하나의 군으로 뭉칠 수 있었다. 그러나 조하르 두다에프가 암살되고 젤림한 얀다르비에프를 거쳐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취임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공식적으로 체첸 3대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휘하에 8,530명을 지휘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면서 각지에서 세력을 키운 지역 사령관 급이나 장군, 장교 급 중에 휘하 부대를 해산하기를 거부하고 눌러앉은 경우가 많았다. 체첸 정규군 외에도 총 300여개의 무장단체가 각지에 난립하였고, 그들의 총수는 2,500명에 달했다.  사실상 그들은 해당 지역의 '군벌'에 가까웠다.

 

 

 

 

'외로운 늑대' 살만 라두예프

 

 

   가장 막강한 군벌은 그로즈니 남동쪽 노비에 고르달리를 거점으로 한 살만 라두예프였다. 1996년 3월경에 러시아군 저격수에 의해 왼쪽 얼굴 전체가 박살난 '외로운 늑대'는 8시간의 수술 끝에 티타늄으로 박살난 왼쪽 얼굴 골격을 채워넣고 의안을 넣은 채 사지에서 생환하였다. 총알의 일부가 뇌에 박혀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 라두예프는 복귀하자 마자 '조하르 두다예프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 사병 집단을 '두다예프 군'이라 칭했다.  고르달리에 500명 이상이 상주하는 두다에프 군은 유사시 1천명 까지 동원 가능했다. 그 중에는 지난 전쟁에서 살아남은 정예부대 '대통령 경호대' 출신 200명도 있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 온' 살만 라두예프

 

 
   라두예프의 거점에서 좀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루지아와 체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인 기칼로프스키가 있었다. 이 곳은 '검은 천사' 겔라예프의 세력권이었다.  1997년 메카를 방문하여 '함자트' 라는 이름을 얻은 겔라에프는 이 곳에 500명의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로 그루지아와 체첸 수도를 연결하는 도로 상의 안전을 보장해주며 트력들의 통행세를 받았다.

 

 

 

 

 

함자트 겔라예프

 

  보다 남쪽 깊숙히 들어선 베데노 마을은 샤밀 바사예프의 고향이었다. 그는 300명의 사병에 각종 중화기 (5대 장갑차, 6대 전차, 2대 자주포)를 보유하였다. 마스하도프 정권의 요직을 맡고 있었지만 바사예프는 자기 사병 역시 거느리고 있었으며, 유사시 정부 시책에 반항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하였다.

 

 

 

 

샤밀 바사예프


 
  그러나 어느 군벌 조직보다도 두드러진 조직은 아랍 출신 무자헤딘 하타브의 훈련 캠프였다. 1996년 9월에 하타브는 그로즈니 남쪽 써전 유르트에 훈련소를 설치하였다. 훈련소에는 각기 다른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운영되는 4개 캠프로 이루어졌다. 각 캠프는 하타브를 따라 각지의 성전에 참가했던 수족같은 부하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먼저 아부 야파르 캠프는 기초적인 게릴라 전술과 접전 전술을 가르쳤다. 야쿠브 캠프는 전차, 장갑차, 박격포 등의 중화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캠프에는 직접 실습할 수 있는 전차, 장갑차도 수대 보유하고 있었다. 아부 바카르 캠프는 도심지에 폭탄 설치하여 인명 살상하거나 각종 요인 암살하는 테러 전술을 가르쳤다. 다우갓 캠프는 와하비 이념과 성전에 대한 정훈 교육을 하였다.

 

 

 

 

하타브. 그는 1차 체첸전 이후 체첸을 떠나지 않았다.

 

 

   하타브의 훈련소는 5명이 한개 조를 이뤄서 짧으면 2개월, 길면 6개월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들은 4개 캠프에서 산악 게릴라전과 시가전 전술, 매복술, 야간 사격, 도수 격투, 통신과 무선 교란 기술, 지뢰 매설법, 야지 생존법, 전차와 장갑차 등 중화기 사용법과 지하드 이념을 전수받았다. 실전으로 잔뼈가 굵은 훈련 교관들과 아랍 각지에서 초빙해 온 신학자에 의한 이념 전수는 어느 것이나 수준이 매우 높았고, 러시아의 재 침공으로 훈련소가 페쇄되는 1999년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2천명이 이 곳에서 훈련 받았다고 한다.

 

 

 

 

하타브와 샤밀 바사예프, 하타브가 체첸 영내에 활동하는 데는 바사예프의 도움이 컸다.


   체첸 정규군 외에 각지에 사병집단이 난립한 중요한 이유는 1차 체첸전 이후에 무기를 내려놓지 못한 체첸인들 때문이었다. 대부분 생계를 위한 직업도 없고 집도 없었던 체첸인들은 결국 계속 무기를 드는 일을 해야 했으며, 주요 인사 보디가드를 제외하고는 사병 집단에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병 집단이라 한들 뚜렷한 수입이 있을리가 없다.


  결국 체첸 각지에는 테러와 납치가 독버섯처럼 퍼져 나갔다. 체첸 전역에 60개가 넘는 납치 조직이 활개를 쳤는 데, 이 중에 가장 악명 높고 가장 강력한 납치 조직 두목은 아르비 바라예프였다.

 

 

 

 

아르비 바라예프

 


  체첸 남서부 알칸 칼라 출신의 아르비 바라에프는 우수한 무술가 출신으로 젤림한 안다르비예프 경호원을 하였다. 그는 샤밀 바사에프의 부데노프스키 인질극에 참여한 150여명 중의 한명이며, 두다예프 암살 뒤에 2대 대통령이 된 젤림한 얀다르비에프는 바라에프에게 '이슬람 특수 연대'를 편성하고 지휘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어진 3차 그로즈니 전투에 참가하기도 한 바라예프는 종전 후에도 '이슬람 특수 연대'를 자신의 사병으로 운영하였다.

 

 

 

 

 

 

1996년 8월 그로즈니 공세 때의 아르비 바라예프

 

 

  젤림한 얀다르비예프의 선거전을 지원한 아르비 바라에프는 자금 마련을 위해 처음 납치극을 벌였다. 그로즈니 근처 키로프 화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29명의 러시아 기술자를 납치한 바라에프는 그 뒤로도 몇번의 납치극을 벌여 몸값을 받고 풀어줫다. 얀다르비에프에게 6만 달러를 지원한 바라예프는 1997년 대선에서 마스하도프가 당선된 이후에는 자기 자신의 돈벌이와 '이슬람 특수 연대' 유지비를 위해 납치극을 벌였다.

 

 

 

 

람잔 아흐마도프. 독자적으로 혹은 바라예프와 함께 납치하고 몸값을 받았다.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체첸 내에서 납치된 사람은 무려 3천명에 달했다. 아르비 바라예프는 이들 중 상당수를 그가 직접, 혹은 그의 이름을 빌린 다른 군소 조직에 의해 납치하였다. 잔혹한 바라예프의 이름을 협박장에 올린다면 더 높은 몸값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몸값을 뜯어내면 군소 조직에서는 바라예프에게 '로열티'를 지불하였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사업으로 바라예프가 벌어 들인 돈은 2억 달러에 달했다.


  가장 악면 높은 납치 사건은 1997년 7월에 영국 구호단체의 아동 상담가 카밀라 카와 존 제임스 납치극과 1998년 10월 3일에 영국 그렌져 텔레콤 회사의 4명의 외국인 기술자 납치 참수극이었다. 전자는 바라예프가 직접, 후자는 그의 이름을 빌린 람잔 아흐마도프가 저지른 짓이다.

 

 

 

 

납치된 존 제임스

 

 

  바라에프는 70건이 넘는 외국인 납치를 자행하였고, 각기 수만 달러에서 수백만 달러를 요구하였다. 만약 몸값을 내는 것을 미적거린다면, 바라에프는 손가락을 잘라서 보내는 것도 서슴치 않았으며, 그것을 비디오로 찍어서 보내주기 까지 하였다. 또한 더 높은 몸값을 누군가가 제시하면 그에 따라 행동하였다. 체첸 내외에 이 기간에 벌어진 가장 잔혹한 일로 꼽히는 그렌져 텔레콤 기사 참수 사건은 일설에는 1천만 달러 선에서 교섭 중이었는 데 아프간의 오사마 빈 라덴이 3천만 달러를 제안하며 참수 요구했다고 한다. 그 소식통에 의하면 라덴의 목적은 '온건한 마스하도프 정권 전복'을 위한 대내외적인 불안 조성이었다고 한다.

 

 

 

 

 

 

참수된 그렌저 텔레콤 직원들

 

 


  바라예프는 납치극 외에도 자신과 자신의 부대에 위협이 되거나 그의 일을 방해하는 자에 대해서는 암살도 자행하였다. 그가 직접 죽이거나 그의 부하를 통해 죽인 사람의 수는 160명에 달하며, 그 중 50명이 자기 고향 알칸 칼라의 체첸인들이었다. 심지어 그의 친척이라 해도 그의 일에 방해가 된다면 죽이기를 서슴치 않았다.

 

 

 

 

 

아르비 바라예프

 

  위와 같은 납치극 외에도 체첸 국내에는 기존의 이슬람 수피즘과 이질적인 외부의 와하비 이슬람 이념이 확산되고 있었다. 1차 체첸전 당시 국내에 들어와 러시아와 전쟁을 하는 데 도와준 아랍 출신 무자헤딘들은 종전 후에도 떠나기를 거부하고 지하드 이념을 전수하였다. 그들은 코카서스 전역의 무슬림을 이교도의 압제에서 해방하고 샤리아 율법에 따른 국가 건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지하드 이념 전파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하타브였으며, 그의 써전 유르트 훈련 캠프는 체첸인 외에도 다게스탄인, 위구르인, 흑인, 말레이시아인, 타지크인, 우즈베키스타인, 러시아인, 그루지아인 등의 외국인들도 합류하였다. 사실상 아프간의 오사마 빈라덴 캠프와 함께 국제적인 지하드 훈련 코스가 되었다. 하타브는 이러한 훈련소를 마스하도프의 고향인 알레로이에 까지 만들었다.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2대 대통령 젤림한 얀다르비예프였다. 그는 두다에프 사후 체첸 수장이 되어 이웃 다게스탄의 유력한 와하비 인사들을 체첸 정부 내로 많이 초빙해 왔다. 바가우딘 마고메도프는 체첸의 샤리아 율법 체계를 도입하기 위해 초빙되었고, 이슬람 칼리모프는 샤리아 법정의 수장이 되었으며 주요 요직에 그와 같은 와하비 출신을 배치하였다. 이로서 마스하도프가 취임할 무렵에는 정부 내에도 무시 못할 수준의 지하드 이념가 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체첸 수피즘 수장인 아흐마드 카디로프는 얀다르비에프가 정부 내에 시한폭탄을 설치햇다고 비난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와 아흐마드 카디로프(우측). 당시 수피즘 최고 신학자였다.

 

  카디로프가 경고한 시한 폭탄은 서서히 작동하였다. 1996년 7월에  모스크바의 통근 버스, 지하철, 기차역을 폭발시켜 자신의 복귀를 성대하게 알린 살만 라두예프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은 조하르 두다예프와 알라 뿐이라며 마스하도프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1996년 12월 14일에 다게스탄 영내에서 현지 경찰 6명과 러시아 펜자 오몬 21명을 억류했던 살만 라두예프는 '이미 체첸에 두다예프 대통령이 엄연히 존재하는 데, 이를 부정하는 1997년 선거는 반역이다' 고 주장하다 1,500만 달러의 몸값을 받고 풀어줬다.  여기에 1998년 2월에는 그루지아 대통령 세비나제를 암살 시도 했는 데, 그 이유는 전직 그루지아 대통령 즈바디아 감사쿠디아 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뒤에 다시 탈환을 노렸다가 죽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

 

 

 

 

살만 라두예프와 조하르 두다예프. 두다예프의 심복이었던 라두예프는 그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사실상 제정신이 아니라 여겨지던 라두예프의 대외적 테러와 대내적 반정부 움직임은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야기하였다. 1997년에만 3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으며, 첫번째인 4월 9일 라두에프의 차가 폭발하였고 그는 재차 수술을 받아야 했다. 7월에 그의 사령부 근처에 폭발물이 가득 찬 트럭이 터졌지만 그가 부재중이었다. 10월의 암살 시도에서도 그는 중상을 입고 살아남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라두에프는 1997년 4월에 러시아 퍄티고르스키 기차역을, 카바스키 크레이 지역의 비라 마을과 아르마비르 마을에 테러를 가했다.

 
  하타브 역시 단순히 훈련 캠프에서 교관 노릇에 만족하지 않았다. 1997년 4월에 체첸 남부 베노이에서 도로 매설 폭탄으로 누군가 하타브의 암살을 기도하였다. 폭발이 빗나가 간신히 살아난 하타브는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하고 이에 대한 복수를 결의하였다. 그는 가장 가까운 러시아 군기지인 다게스탄 부이나스크의 러시아 136 기계화 연대를 적으로 지목하고 1997년 12월 22일 115명을 이끌고 기습하였다. 하타브의 무자헤딘은 3개 제대를 편성하고 12월 22일 02시에 습격하였다. 2시간 교전 동안 러시아군 연대 사령부 일대는 하타브에 의해 장악되었고, 적어도 전차, 장갑차 10대 파괴, 15대 손상의 피해를 입었다.

 

 

 

 

 

다게스탄 부이나스크, 하타브의 본거지에서 100여킬로 떨어져 있었다.

 

  하타브의 무자헤딘은 부이나스크 기지 습격 이후 러시아군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하였고, 라두에프가 보낸 두다예프군 20명의 증원을 받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3개 병대를 지휘한 부하 중에 아부 오마르 (와하비 이념가)와 아부 왈리드 (하타브의 후임)는 살아 남았지만 훈련소 캠프 중 한 곳의 책임자였던 아부 바크르는 전사한다. 러시아군 측 피해는 3명 전사 16명 부상이었다.

 

 

 

 

아브 바크르. 아프간에서 한쪽발을 잃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위험은 1998년에 들어서자 더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전국 각지에 납치극이 자행되었고, 각지의 군벌들은 점차 지하드 이념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위협과 테러를 자행하였다. 특히 '러시아 각지의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라두에프의 테러 위협과 바라에프의 잔혹한 인질극, 거기에 하타브의 와하비 이념 확산은 마스하도프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온건한 합리주의자인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체첸 3대 대통령으로서 자국 내의 극단주의와 테러, 납치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이를 빌미로 러시아의 재침공을 불러올 것이며, 체첸 땅은 다시 전화를 입기 때문이었다. 국제 무대에서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며 낙담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심각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모든 것이 잘못되기 전에 빨리 결단을 내려야 했다.

 


 

 

출처 :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
          http://en.wikipedia.org/wiki/Movladi_Udugov
          http://en.wikipedia.org/wiki/Zelimkhan_Yandarbiyev
          http://en.wikipedia.org/wiki/Aslan_Maskhadov

           http://en.wikipedia.org/wiki/Arbi_Baray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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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롱기누스 | 작성시간 09.07.25 정신병자, 문지기,2인자,광신도,범죄조직,와하비와 근본주의 전임자... 마스하도프에게는 2인자, 문지기 빼고는 빨리 처리할 필요성이 있는 인간들 뿐이군요.
  • 답댓글 작성자롱기누스 | 작성시간 09.07.25 근데 아동문학가라는 인간이 근본주의자일줄이야...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7.25 2인자의 조력 없이는 마스하도프의 힘으로는 저들을 처리할 수 없었고, 2인자는 와하비와 친했습니다. 문지기는 관망하다가 나중에는 반 마스하도프 대세에 동참했고요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10.27 대통령 마스하도프, 수상 바샤예프, 강경파 라두예프, 검은천사 겔라예프, 납치전문 바라예프, 용병대장 하타브, 와하비즘 얀다르비예프, 수피즘 카디로프... 등등 체첸이 정말 시궁창 속으로 빠지게 되는군요... 역시 체첸은 평화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민족이군요... 안타깝습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10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그렇게 일치단결하여 싸웠던 체첸군들의 분열이 막장 수준으로 전락하는군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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