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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오스만 제국군의 규모

작성자데미르 카라한|작성시간12.02.19|조회수1,037 목록 댓글 5


카를 5세 당시 합스부르크(오스만을 실제 상대하는건.. 동생 페르디난트 1세지만;;)

1619년 폴란드 영역

사파비조

초반 경우

비잔틴이 사력을 다해 서방과 아이든 베이릭같은 투르크 공국과 연대.

베네치아 경우. 카라만,사파비와 연대 시도..

메흐메트 파티히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경우.. 동쪽에는 카라만,흑양-백양조 서에는 베네치아가 있으며. 이미 사망판정을 받은 콘스탄티노플에 10만 (실제로는 아무리 많아도 5~8만이 아닐까?싶습니다만.)을 하는건 선전효과가 있을지는 모르나 자원낭비죠.


오스만의 전성기시절과 주요 적대국가..


1.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카를 5세 당시에는 신대륙원주민을 착취한에 오는 금은보화로 인해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지만.(이후 나눠지고.. 네덜란드,프랑스,황제으로서의 가오가 달린 독일내 문제(가 커져 30년전쟁)..등으로 인해 오스만과 대결에서 가급적 출혈을 덜 내려고 했었고.. 합스부르크령 헝가리 영토는.. 말이 합스부르크 땅이지..휴전선처럼 방파제 역활로 쓰지요...


ps. 오스만이 30년 전쟁의 호기가 있었지만 개입을 못한건.. 셀림 2세 사후.. 술탄의 막장화,, 쾨셈 태후의 득세..항상 이라크를 노리는 사파비 ㄳ


2. 폴란드

농민의 고혈을 빨아서 만든 간지잘잘 후사르로 러시아 까부수고 육일승천한 기세였으나.. 그 간지나는 후사르 귀족님들이 이권챙기고 코사크 반란...(과거 몰다비아, 흑해 연안을 지배한 경력으로 첨예한 대립.)


ps. 트란실바니아 대공 베틀렌 가보르가.. 합스부르크 치러 갔다가 폴란드에게 본진털려서. 오스만에게 구원을 청했고. 오스만 2세가 이에 응하여 배후세력인 사파비에 영토 양도하고 대군을 꾸렸다고 하나.. 10만대군 편성은.. (이중에 전투인원도 가려야 한다면. 실상을 적지 않겠습니까?)



3. 사파비조

셀림 1세가 찰다란 전투로 절망적인 패배로 인해 나락으로 빠질뻔 했지만. 이내 재기하여 오스만을 흔드는 숙적입니다. 시아파계의 투르크부족 '키질바시'가 근간인 만큼 군사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ps. 유럽깡패 오스만도 사파비만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호적수입니다. 물론 직접대결을 필요시에는 했지만. 우즈벡에 사신을 보내 사파비 등짝에 비수 꽂을려고도 했죠.


+ 러시아.

얼지 않는 바다찾는 우리 로스케 형님들때문에 골치 아프던 오스만(북방전쟁시 스웨덴이 오스만과 손잡을려고도 했었죠..)은

흑해를 지킬려고 무난히도 애를 썻고.. 러시아 상대국가와 손을 잡을려고도 했습니다.


복잡한 국제정세로 인해.. 오스만이 영역이 넓다 하나.. 비잔틴처럼.. 서방 게르만 오랑캐(라고 무시해서 ㅈㅅ 근데 사실이잖;;)

가공할 위협을 굳이 말하자면,, 훈-아바르 같은 북방 유목민과, 사산조 페르시아, 이슬람 (아랍 리즈시절)입니다만..


오스만 경우.. 상대국가 하나 하나 무시 못할만큼 튼튼한 체계를 갖춰나가는 국가들이란걸 감안한다면..10~30만던 대병력을 한 전선에 투자하는건 무리수가 아닐까 봅니다. 가장 실패적인 사례인 빈 2차 포위전가 증명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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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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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Draka | 작성시간 12.02.20 생각하면 이때도 상당한 열강의 각축이네요. 합스부르크-부르봉-폴란드-러시아-오스만-사파비에 우즈벡 잉글랜드 스웨덴 베네치아 끼어서 합종연횡이니..
  • 작성자나스르공작☆ | 작성시간 12.02.20 오스만도 바보가 아닌지라, 저 국가들을 모두 동시에 상대한건 몇번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전선에 투입하는 병력은 곧 오스만의 통일된 전선의 병력이라고 봐야죠. 게다가 슐레이만 대제부터 그 이후까지 오스만의 경우는 사파비 공격 > 휴전 > 합스부르크 공격> 휴전 > 사파비 공격 이런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나스르공작☆ | 작성시간 12.02.20 게다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마저도 30년 전쟁때는 약 10만의 군사를, 스웨덴은 15만의 군사정도를 이끌었습니다. 오스만이라고 해서 이정도의 병력을 투입못시킬거라고는 볼 수 없겠는데요? 또, 레판토 해전에서마저도 신성동맹과 오스만 양측다 각각 5만이 넘는 군대를 투입했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나스르공작☆ | 작성시간 12.02.20 군대의 질에대해서 언급하셨는데, 슐레이만 대제 시기의 유럽과 오스만 군대의 질에서는 그리 차이가 나지않습니다. 오히려 질의 차이는 헝가리 13년 전쟁 이후부터 조금씩 차이가 났을뿐입니다. 그리고 그 질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제 1차 빈포위에서 약 150년 후에 발생한 제 2차 빈포위(1683)였구요
  • 답댓글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2.20 나스르//영문-터키 위키 찾아보니. 17C부터는 확연하게 10만 뽑아낸 전투가 많네요.. 적어도 16C까지는 10만은 아니더라도 5~8만가량의 대군을 뽑을 정도는 되겠네요 -_-; 제 불찰입니다. 시기적으로까지 좀 계산을 했어야하는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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