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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37. 패배

작성자jager|작성시간09.10.06|조회수2,540 목록 댓글 16

 

 

 

 


    이맘 감자트 벡

 


  
    과거 제정 러시아에 대한 성전을 지도하던 2대 이맘의 이름이다. 샤말 비사예프와 하타브는 다게스탄 중부 노보로스키 침공의 작전 명으로 감자트 벡의 이름을 붙였다.  이는 1차 다게스탄 침공의 작전명인 초대 이맘 가지무하마드에 뒤이은 성전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체첸과 다게스탄이 이맘의 권위아래 공동의 성전을 벌였던 과거를 상기시키기 위한 취지도 있었다. 다게스탄을 러시아 연방에서 이탈시키고 체첸과 합병하여 '신정국가 시절의 영역'을 회복하기를 원하였다.

 


   1999년 9월 5일, 새벽 4시 반에 샤밀 바사예프와 하타브는 2천의 병력을 이끌고 두번째 침공을 시작하였다.  러시아 연방군이 개입하기 전에 다게스탄 현지 병력과 민병대를 밀어내고 주요 거점을 장악하기를 원했다. 또한 노보라스키 지역에 최대한 진입하여 카다르 지역의 다게스탄 반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병력을 반감시키고, 다게스탄 현지 반군들의 숨통을 트게하고 종국적으로는 해방구와 연결하여 다게스탄 영내에서 공동전선을 펼치기를 원했다.

 

 

 

 

 

 

 

다시 다게스탄을 침공한 체첸군

 

 


   체첸군의 주요 목표는 크게 3가지 였다. 우선 노보라스키 동쪽 지역의 칼리니나울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인근 지역보다 와하비 세력이 강해서 현지 병력의 지원과 보급을 기대할 수 있었다. 다음은 노보라스키의 심장부인 하사 유르트 장악이었다. 체첸과 다게스탄 와하비 세력은 자신들의 연합 이슬람 국가의 수도로 이 도시를 선정하였다. 5만의 체첸인이 거주하는 이 도시를 장악하면 다게스탄 중부 교통과 통신의 요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마지막은 노보라스키 중부 지역의 도로와 철도망이었다.  확고하게 중부 다게스탄을 장악하면 부이나스키의 다게스탄 반군과 상대하는 러시아군의 보급망이 차단되고, 이곳을 발판으로 더욱 동쪽의 카스피해 연안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다게스탄 노보라스키 전역 지도


    공세 첫날의 체첸군은 1차 침공 때처럼 기습의 이점을 충분히 살려서 국경지대 마을을 속속 점령하였다. 수시아, 가미야크, 투크차르, 아카하르 마을과 주변 도로를 장악하였다. 다음날인 9월 6일에는 계속 진격하여 차파에보와 두치 마을을 추가로 확보하였다. 그러나 중요 목표인 하사유르트 도시는 다게스탄 현지 민병대의 저항에 막혀 초기에 장악하는 데 실패하였고, 서쪽 5킬로 지점에서 교착되어 전선이 형성되었다. 1차 침공의 보톨리히 처럼 체첸군은 중요 거점 확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칼리니나울에도 도달하는 데 실패하였다.

 

 

 

 

 

 

노보라스키 전투 당시 하타브와 바사예프

 

 


    러시아군은 미처 부이나스키 반군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로 등 뒤의 적을 상대해야 했다. 러시아 군 참모총장 아나톨리 크바신은 우선 정보통제부터 하였다. 9월 7일 언론사와의 브리핑에서 다게스탄 군사작전의 정보 공개를 제한하며, 부대 규모, 배치, 특히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사전에 저지한 것이다. 동시에 체첸과 다게스탄의 국경지대의 취약점에 우선적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추가로 체첸 증원군이 합류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동원가능한 부이나스크 136 연방군 독립 여단과 7 공수여단, 205 내무군 여단을 노보라스키 지역에 급파하였다.

 

 

 

 

 

 

다게스탄 전역의 러시아 내무군

 

 


    체첸군은 1차 침공의 교훈으로 좀 더 강력한 무장을 비축하고 국경을 넘었지만, 그들이 현지인들에게 환대받지 못했다는 기억도 같이 갖고 왔다.  노보라스키의 체첸군은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시간을 버리지 않고 처음부터 무기와 식량 등을 약탈하였다. 차량, 가축, 심지어 농기계까지 끌고 갔다. 차파에보와 투차르 지역에서는 각기 수백톤의 곡식을 약탈해서 체첸 영내로 가져갔다. 사실상 점령군처럼 행세하면서 필요한 물자는 모두 요구했으며 노보라스키의 점령한 거점들에 러시아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체첸군 벙커 위의 샤밀 바사예프

 

 


   1999년 9월 8일, 러시아 연방군과 체첸군 사이에 본격적인 격전이 벌어진다. 첫번째 격전지는 에키튜브 산이었다. 가마야크 마을 주변의 고지인 에키튜브 산은 하사유르트와 체첸을 연결하는 중앙 도로를 내려다보는 거점이었다. 이 고지를 장악하기 위해 연방군과 체첸군은 서로 안간힘을 썼고,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다. 그러나 4시간의 격전 끝에 고지는 50명의 체첸군 시신과 함께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갔다.

 


    다음날인 9월 9일, 러시아군은 새벽 4시를 기해 체첸군의 방어 거점인 가미야크, 차파에보, 슈시아, 투차르 마을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하타브와 바사예프의 지휘 사령부가 있다고 추정되는 가미야크 마을 인근의 야만수 강가 주변 거점을 폭격하였다. 체첸군은 800명의 증원군까지 배치받으며 부족한 병력으로 러시아군의 공세에 버텨보려 했지만, 9월 10일 가마야크 마을이 러시아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30명의 체첸군은 마을을 빠져나가서 본대와 합류하였다.

 

 

 

 

 

 

 

체첸군이 사용한 러시아 유탄발사기. 아마 AGS-17로 추정된다.

 

 


    노보라스키의 체첸군이 점점 밀려나는 동안, 500명의 다게스탄 반군이 벌써 10일 가까이 러시아군과 교전하고 있었으며, 각기 수회에 걸친 러시아 내무군의 진입 시도를 저지하고 있었다. 카라마키 마을은 다게스탄 내무군과 러시아 22 특수 여단에 의한 6차례 진입을 저지하였다. 러시아 내무군 22 특수여단은 이 과정에서 모든 장교가 부상을 당했고, 1차 체첸전 전체에서 얻은 피해보다 카라마키 마을을 공격하며 얻은 피해가 더 컸다고 한다. 9월 9일에는 차바마키 마을 고지로 러시아 내무군 17 특수연대가 진입하였지만, 밤 사이 반군들이 야습을 가해서 다시 밀어냈다. 이들은 체첸군이 자신들을 구조해줄 것을 필사적으로 기다리며 버티고 있었다.

 

 

 

 

 

다게스탄의 샤밀 바사예프. 두번째 시도 역시 실패하였다.

 

 


   그러나 샤밀 바사예프로서는 더 버텨내기 힘들었다. 작전 시작하고 9일 뒤인 1999년 9월 13일, 바사에프는 노보라스키 지역 체첸군 후퇴 명령을 하달한다. 체첸군은 영내에서 일제히 후퇴하였고, 러시아군은 이틀에 걸쳐 노보라스코에, 차파에보, 투차르 마을을 속속 장악하였다. 9월 15일에는 그토록 완강하게 버티던 아하르와 슈시아 마을의 체첸군이 사라졌고, 다음날인 9월 16일에는 러시아 국방부 장관 이고르 세르게에프가 푸틴 총리에게 '다게스탄 중부의 테러리스트가 모두 축출'되었음을 보고할 수 있었다.  구조의 희망이 사라진 부이나스크의 반군들도 1999년 9월 15일에는 러시아군에게 항복하거나 체첸 영내로 탈출하고 전투가 종료되었다.

 

 

 

 

투항한 다게스탄 반군과 러시아 내무군

 

 


    이리하여 체첸 강경파에 의한 다게스탄 성전이 40여일 만에 종료되었다. 각각 2천에 달하는 병력으로 시작된 체첸군의 공세와 다게스탄 현지 반군의 농성은 러시아 연방군의 무력과 다게스탄 현지 주민의 반발로 인해 막을 내렸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군이 입은 피해는 공식 발표에 의하면 전사자 279명, 부상자 987명이었다. 하지만 내무군의 사상자까지 합치면 도합 2천에 달한다는 설도 있다. 체첸군이 입은 피해는 정확한 추산이 되지 않는다. 하타브의 발표에 의하면 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기화폭탄을 포함한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인해 실제로는 훨씬 사상자가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체첸군의 대공 미사일과 대전차 미사일로 인해 수대의 헬기와 20여대에 달하는 전차, 장갑차가 격파되었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3만 2천에 달하는 다게스탄 피난민이 발생하였다.

 

 

 

 

 

 

다게스탄 전쟁 전체 지도. 침공이란 무모한 시도로 체첸 강경파는 명분과 실리 모두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체첸군의 공세가 여기서 끝날 것이라고는 누구도 보장할 수가 없었다. 과거 성전을 이끌었던 이맘은 3명이었고, 특히 샤밀의 성전이 가장 치열하고 대규모였다.  다게스탄 북부 바바유르트 지역에 '이맘 샤밀 작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정보가 파다하게 퍼졌다. 체첸 각지에 수백에서 수천에 달하는 강경파의 군세가 집결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공군도 이들 거점에 대한 폭격을 이미 시작하였다. 베데노, 콤소몰스코에, 우르스 마탄, 서전 유르트, 구데르메스 지역 등이다.  체첸군의 3차 공세에 대한 소문과 러시아 공군의 폭격 속에서 상황은 상황은 통제할 수 없이 악화되었다.

 

 

 

 

하타브와 바사예프

 

-  러시아군은 다게스탄에서 승리했지만 두 사람이 체첸 영내로 후퇴하는 것을 두번이나 막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바사예프가 러시아군 수뇌부를 매수했다는 설과, 체첸 강경파를 남겨둬서 재침공의 빌미로 삼기 위한  러시아의 노림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그 어떤 일보다도 최악의 참사가 벌어진다. 4차례에 걸쳐 모스크바 각지의 아파트가 의문의 폭발로 수백명의 희생자를 낸다. 수도 없이 많은 희생자를 낸 이 참사는 러시아 전역의 여론을 반전시켜 2차 체첸전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_apartment_bombings

              http://en.wikipedia.org/wiki/Invasion_of_Dagestan_(1999)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2000/p30-cwb.htm

              http://globaljihad.net/view_page.asp?id=1351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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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1.06 의도와 동기가 아직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 침략이라 할 수 있겠죠
  •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09.11.06 강경파들이 러시아를 상대로 물좀먹이더니...와우...근성을넘어선 용기백배는 또다른 전장의 서막을 알리는건가요!?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1.06 다게스탄 전쟁과 모스크바 테러는 전쟁의 시작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죠
  • 답댓글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09.11.06 음 어느정도는 체첸의 도발과 러시아 내부의 도발에 반응한 그런 상황이 된거군요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10 드디어 2차 체첸전의 서막이 오르겠군요..체첸 강경파들이 너무 무리수를 두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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