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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39. 교두보

작성자jager|작성시간09.11.24|조회수2,520 목록 댓글 17

 

 

 


                               "시간을 달라. 30분, 단 30분 만이라도 시간을 달라. 그러면 이 모든 유혈을 피할 수 있다."

 

                                                                                  - 체첸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러시아 총리 푸틴에게

 

 

 

   --    러시아의 군사 전략가들은 1차 체첸전 패배의 원인으로 3가지를 지적하였다. 첫번째가 정보 심리전의 실패였다.

 

   정보 심리전의 실패는 과거 배트남전 당시 미국도 경험한 것으로, 개전 시점에도 결코 높지 않았던 러시아 국민의 전쟁 지지도를 만회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1차 체첸전 당시 러시아군은 언론 취재가 자신들의 전쟁 수행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이들을 통해 좌우되는 국민의 여론이 곧 군사 작전의 고삐를 쥐는 정치가들에게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전선의 언론 기자들에게 상당히 비협조적이었으며, 그들의 취재에 대해 러시아 군의 입장을 상세하게 설명하기를 귀찮아 하였다.

 

  반면에 체첸이 배출한 타고난 선동가인 '모브라디 우두고프'는 언론을 통한 정보 심리전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기자들이 전선에서 자유롭게 체첸군 병사와 지휘관들과 인터뷰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며, 민족 독립을 위한 체첸인의 대의를 명확하게 인식시켰다. 이들의 대의는 러시아 국내 여론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완벽했으며, 전선의 러시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 일조하였고, 결국 전쟁 수행의 낮은 국민 지지도를 무시할 수 없었던 정치가들의 개입으로 평화 협정 체결과 러시아군 철수로 종전을 맞게 하였다. 정보 심리전의 치명적인 실패였다.

 

  2차 체첸전을 시작하면서, 러시아군은 '테러리스트 섬멸'이라는 대의 명분을 충분히 확보하였다. 지난 3년 동안 체첸 국내에서 벌어진 납치극은 국제적으로도 이목을 끌었고, 특히 1999년 9월의 모스크바 아파트 테러 사건은 러시아 국내 여론을 급격하게 전쟁 찬성으로 바뀌게 만들었고, 거의 80퍼센트에 가까운 전쟁 지지도를 보였다. 1차 체첸전의 절반 이하와 비교하면 찬성 비율이 두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높은 국민 지지도는 자연스럽게 전쟁에 임하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효과도 가져왔다.  --

 

 

     혜성처럼 떠오른 러시아 정치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1999년 10월 1일, 러시아 지상군의 체첸 영내 진입을 선언하였다. 러시아군이 그토록 갈망하던 복수의 순간이 찾아왔으며, 두번째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이미 체첸군이 그리 만만치 않음을 체험한 러시아군은 지난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자세로 전쟁에 임했다.


    우선 병력수가 10만에 달했으며, 여기에 1650대의 기갑전력, 500문의 포대, 300대의 전투기를 배치하였다. 각각 1차 체첸전 당시의 러시아군의 2배에 달했다. 이에 반해 체첸군은 1만에서 2만의 병력에 14대의 기갑전력, 23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병력 수는 지난 전쟁과 큰 차이가 없지만 기갑전력과 중화기는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화력 차이가 러시아군이 수십배는 우위였다.

 

 

 

 

 

러시아군 포병대

 

    단순히 병력 수만 2배로 늘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전쟁 당시 갓 징집된 신병들을 투입했다가 시가전에서 처참한 피해를 입은 러시아군은 이번 전쟁에 보유한 최정예 병력들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였다. 국방군의 최정예 병력이라는 공수부대와 해군 육전대는 물론, 내무군의 최정예라는 알파, 비샤츠 등의 특수 타격대, 러시아 군 정보총국 (GRU) 산하의 '스페츠나츠'도 투입되었다. 이들은 공격부대의 첨병으로 체첸 영내를 파고들으면 뒤에 내무군과 국방군이 따라와서 전과를 확대하고 점령지역을 공고히 다졌다.

 

 

 

 

러시아군 장갑차와 국방군


    이 10만의 대군을 지휘할 총 사령관은 빅토르 카잔체프 상장이었다. 정식명칭은 북 코카서스 러시아 통합군 (ONG) 총사령관이었던 카잔체프 상장은 지난 전쟁 당시 총사령관인 아나톨리 크바신의 휘하 장군이었다. 패전의 순간을 직접 경험했던 카잔 체프는 군 내외에서 유능한 인물로 인정받았으며, 지난 치욕을 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빅토르 카잔체프 휘하의 북 코카서스 러시아 통합군. 지상군과 공군 전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전 직후 카잔체프 휘하에는 3개 군이 편성되었다. 북부군, 서부군, 동부군이었다.


     북부군 사령관은 블라디미르 불가코프 중장이었다. 1967년 로스토프 지역에서 출생한 불가코프는 1971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전차 중대를 지휘하였다. 1985년과 87년 사이에 아프간 전쟁에 전차 중대 지휘관, 연대 사령관, 참모장을 지냈던 불가코프는 1차 체첸전 당시 58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여 체첸인과의 전투 경험을 쌓았다. 1999년 시점에서는 30년 가까이 군무를 쌓았고 2차례의 전쟁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체첸인과 남부 산악지대에서 교전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

 

 

 

 

북부군 사령관 블라디미르 불가코프 중장

 


    동부군 사령관은 제나디 트로체프 중장이었다. 1947년 베를린 출생인 트로체프는 1969년에 카잔 고급 전차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갑 지휘관으로 경험을 쌓았다. 독일, 오데사 주둔군 지휘관을 역임하다가 지난 체첸전에 일군 사령관으로 참여하여 역시 체첸인과의 교전 경험을 쌓았다. 그는 베를린 출생이지만 체첸 그로즈니에 거주했으며, 두다예프의 독립선언 이후 추방된 러시아인 중의 한명이다. 그로즈니에 직접 거주해본 트로체프 중장은 축척이 제대로 된 지도도 없이 전투에 뛰어들었던 지난 전쟁의 러시아 지휘관들과는 격이 달랐고, 체첸인들 못지 않게 그들의 도시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동부군 사령관 제나디 트로체프 중장. 경험이 풍부했고 무엇보다도 그로즈니 거주한 적이 있다.


   서부군 사령관은 블라디미르 사마노프 소장이었다. 1957년, 중앙아시아 알타이 지역에서 출생한 사마노프는 공수부대로 군무를 시작하였다. 87년도에 Pskov 공수 사단의 대대 지휘관을 역임한 사마노프는 1993년-94년도에 중앙아시아쪽 울리아노브스카 주둔 104 공수 사단장이었다. 지난 전쟁에서 신년 공세 때 대패를 한 러시아군은 증원군을 곳곳에서 소집하였고, 사마노프의 104 공수 사단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로즈니 격전에 참가했던 사마노프는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으며, 대표적으로 서부전선의 체첸군 거점 도시 바무트 요새를 1996년 여름에 함락시켰다. 그러나 러시아 군부 내에서도 손꼽히는 강경파인 사마노프는 전투에 임하면서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휘하에 많은 러시아군 병사와 체첸 시민들이 엄청나게 희생되었다. 체첸인들은 그에게 '제 2의 예르몰로프'라는 별명을 붙이고 극도로 혐오하였다.

 

 

 

 

서부군 사령관 블라디미르 사마노프 소장. 대표적인 강경파였다.

 

    러시아군의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서부군과 동부군은 각각 체첸 서쪽과 동쪽 국경지대를 봉쇄한다. 여기에 막강한 공군력으로 체첸 영내 주요 거점을 폭격하여 체첸군의 역습을 차단하고,  체첸군의 방어 시설과 전투 장비를 파괴하고, 체첸군의 보급 체계를 붕괴시키고 고립시킨다. 이미 러시아 공군은 1999년 9월 23일부터 본격적으로 폭격을 시작하였고 12개의 체첸군 병영과 7개의 교량을 파괴했으며 20킬로에 달하는 도로를 파괴하거나 지뢰를 살포하였다. 지상군이 발을 디디기 전에 이미 러시아 공군은 1700소티의 폭격을 감행하여 체첸군의 전투 자산과 의지를 감소시키려고 시도하였다.

 

 

 

 

 

러시아군의 체첸 공세 전략. 서부군과 동부군의 봉쇄 뒤 북부군 진입. 테레크 강 북쪽 교두보 확보


   서쪽과 동쪽의 국경을 봉쇄한 뒤에 북부군이 진입하여 체첸 북부 평야 지대를 확보한다.  북부군의 진격선은 테레크 강을 경계로 하였다. 테레크 강 북쪽은 체첸 영역의 3분의 1에 달하는 비옥한 평야였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강경했던 남부에 비해 북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편이었고, 러시아 정착민도 많은 곳이었다. 러시아군은 이곳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것을 지상군의 1차 목표로 삼았다. 체첸 전을 위한 '교두보' 확보가 첫번째였다.

  
   1999년 10월 1일, 러시아군은 작전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서부군과 동부군은 각각 잉구세티야와 다게스탄과 연결되는 체첸군의 통로를 차단하였고, 국경 지대의 주요 거점을 폭격하였고, 특히 서부 국경 지대 마을인 바무트에 대해서는 철저한 폭격이 감행되었다. 북부군은 두 방향에서 진격하였고, 각각 나우르스카야와 셀코보스카야 마을을 목표로 삼았다. 동부군의 일부 병력도 다게스탄 키즐레이 방향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북부군의 진격에 조력하였다. 공세에 참가한 북부군과 일부 동부군의 병력은 5만으로, 1개 기게화 사단과, 1개 공수 사단과 3개 기계화 보병 여단, 포병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러시아군의 지상군 침공


   공세 3일 뒤인 10월 3일,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북동쪽 32킬로 지점까지 진입하였다. 평야지대에서 체첸군이 러시아군의 막강한 화력과 공군력을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하루 뒤인 10월 4일에는 그로즈니에서 20킬로 떨어진 체르베르나야 마을이 러시아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와 병행하여 러시아 국영 회사 가즈프롬은 체첸에 공급되던 천연가스와 석유 차단을 발표하여, 겨울철에 체첸 내의 상태를 최악으로 만들어 체첸의 주민 여론을 악화시키고 체첸군의 전투 의지를 경감시키도록 시도하였다.

 

   체체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공세 5일 째인 10월 5일에 '하자바트 (성전)'을 선포하고 전시 동원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이미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으로 만신창이가 됬던 체첸 국내의 사정상 주민들의 전쟁에 대한 지지도가 예전만 못했다. 또한 강경 이슬람 세력과의 다툼으로 신물이 난 온건파 체첸군 세력도 태도가 확실하지 않았다.  과거 1차 체첸전 당시에는 상당한 양의 전차, 장갑차와 중화기가 두다예프의 손에 있었지만, 지난 전쟁을 거치며 거의 소진해 버렸다. 모든 면에서 상황이 전보다 안좋았다.

 

 

 

 

 

테레크 강 주변의 체첸군

 


   그러나 체첸군은 자신들의 영역을 순순히 내주지는 않았다. 1999년 10월 8일에 체첸군은 테레크강 서북쪽의 이츠체르스카야로 반격을 가했다. 또한 그로즈니 북서쪽 25킬로 떨어진 나드테레츠나야에서 러시아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러시아군은 이미 10월 5일에 테레크 강가에 도달하였지만 체첸군의 몇몇 거점들을 소탕하기 위해 추가 진격을 멈춰야 했다.

 

 

 

 

 

 

 


   러시아군의 진격이 잠시 주춤한 1999년 10월 10일, 체첸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하였다. 단 30분의 시간 만이라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면 전쟁을 그만둘 수 있으며, 체첸 영내의 강경 이슬람 세력과 납치 세력을 자신이 소탕하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푸틴 총리는 다음날인 11일에 협상 불가함을 통보하였다. '테러리스트를 넘겨주기 전에는 대화란 없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보기에는 마스하도프 체첸 대통령은 강경파를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마스하도프가 직접 신변의 안전을 보장한 러시아 특사인 제나디 쉬프긴 소장이 1999년 3월 5일에 그로즈니 비행장 활주로 상의 비행기에서 체첸 강경파 메지도프에게 납치된 사레는 이런 의심을 강하게 뒷받침하였다. 러시아 특사의 신변 안전도 보장할 수 없는 체첸 대통령은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나디 쉬프긴 소장의 묘지. 그의 납치와 피살은 체첸 재침공의 한 원인이 되었다.


 공세가 시작된 지 열흘이 넘어서자, 러시아군은 테레크강 북쪽을 거의 장악하였다. 그러나 테레크 강을 경계로 체첸군은 몇몇 거점을 계속 보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난 4일에 함락된 체르베르나야 마을로 체첸군이 역습을 감행하였다. 동시에 남부 산악지대의 체첸군 강경파가 다게스탄 하사유르트 지역으로 재침공을 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공군 폭격으로 두번 모두 무산되었다. 지난 전쟁과는 달리 러시아 공군은 체첸군의 위치 이동이나 거점 지역 폭격에 있어 상당한 효율을 발휘하였다.

 

 

 

 

 체첸에 투입된 러시아 공군 하인드 헬기

 


  체첸군의 테레크 강 북쪽의 마지막 거점은 나우르스카야 였다. 강가에 붙어있는 나우르스카야 쪽에서 체첸군은 북부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마지막 방어전을 수행하였다. 여기에 그로즈니 북서쪽 50킬로 떨어진 고라고르스키 지역에서도 이미 닷새가 넘는 격전이 벌어졌다. 특히 고라고르스키의 체첸군은 강력한 방어전을 수행하여 러시아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심지어는 샤밀 바사에프가 직접 고라고르스키에 나타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고라고르스키의 체첸군


  그러나 고라고르스키와 나우르스카야 모두 10월 14일에는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써 테레크 강 북쪽의 모든 체첸군 거점이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갔다. 저항이 약한 테레크 강 북쪽을 장악한다는 1차 목표를 위해서만 러시아군은 2주의 시간을 썼다. 단 하루만에 테레크 강을 건너고 20일 만에 그로즈니 외곽에 도달했던 1차 체첸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이는 정치가들과 군 수뇌부가 마련한 시간표에 쫓기면서 작전한 지난 전쟁과 비교하여, 2차 체첸전에서는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천천히 확실하게 진격하는 것을 강조한 차이였다. 물론 몇몇 체첸군의 거점이 생각 외로 강력했던 점도 한가지 요소가 될 수 있다.

 

 

 

 

 

 

테레크 강 북쪽을 장악한 러시아 지상군

 

 
   러시아 군부와 정치가 중에는 러시아군이 테레크강 북쪽까지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친러시아 정부를 수립하고 남부 산악지대와 경계선을 설치하며, 주민들을 북쪽으로 유도하여 정착토록 하고 강경파를 고립시키면 자연스럽게 체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푸틴 총리는 이를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고 평했다. 테레크 강의 복잡한 지형이 경계하기에는 너무 어려우며, 강경파를 평화로운 주민과 분리하여 고립시킨다는 것도 무리라고 보았다. "테러리스트를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를 소탕하는 것이 목표"라고 푸틴은 대내외적으로 공언하였다.

 

 

 

 

 

 

1999년 9월의 푸틴 총리

 

 

   이미 3년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환골탈태한 러시아군은 푸틴의 공언을 뒷받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99년 10월 15일, 러시아군은 테레크 강을 건너 남진하였다. 러시아군 작전의 두번째 국면이 시작되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Second_Chechen_War

           http://en.wikipedia.org/wiki/Gennady_Shpigun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war/chechnya2-5.htm

           http://www.historyguy.com/chechen_war_two.html

           http://www.pbase.com/igor01/chechnya&page=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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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갈레아차 | 작성시간 09.11.25 무서운 푸차르 ㅡㅡ;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1.26 푸틴의 존재감이 확연하게 대중에게 인식되었죠
  • 작성자HKS[ROME] | 작성시간 09.11.26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리더는 역시 무섭군요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1.26 최고 통수권자가 강력한 의지를 가질 때 국가적인 저력이 십분 발휘되죠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11 푸틴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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