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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48. 보복

작성자jager|작성시간10.05.08|조회수3,012 목록 댓글 20

 

 

  

  "남은 총알을 세가면서 쏠 것. 교신 종료"

 

- 전멸한 러시아 오몬팀의 마지막 무전

 

 

  2000년 3월 29일 아침 8시 , 베데노에 주둔하던 러시아 오몬 1개 소대는 동쪽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러시아 북동쪽 페름 출신의 41명의 오몬 대원들은 발렌틴 시모노프 소령의 지휘 하에 1대의 장갑차와 탄약과 유탄발사기를 장착한 트럭 3대와 함께 움직였다. 목적지는 최근 체첸군의 활동이 보고된 다르고 마을로, '자키스티카'를 수행하여 체첸군을 색출하고 동조자를 연행할 계획이었다. 체첸에 주둔한 오몬팀으로서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임무였다.

 

 

 

 

 러시아군 행군로. 자니 베데노는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행군한 지 3시간 쯤 지난 11시경, 러시아군은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체첸군의 무전을 교신한 감청반이 뭔가 석연치 않은 체첸군의 무전을 감청한다. 인근에 있던 러시아군 검문소를 지날 때 검문소 장교는 동쪽 도로는 현재 체첸군이 장악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심지어 동행하던 체첸인 안내원은 더 이상 러시아군과 이동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몬부대는 예정대로 전진하였다, 일단 명령은 명령이며, 그들에게는 유탄발사기를 비롯한 충분한 화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


  행렬이 쟈니 베데노 마을 옆의 좁은 산길을 지날 때, 그들은 반복된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치른다. 행렬의 맨 앞에 있던 트럭이 파괴된다. 오몬 대원들이 놀라 행렬을 정지시키고 주변을 경계하였다. 시모노프 소령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인근에 있던 무너진 폐가가 눈에 띄었다. 그 집에 숨어 있는 체첸인이 트럭을 파괴했다고 생각한 시모노프 소령은 문을 박차고 들어선다. 안에 있는 체첸인을 발견한 소령은 무기를 들고 항복하라고 소리쳤고 이 때 안에 있던 체첸인이 응수하였다.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시다)"

 

 

 

 

 

 

체첸군

 
  순간 사방에서 일제히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면서 행렬 맨 뒤에 있던 트럭도 파괴되었다. 트럭 속에는 러시아 오몬팀의 각종 중화기와 유탄 발사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앞과 뒤가 차단된 오몬팀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였다. 하타브가 직접 지휘하는 200명의 체첸군이 쟈니 베데노 근처 숲 속에서 불과 몇미터 거리에서 러시아군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을 통제해야 될 시모노프 소령은 폐가 속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러시아군은 중화기를 상실한 채 손 안에 있던 소총 만으로 응사해야 했다. 하지만 숲 속에 은신한 체첸군은 보이지도 않았다. 파괴된 트럭과 트럭 사이에 숨어 있던 오몬 대원들은 한명 한명 저격수에 의해 사살당했다. 

 

  

 

 

 

전투를 지휘하는 하타브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 살아 남은 오몬 장교 한명이 간신히 베데노 기지로 무선을 날렸다.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베데노 주둔 부대 내무군 지휘관 알렉산더 스테파네트 소령은 페름 출신의 다른 오몬팀을 투입한다. 2대의 장갑차에 107명의 병력이었다. 그러나 전투지에서 500미터 떨어진 817고지에 들어섰을 때 선두에 있던 오몬대원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체첸군은 미리 구원대의 투입 방향을 예상하고 저격수를 배치하였다. 이어서 도로 양쪽에 포진한 수십명의 체첸군 분견대가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하타브 


   러시아군은 사지에서 죽어가는 오몬팀을 구하기 위해 3시간에 걸쳐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체첸군의 저지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그들도 매복에 걸려 희생될 판이었다. 구원대는  2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하였다. 매복에 걸린 오몬팀은 운명에 맡겨졌다. 항공지원도 소용없었다.  체첸군과 오몬군이 숲 속에서 불과 몇미터 사이를 두고 교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으로 오몬팀으로부터 발신된 무전은 다음과 같다. "남은 총알을 세가면서 쏠 것. 교신 종료"  시간은 오후 4시 45분이었다.

 

    이 전투에 대한 러시아군의 최초 발표는 1명 전사 4명 부상에 30명 실종이었지만, 곧 대부분의 실종자가 전사자로 바뀌었다. 구원대의 전사자까지 합치면 43명이었다. 매복에 걸린 오몬팀 중에 살아서 빠져나온 사람은 불과 5명이었다. 러시아군은 실종자들에 대한 수색을 위해 내무군 스페츠나츠인 알파팀까지 현장에 투입했지만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체첸군이 매설한 지뢰로 인해 알파팀 장교 3명이 추가로 전사했다.

 

   체첸군은 교전 후에 자신들이 러시아 오몬 9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공언한다. 그러면서 포로 교환 조건을 제시한다. "유리 부다노프 대령을 우리측에 넘겨라'

 

 

 

 

유리 부다노프 대령


 

 

   유리 부다노프는 러시아 국방군 전차부대 대령이었다. 매복 작전이 벌어지기 3일전인 2000년 3월 26일 탕기 추라는 마을에 사는 18살의 엘자 쿤가에바라는 체첸 여자애를 납치해서 부하들이 망을 보는 가운데 납치한 뒤에 자기 막사로 끌고 갔다. 2시간이 지난 뒤에 쿤가에바는 잔인하게 난자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국제 인권단체에서도 비중있게 다룰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러시아는 유리 부다노프 대령을 살인 혐의로 체포하고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체첸군은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를 원하였다. 여기에는 러시아 국방군 대령 1명의 목숨과 러시아 내무군 오몬 팀 9명의 목숨을 교환하도록 하여 양측의 갈등을 심화시키려는 노림수도 있었다. 비록 지난 전쟁 이래로 많은 개선을 시도하였지만, 체첸전장에서 러시아 내무군과 국방군의 사이는 여전히 심하게 안좋았다. 내무군은 포격과 항공전력을 보유한 국방군이 자신들을 적절히 지원해주지 않고 정보도 제대로 공유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국방군은 내무군의 잔혹한 '자키스티카'가 체첸군에 대한 동조 세력을 증가시키고 광범위한 보복 작전을 불러일으킨다고 비난하였다. 체첸군의 요구는 이 양측의 분열을 보다 넓히기 위한 의도도 담겨 있었다.

 

 

 

 

 

 

  체첸군의 요구에 대한 러시아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9명의 포로들이 살아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러시아군으로서는 체첸측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고, 그들의 포로가 된 9명의 오몬대원이 이미 죽어있거나, 혹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2000년 4월 4일, 체첸군은 9명의 오몬대원을 모두 처형한다.

 

 

 

 

전사한 오몬 대원들의 장례식


  3주 정도 지난 2000년 4월 23일, 그로즈니 동남쪽 25킬로 떨어진 서전 유르트 마을에서 체첸군은 다시 한번 기회를 잡는다. 이 마을에는 러시아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모든 군부대가 그렇듯이 병력 교대와 물자 보급이 정기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로즈니 동쪽 한칼라 공항의 러시아 기지에서 보급 물자가 딸린 교대 병력을 서전 유르트로 파견하였다. 106 툴라 공수 사단의 51 공정 연대였다. 공정대는 22대의 차량에 각종 보급 물자를 실고 목적지인 서전 유르트로 떠났다.

 

 

 

 

러시아군의 써전 유르트 이동로 

 

 

  러시아 공수부대의 행렬은 곧 체첸군의 정찰대에 의해 포착된다. 하타브의 오른팔, 아부 알 왈리드가 이끄는 체첸군은 공수부대를 다음 공격 목표로 정했다, 4일 전부터 써전 유르트 인근에 배치된 예맨 출신의 아부 야파르 부대도 합류한다. 체첸군의 매복 병력은 75명이었다. 체첸 중부군 소속 특수 분견대와 하타브의 '이슬람 평화 유지군' 소속 병사들로 50명의 체첸인 외에 아랍인, 다게스탄인, 잉구쉬인, 카라치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부 야파르와 아부 알 왈리드. 하타브 휘하의 와하비들이었다.

 

  체첸군은 공정 연대의 후방 부대를 노렸다. 연대의 보급 물자가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군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후방부대에도 나름의 경계조를 운영하고 있었다. 4대의 BMD 장갑차와 1대의 ZU-23-2 대공포를 장비하였고 유사시에는 직접 무전을 할 수 있는 전용 포대와 2대의 Mi-24 전투기와 스페츠나츠 20명이 탑승한 Mi-8 헬기를 포함한 공군 전술팀이 이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상당한 수준의 지상전 화력에 든든한 공군 화력 지원까지 보장되어 있었으며 러시아 공정대 자체가 러시아군 최고의 엘리트 부대였다. 마음 든든한 상태였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체첸군 강경파의 전술은 이들의 에상을  뛰어넘었다. 아부 알 왈리드는 러시아군 정찰대의 감시를 우회해서 원하는 지점에 체첸군을 매복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들이 서전 유르트 남쪽 3킬로 지점의 숲 속에 배치된 시간은 저녁 5시 반이었다. 정찰대가 지나가고 20여대의 러시아군 보급 물자 차량이 나타나자 아부 알 왈리드는 공격 명령을 하달한다.

 

 

 

 

트럭을 장악한 체첸군

 

   러시아군 공수부대는 사방에서 터지는 지뢰 속에서 기습을 당한다. 체첸군은 서전 유르트 숲 속의 좁은 길에 미리 매설해둔 지뢰가 무려 15개였다. 적재 적소에 묻어둔 지뢰가 하나씩 터지는 속에 러시아군은 양쪽 숲속에 체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곳곳에서 저격을 당해 쓰러지는 상황에서 러시아 공군 헬기에 지원을 요청했고, 전투 현장에 하인드 헬기가 나타났지만, 러시아 공수부대에 불과 15-20미터 떨어져 있었고 짙게 드리워진 산그늘 속에 은신한 체첸군을 발견할 수 없었다. 체첸군은 자신들의 매복 지점이 늦은 오후 시간에는 산그림자가 져서 항공 병력이 볼 수 없다는 사실까지 미리 계산하였다.

 

 

 

 

파괴된 장갑차와 체첸군

 

  체첸군은 기습을 성공시킨 뒤 파괴된 보급트럭 속의 전리품을 챙기고 사라졌다. 불과 40분 만의 일이었다. 러시아군의 공군 헬기와 증원군이 도착해서 전투 현장을 습격하였지만 이미 체첸군은 빠져나간 뒤였다. 인근 마을까지 추적해서 체첸군을 섬멸하려 했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러시아군이 입은 피해는 자료마다 수치가 다르나, 최소 15명의 러시아군이 전사하고 6대의 차량이 파괴되었다. 체첸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러시아군은 약 17명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트럭 위의 체첸군. 한명씩 확인 사살 하였다.


  이 전투는 러시아군 수뇌부에 상당한 충격을 줬으며, 향후 후방부대에 의한 보급물자 운송을 대폭 줄이고 수송 헬기를 이용한 보급이 대폭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수단이었다. 2002년 8월 19일, 한칼라 공군 기지 근처에서 Mi-26 헬기가 체첸군의 이글라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당했다. 헬기 안에 탑승한 127명의 러시아군은 모두 전사했다. 세계 최대 헬기 참사이자 2차 체첸전 이래로 단일 군사 작전으로 입은 최대 손실이었다.

 

 

 

 

 

체첸군에게 격추된 Mi-26헬기.

미국 치누크 헬기의 3배 적재 중량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 헬기였다.

 


   체첸군은 사령관들이 차레로 전사하고 온건파들이 하나둘씩 러시아에 포섭되는 가운데서도 러시아에 피를 강요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이 각 부대의 지휘관의 개별적인 판단 하에 자체적으로 교전하고 있었다. 이미 전쟁 전에 체첸 3대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권위가 도전받는 가운데 이를 대체할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인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졌던 지휘관이 바로 함자트 겔라예프였다.

 

 

 

 

 

 함자트 겔라예프

  


출처 : http://www.pbase.com/igor01/chechnya&page=all
         http://en.wikipedia.org/wiki/2002_Khankala_Mi-26_crash
         http://en.wikipedia.org/wiki/2000_Zhani-Vedeno_amb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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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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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5.29 그저 내공이 느껴지는 놈들입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0.05.15 헐..역시 체첸인들은 대단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5.29 그렇지요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10.05.29 근데 잉구세티아도 체첸과 한 배를 타려는건가요? 주로 보신주의로 일관하던 민족인데...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6.05 잉구세티야 출신 몇명이 가담했다고 해서 잉구세티야 측이 움직인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또 체첸과 손을 잡지 않았다고 해서 꼭 보신주의라고 보기도 힘들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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