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근대사/현대사]저우언라이의 동정심에 관한 일화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4.04|조회수1,123 목록 댓글 11




1. 중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에 대한 저우언라이의 동정심

만주국 괴뢰 노릇을 하던 선통제지만
수감 생활 하다 풀려난 후 저우언라이와 회담,

황제 노릇을 했지만 이제는 일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어려움에 놓인 푸이를 위해서
중국과학원이 운영하는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 자리를 추천해 준 저우언라이



2년 뒤에 저우언라이는 푸이를 한족 출신 간호사 리수셴과 결혼까지 시켜줌


다민족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은 만주족과 한족등 서로 다른 민족들을 화합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푸이는 만주족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으로 선출.

그렇게 된 계기는 저우언라이 때문



1966년 문화대혁명 기간중 푸이는 암에 걸리고 말지만
모든 병원에서는 무려 "청나라 황제" 였던 그가 병원에 있으면 홍위병들에게 험한 꼴을 볼 까봐 진료를 거부
저우언라이는 이에 푸이를 베이징 근처의 병원에 보내줌

그런데 진짜로 홍위병들이 몰려와서 의사들이 진료를 못하자
격노한 저우언라이는 직접(!) 원장에게 전화를 해서 치료를 지시
다만 푸이는 이미 상태가 말기라 결국 사망





2. 푸이의 동생 푸제와 그의 부인 사가 히로에 대한 동정심

푸제는 일본인인 사가 히로와 결혼. 대충 관계는 영친왕와 이방자 여사 같은 느낌.


만주국이 괴멸되고 소련의 8월의 폭풍 작전으로 푸이와 푸제는 소련군에 사로잡히고,
사가 히로는 국민당군에 사로잡혔다가 구 일본군 대위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 성공, 일본으로 귀환


사가 히로는 일본에서 재혼을 안한채 근근하게 살면서, 푸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당시 중국과 일본은 미수교국이라 갈수가 없음


그런데 사가 히로의 딸이 총리인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설명하자


감명을 받은 저우언라이는 사가 히로를 특별 초청,
푸제와 사가 히로는 무려 16년만에 다시 만나게 됨


저우언라이는 옛 순친왕부의 저택에서 둘이 조용히 살 수 있게 배려해주고,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사람을 보내서 보호해줌



  


3. 한 소녀에 대한 동정심


1946년 공산당 중앙위원들이 비행기 타고 옌안에서 충칭으로 갈때 갑작스런 비상상황 발생
기장이 장내 방송으로 "날개가 결빙이 생겨 위험할지도 모른다. 모두 낙하산을 매라." 고 지시

 
모두 낙하산을 찾아 매지만, 마침 물건이 부족했는지 한 소녀 자리에 자기 자리에 낙하산이 없어서 울음을 터뜨리자

자기 낙하산을 벗어서 소녀에게 줌.
비행기는 사고가 나지 않고 무사히 착륙





4. 푸레이에 대한 동정심


중국의 유명 문인 푸레이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얻어맞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전에 푸레이의 아들이 서방으로 여행갔다가 망명을 해버림.

당시는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어서 모든 왕래는 그 즉시 중지됨.
푸레이는 다른건 이해하겠으니 제발 편지만이라도 서로 보낼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지만
공산당 측에서는 모두 거절


그런데 저우언라이가 편지 왕래를 허가.

"어떤 이념으로도 부자간의 정은 끊을 수 없다."




5. 문화대혁명 기간의 모습

"감히" 마오가 똥을 싸는것을 막을 수는 없을지만 일단 최대한 구석에다 싸게 노력은 해 봄.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석 주덕해 등이 홍위병에게 털리려고 하자 후베이 등에서 은거 생활하게 도와줌

문혁 중에 정신나간 인간들이 포탈라궁을 손상시키려고 하자 이를 방지.
또 자금성 철거라는 천오백년쯤은 두고두고 욕먹을 일을 하려고 하자 적극 저지.

1979년 자금성이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 등록되자 유네스코는 이례적으로 관련 코멘트를 남김

"중국의 전 수상 저우언라이에게 감사한다." 




6. 한국 역사에 대한 인식

중국 사회 과학원에서,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경고를 보내고 발해사 등이 조선의 역사임을 확인함

“징보(鏡泊) 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
“발해는 조선민족의 한 지파였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거짓말이다."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조선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  중국 국수주의자 측의 역사 침공 행위에 대하여 사과

심지어
(이 부분은 출처가 오마이뉴스- 거기서도 재중동포 학자 최 아무개씨 이러는지라 그다지 신빙성은 없을듯 하지만)
1962년 중조변계조약에서
북한에 너무 양보를 많이 했다고 최근의 젊은 학자들에게는 매국노 드립을 듣는다고 함.





실각이라는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남은 재산은 70만원.

 

텐진 난카이대학 남문에 저우언라이 동상이 있고 근처에 기념관도 있는데,

평일이든 주말이든 항상 사람은 많고

 

 

계속 보다 보면 아주 가끔씩 아예 동상에 절하는 사람들도 있음.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바로 저우언라이다. 저우언라이는 우리가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좋은 사람이었다. 중국 공산당원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중국의 미래는 분명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 마사 겔흔(미국의 작가 헤밍웨이의 부인이자 전쟁 전문기자)

 

 

"사리사욕이 전혀 없고 고상하고 순수하며 도덕적인 사람이고, 또 인민해방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
 
- 마오쩌둥(전 중국 주석)


 

"철학에 능통하고 역사를 통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남다른 지락과 재치있는 언변술을 가지고 있고, 풍류를 아는 걸출한 위인"
 
- 키신저(전 미국 국무장과)



"몸은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마음은 석산과도 같은 사람"
 
- 다나카 가쿠에이(전 일본 총리)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
 
- 중국 텐안먼(天津)광장에 세워진 저우언라이의 추도시비에 새겨진 글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이동준 | 작성시간 12.04.05 그 문혁때 날뛰던 홍위병들... 지금은 엉망이죠. 공부할필요없다 해서 정말 안하고 나중에는 그들을 써먹던 사람들이 홍위병 위험하다 책임 다 뒤집어씌워서 하방시켜서 시골로 보냈으니...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12.04.05 주은래는 과연 군계일학이었군요...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2.04.05 중국 정치사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장량이 유방을 이용한거처럼 주은래가 농민층과 홍군의 지지를 받는 모택동을 이용한거 같더군요. 평소엔 드러나지 않게 견제하다가 모택동이 폭주하거나 똥싸지를땐 적절히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서서히 모택동을 망가뜨리는 전략을 썼던듯. 죽쒀서 개준꼴이된 장량보다는 자신의 정치계열인 등소평이 정권을 잡게 해준점에서 오히려 장량보다 한수위의 정치가라고 봐도 될지도...
  • 답댓글 작성자[★]kweassa | 작성시간 12.04.06 아니 그건 좀 오바인 듯.

    다만, 권력에 도취되어 다른 혁명영웅이 서서히 망가져가는 시절에도, 끝끝내 망가지지 않고 정줄잡고 있었던 사람 정도?
  • 작성자가이우스율리우스카이사르 | 작성시간 12.04.05 홍위병 병맛 쩌네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