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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35. 산의 나라

작성자jager|작성시간09.09.27|조회수2,230 목록 댓글 15

 

 

 

다게스탄 지도

 

터키어로 '다그'는 산, 페르시아어로 '스탄'은 나라를 의미한다.  

 

 


   산악지대 여러 공화국 중에 최대의 인구 (200만) 를 자랑하는 다게스탄은 원래 코카서스 산맥의 이슬람 중심지였다.  이미 7세기경부터 이란 방면에서 이슬람교가 유입되기 시작한 다게스탄은 종교에 대한 열의에 있어 다른 공화국보다 두드러졌다.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에 다게스탄은 전역에 1600개가 넘는 이슬람 사원과 3천명이 넘는 이맘(신학자)를 두고 있었고, 중동 지역에 이슬람교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간 학생들이 5천명에 달했다. 이슬람식 기도하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다른 공화국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열의였다.

 

 

 

 

 

다게스탄의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는 무슬림들

 


  하지만 다게스탄은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매우 척박한 땅이기도 하였다.  원래 코카서스 산맥은 러시아 연방 전체에서 가장 가난한 땅 중의 하나였다. 다게스탄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인구의 60퍼센트가 빈곤층이었으며 실업률이 30퍼센트에 달했다. 특히 젊은 층의 실업률이 85퍼센트에 달했으며, 직장을 갖는다 해도 받는 급료는 러시아 평균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또한 다게스탄의 14개의 주요 민족으로 이루어졌는 데, 다게스탄 주요 2개 민족인 다르긴 족과 아바르족이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면서 국가의 부 8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수도 마하칼라의 정부 관료들은 북극권 무르만스키와 비견된다는 다게스탄 남서부의 혹독한 산지 주민들과는 이해 관계가 달랐고, 산민들 역시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이 강한 상태였다.

 

 

 

 

다게스탄 산악 마을 김리. 샤밀의 고향이기도 하다

 

 


   강한 종교적 열의와 척박한 사회 현실은 다게스탄에 이슬람 근본주의(와하비즘)이 자랄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었다. 이슬람의 영역이 대내외적으로 위태위태하던 18세기에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발원한 와하비즘은 '세속화되고 타락한 이슬람교를 배격'하고 '선지자 무하나드의 가르침에 따른 근원으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다.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가 이념이기도 한 와하비즘은 중동에 유학온 젊은 다게스탄인들이 접하기가 용이하였고, 젊은 층 특유의 과격함과 결합하여 다게스탄 현지의 부드러운 수피즘과는 다른 강경한 종교적 이념을 갖추고 돌아왔다. 이들을 통해 점차 다게스탄 전역에 와하비즘이 확산되었고, 특히 중부 부이나스키 지역에 눈에 띄게 번졌고, 현지 정부에서도 감히 건들기를 꺼릴 정도였다. 일명 '작은 와하비 공화국'이라고 불렸다.

 

 

 

 

 

밑줄친 곳이 부이나스키 지역


    1차 체첸전 이후에도 체첸 땅에 머물고 있는 하타브를 필두로 한 와하비 세력들이 '작은 와하비 공화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1997년부터 1년 반 정도 하타브는 부이나스크 지역의 핵심 와하비 거점인 카라마키 마을에 머물렀다. 하타브는 현지의 가장 유력한 가문의 딸과 결혼하였고, 다른 16명의 무자헤딘도 현지 여자와 결혼하였다. 이 중에는 지하드 이념가로 손꼽히는 아부 오마르 알 사이프도 있었다. 혈연관계를 맺은 하타브는 자신의 훈련 캠프에 500명에 달하는 다게스탄인들을 훈련시켰고, 필요한 무기, 탄약 등도 제공하며 유사시에 도와주겠다고 공언하였다.

 

 

 

 

 

훈련 캠프를 수료한 무자헤딘에게 연설하는 하타브

 

 

      다게스탄 와하비에 대해 하타브가 물질적 조력을 약속했다면, 체첸 공보장관 모브라디 우두고프는 이념적인 조력을 하였다. 그는 코카서스 전역의 무슬림 연대, 특히 다게스탄과 체첸이 동일한 이슬람 국가 연합체가 될 것을 주장하였다. 유능한 인텔리였던 모브라디 우두고프는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가장 든든한 지지세력에서 가장 강경한 와하비 이념가로 바뀌었는 데, 이에 대해서는 종교적 동기보다는 경제적 이유에서 였다는 설이 있다.  체첸은 러시아의 협조 없이 경제적 자립이 불가했는 데, 러시아와 수차례 협상한 우두고프는 그들이 독립을 인정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따라서 체첸이 독자적 경제 자립을 위해서는 다게스탄과 합병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바쿠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송유관을 장악하고 카스피해 서안을 통한 독자적 수출 활로를 원했다는 것이다.

 

 

 

 

 

모브라디 우두고프

 

     하타브와 우두고프에 이어 다게스탄에 관심있던 사람은 샤밀 바사에프였다. 체첸 최대 군사력을 보유한 바사예프는 이념적으로 와하비 쪽은 아니었지, 다게스탄과 체첸의 연합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과거 이맘 샤밀 시절의 영역으로 돌아가 서로 동질성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1997년은 이맘 샤밀의 탄생 200주년이었는 데, 바사예프의 고향 베데노에서 다게스탄 유력자들도 대거 참석한 성대한 행사가 되었다. 바사예프와 우두고프는 1998년 4월, 200명의 다게스탄인들을 포함한 500여명의 코카서스 유력 인사들이 참석한 '코카서스 이슬람 회의'를 개최하고, 다게스탄과 체첸이 항구적 단일 독립국이 될 것이라 공언하였다. 바사예프는 평화적 수단을 우선하여 다게스탄 독립을 지원하지만, 러시아의 개입 시 무력 사용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샤밀 바사예프

 

 

     1998년 중반기에 접어들자 다게스탄의 일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앞서 언급한 '코카서스 이슬람 회의' 이후, 하타브는 6월에 자신의 훈련 캠프를 이수한 무자헤딘들로 '체첸 다게스탄 이슬람 평화유지군'을 편성한다.  8월이 되자 다게스탄 현지 와하비의 핵심 지도자 중 한명인 바구틴 마고메도프가 부이나스키 지역의 카라마키, 차반마키, 카다르 지역을 장악하고 현지 경찰들을 밀어내고 지역 검문소를 설치한다. 바구틴은 부이나스키 지역이 '이슬람 공화국'의 영역임을 선포하고, 러시아 헌법 대신 샤리아 율법에 따른 통치를 공언한다. '작은 와하비 공화국'이 실제 이슬람의 영역이 되었다.

 

 

 

 

 

기도하는 무자헤딘들

 

    체첸의 주요 인사들과 다게스탄 현지 와하비 세력은 러시아의 반격을 예상하였다. 바구틴의 대표들이 체첸 그로즈니에서 바사예프와 면담하였고,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하타브는 '이슬람 평화유지군'에 대기령을 하달한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꺠고 러시아군은 오지 않았다. 러시아 연방 총리 세르게이 스테파신은 3시간에 걸친 카라마키 방문 후에 군사 개입을 안할 것을 결정하였다. '작은 와하비 공화국'은 예상 외로 평온했으며 주민들은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고 주변에 극단주의의 냄세가 나지 않았다. 스테파신은 이들을 상대로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하였다.  다게스탄 외무부 장관 마고메살리 구사에프는 카라마키, 차반마키 마을 대표들과 9월에 회담하였고, 현지의 자치권과 이슬람 율법 통치를 인정하였다. 다게스탄 현지 와하비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얻었고, 체첸은 개입할 기회를 잃었다.  1998년은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강경파에 의해 실질적 체첸 주권이 마스하도프의 손을 빠져나간 1999년, 다게스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구틴 마고메도프와 나디르샤 카치라에프를 비롯한 주요 다게스탄 와하비들은 체첸 강경파로부터 상당한 병력과 물자를 제공받았고, 하타브는 유사시를 위해 파키스탄과 사우디 아라비아 이슬람 신학자 들로부터 '다게스탄 성전'을 위한 파트와 (강령)을 얻어낸다. 또한 하타브의 훈련 캠프를 졸업한 다게스탄 인들이 점차 늘어났으며, '이슬람 평화유지군'의 병력과 무기, 탄약 역시 점차 비축되고 있었다.

 

 

 

 

 

 

바구틴 마고메도프. 다게스탄 와하비 핵심 인물

 


  1999년 7월 말, 다게스탄 현지 경찰과 러시아 연방 군은 다게스탄 와하비에 대해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부이나스크 지역 일대 검문소를 설치하고 일대 통행을 차단하였고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7월 24일, 다게스탄 와하비 세력은 체첸 그로즈니에 특사를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약속된 군사 원조를 제공할 것을 요청하였다. 드디어 강경파들이 원하던 때가 도래하였다.


 1주일 뒤인 1998년 8월 1일, 바사에프와 하타브는 다게스탄 남서부 츠마딘스크와 인접한 체첸 국경 지대에 휘하 병력을 집결시켰다. 총병력은 2천에 달했으며 그 중 절반이 하타브가 훈련소에서 교육시킨 '사관생도'들이었으며  터키인, 파키스탄인, 사우디인, 다게스탄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장갑차, 대전차포, 박격포, 대공포 등의 중화기도 준비하였다.

 

 

 

 

 

집결한 '이슬람 평화 유지군'

 

 

  다시 1주일 뒤인 1998년 8월 7일, '이슬람 평화 유지군'은 다게스탄 국경을 넘어 남서부 산악지대인 보틀리히와 츠마딘스키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체첸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다게스탄 성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게스탄 국경을 넘는 무자헤딘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Invasion_of_Dagestan_(1999)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2000/p30-cwb.htm

         http://globaljihad.net/view_page.asp?id=1351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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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09.10.02 그러게요 전쟁도 끝났으니 다음을 위해서라도 안부터 추수리고 군비를강화하고 증강하던가 해야지 이건뭐 나 힘있어 나도 권력쓸레 이건..하;;
  • 작성자더 블레이드 | 작성시간 09.10.01 드디어 처절한 전쟁의 시작이군요. 반지의 제왕을 능가하는 스케일과 스토리에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재미있게 보고 있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0.02 감사합니다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10.28 정말 반지의 제왕을 능가하는 스케일이네요... 어찌보면 체첸보다 다케스탄이 종교적으로 더 강경하게 보이는데... 러시아와 대립한 곳은 체첸이군요... 다케스탄의 부를 쥐고 있는 다르긴족과 아바르족은 이 전쟁을 싫어하겠어요... 작은 와하비 공화국은 체첸과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될 것인가? 체첸의 3인 바사예프. 하타브. 우두고프와 다케스탄의 2인 바쿠틴. 카치라예프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우두고프의 러시아에 대한 실망이 반마스하도프로 돌아섰군요... 안타깝습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10 또다시 전쟁이 터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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