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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중국 역사상의 뛰어난 명 지휘관 중에 몇명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4.20|조회수1,468 목록 댓글 9




한신(韓信)
? ~ BC 196 ─ 한(漢)

고대의 무수한 기록에서 조선왕조실록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서 뛰어난 장수를 일컫을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 표현 중에 하나가 비록 한신(韓信)과 백기(白起) 로 장수를 삼은들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저 표현만 10번 가까이 나오는데, 한신은 그만큼 군사를 부리는 명장의 대명사 격으로 일컫어졌습니다. 유방의 이상향을 현실에 그려내어서, 한제국이라는 역사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긴 나라가 건국되게 한 최고의 공신 중에 한명으로 일컫어 집니다.


이런 한신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찌질하기 그지없었는데, 동네 아줌마에게 밥을 빌어 먹다 무시를 당하는가 하면, 시골 양아치들에게 겁박을 당해 가랑이 사이를 질질 지나가는등, 이 사람이 과연 영웅적인 업적을 이뤄낸 그 사람이 맞는가……할 정도입니다. 초나라 군대에서도 무시만 당했고, 심지어 한군에 들어가서 처음 모습을 보인 시기가 행패를 부리다가 처형 당할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찌질하던 한신이, 이제 장군의 지위를 얻게 되니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그 자리에 적응하는 모습이 실로 재미있는 일입니다. 한신은 군대를 조련시킨 뒤에 한군을 이끌고 나와 삼진을 깨트리고 포위망을 풀었으며, 은왕 사마왕과 하남왕 신양을 연달아 격파하며 기세를 올리고 서위왕 위표까지 쳐부수는데 성공합니다.


그 후의 행적은 사실 좀 불분명한데 수수전투에서는 항우에게 한군 전체가 당할때 마찬가지로 털린것으로 보이지만, 유방이 곧 멘탈을 회복한 뒤에는 장량의 계책에 따라 한신을 북방으로 보내게 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제나라와 조나라를 멸망 시키고, 이로 인해 유방은 항우보다 확실하게 우위를 가져갈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온 초나라의 장수 용저를 전사시키기도 합니다. 그 후 광무산 전투에서 항우의 최정예 군단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주기까지 했지요.


 


한신은 여덞 개의 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아홉개의 왕관을 부셔놓았습니다. 전중국 절반을 휩쓰는데 걸린 시간은 4년 남짓에 지나지 않았죠.  


그러나 그 후에 한신의 말로는 처참했는데, 유방에게 견제를 받았으며 본인 스스로도 모반을 꾸미었으나 적극적으로 나서는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후에게 잡혀, 천하를 호령했으나 한 명의 여자를 당하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때 여후를 도운 사람이 소하로, 중국 말 중에는 성역소하 패역소하(成亦蕭何敗亦蕭何), 즉 성공도 소하의 덕이요, 실패도 소하의 덕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에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 사마천, 회음후 열전




악의(樂毅)
?~? ─ 연(燕)

전국시대 위나라의 뛰어난 군주 중에 한명인 위문후(재위 BC 445∼BC 396)는 수하에 뛰어난 장수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한 명은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였고 다른 한명은 악양이었습니다. 오기는 인격적인 면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나 능력은 대단하였고, 악양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악양이 일찍이 중산국이라는 소국을 공격할적에, 중산국은 그 나라에서 일하는 악양의 아들을 볼모로 협박하였으나 악양은 전혀 듣질 않았고, 분개한 중산국에서 악양의 아들을 죽여 고깃국물로 만들어 보내자 그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성을 함락한 장수였습니다.
 
 
중산국은 그 후에 나라를 회복하는데 성공했으나 중국에서 기병 편제를 확립한 조나라 무령왕때 다시 멸망당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병법을 좋아하던 악의는 조나라에서 등용되었으나 때마침 조나라는 내분이 일어나며 무령완은 굶어죽고 큰 난리가 발생, 악의는 위나라로 일단 몸을 피하였습니다.
 
 
이때 전국 칠웅 중에 연나라는 재상 자지가 전횡을 휘둘러 문제를 일으켰고, 그 일이 끝난 뒤엔 제나라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뒤였습니다. 당시 제나라는 명재상 안영 이후에 막강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어서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연나라의 왕 소왕은 이에 분개하였으나 당시의 연나라는 대륙 구석으로 치우쳐진 약소국이라 함부로 제나라를 공격하긴 힘들었습니다. 힘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한 곽외라는 인물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인재를 모으며 나라의 힘을 키우는데 집중했습니다.
 
악의가 연나라에 등용된것은 이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악의는 그 직후부터 최고의 빈객으로 대우받았으며, 아경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올라갈수 있었습니다.
 


악의와 연소왕, 곽외 등이 한데 모였을 무렵 제나라는 그 강력한 힘을 사방으로 뽐내며 욱일승천 하고 있었습니다. bc 286년 송나라를 멸망시킨 데 이어 남쪽으로 초나라를 격파했고, 삼진이라 불리우는 나라들을 물리친 후에 진나라와도 싸움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마구잡이식 전쟁은 여러 나라의 공분을 얻을 수밖에 없었고, 기회라고 판단한 소왕은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지만 악의는 반대하였습니다.

"제나라의 토지는 광대하고 인구는 많으니, 굳이 싸움을 벌이시겠다면 연나라 단독으로 싸우는 것보다는 조, 초, 위나라와 힘을 합치는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럼 공이 그 역할을 해주시오."

악의는 직접 조나라의 군주 혜문왕을 설득했고, 다른 사신들도 여러 나라의 중신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모두가 제나라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해서 조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 연나라의 다섯 개국의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이 군대의 상장군이 된 악의는 진군을 개시합니다.

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는데 순식간에 제나라의 수도 임치는 함락당하였고 몇년 사이에 제나라의 전국토가 무너지며 70개의 성이 모조리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한때 진나라와 자웅을 겨룰만 했던 대국은 눈깜짝할 사이에 오직 즉묵성과 거성 2개의 성밖에 남지를 못했습니다.


악의는 이 두성을 포위하고 함락을 시키려고 하였는데, 즉묵 성에서는 전단이라는 유능한 지략가가 백성들에 의해 장군으로 추대되어 공략이 쉽지가 못했습니다. 마침 악의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던 연소왕은 죽고, 그 뒤를 이어 연혜왕이 왕이 되었는데 이 왕은 악의와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고, 그 사실을 깨달은 전단은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악의가 70여개 성을 함락시키기고도 저렇게 전쟁을 끄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함이다!"

혜왕은 두려워해 악의를 소환했고, 악의는 자신이 신뢰를 받지 못하는데 돌아가봐야 자신만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조나라로 망명했습니다. 연혜왕은 악의 대신에 기겁이라는 장수를 파견하였는데, 전단은 대단한 지략을 과시하여 기겁을 순식간에 패배시키고 70여개 성을 단번에 되찾게 되지만, 한번 잃어버렸던 국력과 위신은 다시 돌아오질 못하였다고 합니다.


연혜왕은 이때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아서 후회했는데, 걱정이 되는것은 악의가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조나라의 장군이 되어 연나라로 쳐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연혜왕은 악의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내었는데, 악의는 이에 훗날에 유명해지게 되는 답장을 보냅니다.

"군자는 교제를 끊어도 친구의 악담을 하지 않고, 충신은 나라를 떠나도 임금의 탓을 하지 않습니다. 비록 신이 재주는 없지만 오래돗안 군자의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다만 왕을 모시는 자들 중에 멀리 내쳐진 신의 행동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까 두려워 글로써 아뢰오니, 왕께서는 제 뜻을 부디 헤아려주시옵소서."

이 글을 보고 악의가 절대로 연나라를 공격할일이 없을것이라는것을 깨달은 연혜왕은 악의의 아들 악간을 높이 대접했고, 악의는 조나라와 연나라 두개의 나라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후에 편안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옛날 제나라의 괴통(蒯通과 주보언(主父偃)은 악의가 연왕에게 쓴 서한을 읽을 때마다 그 책을 덮고 울었다고 했다. ─ 사마천, 악의 열전



서달(徐達) 
1332 ~ 1385 ─ 명(明)


서달은 주원장의 이상을 현실로 여과없이 그려낸 인물로, 명 건국에 엄청난 공을 세웠던 명장입니다. 본래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던 천상 농민이었지만 그 체격이 장대하고 뜻이 작지가 않았는데, 힘과 용력이 절정에 달한 22살때에 제 발로 홍건적 곽자흥의 수하에 있던 주원장을 찾아가 그와 의기 투합을 하고 형과 동생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곽자흥의 원수였던 손덕애에게 주원장이 사로잡히자 직접 나서서 그를 구해내는 용감한 모습을 보였고 전쟁터에서 수차례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원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주원장이 남경에 입성할 수 있게 했으며, 특히 주원장의 숙적인 장사성을 완전히 몰락시켜버렸습니다. 장사성이 서달이 지키는 진강으로 쳐들어올때는, 이를 다 수비해냄은 물론 오히려 반격하고, 기세를 타고 공격해서 상주까지 함락시키고, 장사성이 계속 반격을 했지만 다 물리쳐버렸습니다. 최후에 장사성이 멸망할때도 상우춘과 대군을 이끌고 공격,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았습니다.


그 후 서달은 상우춘과 함께 25만의 대군을 인계받고, 드디어 북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서달은 원군을 격파하고 대도를 함락, 카라코룸까지 진격하는 기염을 발휘합니다. 중국 역사상 강남 세력이 이처럼 완벽하게 북벌을 이루어낸 적이 없었는데, 그 거리는 무려 2000KM나 되는 그야말로 장대한 대서사시 였습니다.






서달은 단순히 전쟁터에서 뛰어나고 용감한 지휘관의 모습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살피고 더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대장군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주원장은 백성을 죽이지 말고 민심을 잃지 말것을 항상 강조했는데 새왕조를 열면서 가장 중요한것은 역시 민심이었습니다. 서달은 병사들을 통솔해서 절대로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고, 사람들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북경에 들어올때는 너무나 조용하게 들어와서 아무런 일조차 벌어지지 않았죠.



평생을 사막의 변경에서 지내면서, 그 사실에 대한 불만도 없이 묵묵하게 그것을 수행하며, 겨울이 오면 잠시 고향에 들렸다가 봄이 되기가 무섭게 출정하기를 수십년동안 반복했습니다. 아랫사람들에겐 위엄이 있으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보듬아주어서 병사들은 서달의 은혜에 목숨을 내걸고 싸웠고,윗사람(주원장밖에 더 없죠) 앞에서는, 젊은 시절에 "형님, 동생"하던 사이에서, 황제가 된 주원장이 예전처럼 대해주려고 해도, 그저 고마워하기만 할뿐 전부 사양하고 더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서달은 말이 간략하되 생각은 정밀하였다. 군대에 있을 때는, 영을 내려도 서로 다르지 않았다.

제장들이 봉지(奉持)할 때는 늠름하여도 황제 앞에서는 공손하고 삼가하여 능히 말을 못하는 것 같았다.

부하를 어루만지고 위무하길 잘하여, 부하들과 감고(甘苦)를 같이 하니, 사졸들은 은혜에 감동하여 죽을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 때문에 향하는 곳마다 이기게 되었다.

또한 부대를 엄정히 단속하여, 평정한 큰 도읍(大都)이 둘이요, 성의 도읍(省會)가 셋이요, 군읍(郡邑)은 수백이나 되었지만, 백성들은 여항(閭井)은 편안하여 백성들이 군대를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조정에 돌아가는 날은, 한대의 수레에 타고 관사로 가고, 조정에서는 유생들을 예로 대하여 담소하고 의논하기를 종일하였으니, 화목한 것이 이와 같았다.

황제가 일찍이 그를 칭찬하며 말하길 "명을 받들어 나가고, 공을 이뤄 돌아오는데, 자랑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으며(不矜不伐), 부녀를 사랑한 바도 없고, 재보를 취하는 바도 없으니, 중정(中正)함에 허물이 없어 해와 달보다 밝고 분명한 것은 대장군 한사람 뿐이다"라 했다. ─ 명사, 서달 열전


 
시랑(施琅)
1621 ~ 1696 ─ 청
 
중국의 항공모함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의 이름은 시랑, 바로 이 남자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그리고 시랑의 가장 큰 전공이 대만을 정복한 일 이라는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대만을 정복하면서 무너뜨린건 정씨왕조인데, 이쪽은 또 일본하고도 엮여있는 집안이었는데……
 
 
명말 청초, 시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전중국 최고의 수군 제독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국성야(国姓爺) 정성공(鄭成功)보다 나이가 더 많았으며 실제로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의 시대부터 함대에서 활약해 온 인물이었습니다. 본래는 복건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항해술에 신묘한 능력을 보였고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반 만주족 항전에 참여했습니다.  정지룡 함대에서 그의 역할은 좌군 선봉 선단의 통솔이었는데, 함선을 지휘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수군 병기와 선박용 장비를 설계하는데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후(鄭侯)라는 별명을 지녔던 그는 정지룡 함대의 선원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지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실력과 명성을 가진데다 경험까지 풍부한 시랑과 정성공은 서로간에 존중은 하면서도 약간은 소원한 껄끄러운 관계였습니다. 시랑은 가끔 정중하면서도 솔직하게 (정지룡이 통솔하던) 예전이 좋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이는 정성공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둘은 충돌하게 됩니다.
 
 
어느날 시랑의 선단에서 한명의 부하가 불분명한 죄목으로 고발되자, 그는 탈출하여 정성공에게로 몸을 피했습니다. 시랑은 다른 부하들을 시켜 정성공의 진영으로 보내 탈출자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속에 정성공의 권위는 무시되어버렸습니다.
 
 
예컨대, 시랑의 입장에서 보면 정지룡의 아들이 될법한 사람이자 또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본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성공에게 고분고분하게 구는 법이 없었고, 대놓고 정성공의 지도력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태도에 정성공은 시랑의 부관인 만례(萬禮)를 오히려 시랑 보다 높은 지위에 올리는것으로 응수했고, 분쟁은 이제 노골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1650년 쯤, 시랑은 류쿠 열도에서 많은 은을 수송하고 있었는데 군수품을 사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불운하게도 엄청난 폭풍이 나타나며 많은 은이 유실되고 말았고, 감정이 폭발한 정성공이 시랑을 매우 크게 질책하자 격노한 시랑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상투를 칼로 잘라 들어올려 사의를 표시했습니다. 정성공은 우선 사태를 수습해서 그 자리에서 시랑이 함대를 떠나는 일은 피했다고 합니다.
 
 
이듬해, 정성공이 중국 본토 공격을 노릴 즈음 적들이 점령하고 있는 도성을 공격한 후 금은만 탈취하고 도성은 내버려두고 철수하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시랑은 이를 반대합니다. 그게 보통 해적때들의 도적질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 그것이 반청복명이냐는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도적과 다를 바가 아니냐' 는 식의 모욕을 받은 정성공은 정말 크게 노해 시랑을 가택연금 시켰고, 시랑의 행동 범위를 그의 선박 안으로만 지정하는 제한을 걸었습니다. 
 
 
이쯤되자 시랑은 조용히 야음을 틈타 달아나 정성공의 숙부에게 몸을 피했으나, 시랑의 의견에 일부 동조하면서도 차마 정성공의 권위를 거스르기 힘들었던 숙부는 보호 요청을 거절했고 오갈데가 없어진 시랑은 결국 청나라 정부에 귀순 요청을 신청하게 됩니다. 소식을 들은 정성공은 격노해 시랑과 시랑의 아버지, 시랑의 가족을 모두 죽이기 위해 특공 암살대를 조직했지만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시랑은 가족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최고의 해군 제독, 그리고 시랑의 머릿속에 있는 정성공 함대의 정보를 손에 넣은 청나라였지만 몇년동안은 그것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며 정성공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만주족 함대 를 조직해 공격을 하다가 엄청난 대패를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죠.
 
 
시랑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은것은 강희제의 시기였습니다. 강희제는 복건 총독 요계성과 제독 시랑을 앞세워서 대만 정복을 꾀했습니다. 문제는 시랑이 과거 정씨 가문의 사람이었다는 점이지만, 강희제는 시랑에게 기회를 주었고 찬스를 얻은 시랑은 1683년 6월 230척의 전함과 2만의 부대를 앞세워 대만을 통과하는 주요 관문인 팽호도에 이르렀습니다.
 
 
팽호도를 지키는 장수의 이름은 유국헌이었습니다. 유국헌의 전함은 200여척이 넘었고 병력도 2만 여명이나 되어서 시랑은 숫자로 우위를 확보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6월 17일, 시랑은 팽호열도의 팔조서라는 지역에 정박을 했는데, 이 지역은 해마다 봄과 여름에 걸쳐 거대한 태풍이 자주 오는 곳으로 유난히 물의 흐름이 급하여 태풍이 다가오면 어마어마한 파도가 정박해 있는 배를 쓸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해마다 6월 17일과 18일, 19일 3일간은 "관음폭" 이라고 하는 강력한 바람이 불어 정박하기에는 최악의 장소였습니다.
 
 
시랑이 팔조서에 정박하는것을 본 유국헌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시랑을 비웃었습니다.
 
 
"누가 시랑이 뛰어난 장수라고 하더냐? 그깟 천문지리도 모르는 작자가 어찌 군대를 거느린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저 술이나 마시며 적들이 섬멸되는 것을 구경하면 되겠군!"
 
 
그런데 놀랍게도 시랑이 팽호도에 도착한지 무려 열흘이 넘게 바다는 태풍은 커녕 큰 파도 조차 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저 우연인지 천문지리도 꿰뚫어본 시랑의 혜안인지는 알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으나, 반대로 유국헌은 예상이 빗나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22일간이나 벌어진 전투에서 유국헌은 휘하의 함대 159척을 전파당했고, 35척을 빼앗겼으며 1만 2천여명의 군사들이 전사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랑이 이끄는 함대는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수준에 불과했으며, 문제가 있다면 시랑이 오른쪽 눈을 좀 다쳤다는것일뿐 완벽한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이 팽호대전의 결과로 정씨 왕조는 주력군을 모조리 잃었고 팽호열도 36개 섬을 잃어버렸습니다.
 
 
요계성은 시랑에게 승전의 기회를 살려 패잔병을 추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시랑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국사를 행해서는 안될 일이지요."
 
그러면서 회유책을 주장헀고, 조정 대신들과 강희제도 이에 찬성을 했기에 대만의 코앞에 함대를 주둔시킨 시랑은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필리핀으로 달아날 계획까지 짜고 있던 정씨 왕조는 시랑이 이렇게 나오자 불안감을 덜고 항복을 했고, 대만에 상륙한 시랑은 8월 18일 강희제의 칙령을 읽어 대만 정복 작전을 완수했습니다.
 
 
그 후 시랑은 정성공의 사당에서 제를 올렸으며, 사적인 복수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대만이 막 항복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이러한 시랑의 태도는 대만의 안정화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강희제는 시랑에 공적에 크게 기쁨을 표시했고, 마침 중추절이었던 까닭에 "중추일문해상첩음"이라는 시를 써써 \시랑을 칭찬하며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시랑에게 하사하겠다고 밝히고 적을 토벌한 시랑의 지혜와 용맹함이 청사에 남을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 후 시랑은 정해후(靖海侯)가 되었고, 10년 뒤에 강희제에게 특별히 황족이나 고관들이 쓰던, 모자 뒤에 드리우는 공작의 꼬리를 주십사 하고 부탁하자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강희제는 흔쾌히 이를 허락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그대가 대만에 도착하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짐의 판단으로는 그대를 보내지 않으면 대만을 점령 할 수 없다. 그대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짐은 확신한다." ─ 강희제, 조나단 스펜스 강희제





몽염(蒙恬)

? ~ BC 209 ─ 秦

 

몽염은 몽념이라고도 불리는데, 발음상으로는 어쩐지 몽념쪽이 더 잘 말이 되지만 통상적으로는 염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그는 무인가문에서 태어나 장군이 된 인물로서 통일 전쟁에서 활약했던 무장이었습니다.


본래 몽씨가문은 제나라 사람들이었는데, 몽염의 할아버지인 몽오때부터 진나라로 이주해와 장군이 된 집안이었고, 몽오는 위, 한, 조나라를 공격하는데 활약했고 몽오의 아들 몽무는 진나라의 유명한 장군인 왕전의 부장이 되어 초나라의 명장 항연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었습니다.


이렇듯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공을 세워 몽염 역시 자연스럽게 장군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몽염은 아직 몽무가 현역이었을때부터 장군이 된듯 한데, 몽염 열전엔 별다른 기술이 없지만 왕전의 열전에는 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전이 나서기전, 진나라는 젊고 용감한 장수 이신을 대장으로 삼고 몽염등과 함꼐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습니다. 이에 왕전이 몽무등과 함께 나서 항연을 무찌른 것이죠. 다만 이때의 기술을 보면 '몽염은 침구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이신은 성보에서 몽염과 집결하기로 하였으나 형의 군사들이 이신을 추격하여 진나라군을 격파하였다.' 고 하니 몽염이 패전의 원인은 아닌듯합니다.


몽염은 그 후로도 통일전쟁에서 활약합니다. 특히 제나라 공략시엔 크게 활약하여 그 공으로 내사가 되었고, 천하가 통일된 후로는 군부의 제 1인자가 되는 권력을 가지기 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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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세상의 주인이 되고, 대장군이 된 몽염은 시황제의 명을 받고 30만 대군을 이끌어 북진을 감행, 융적과 흉노를 격파하고, 흉노와의 대립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은 오르도스 지방을 손에 넣게 됩니다. 그 후 10년 동안 북방에 머물렀는데, 그 위세에 흉노족이 힘을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몽염이 북방에 머무른 가장 큰 이유는 우선 흉노족을 무찌르는것이었지만, 둘째로는 군사가 아닌 영구적인 수비 시설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몽염은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 장성은 본래 조나라, 연나라, 진나라가 나름대로 쌓은 세개의 장성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으로 6352km나 되었는데 만리가 4000km인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만리보다도 훨씬 긴 건축물이었습니다.



몽염은 이렇게 위세가 당당한 대장군이었고, 시황제의 신임도 대단하였습니다. 이것은 몽염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인 몽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어느날 몽의는 환관인 조고가 죄를 지어 사형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조고를 아낀 시황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몽의에게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대신 "조고가 아까운 사람이니 어떻게 벌을 줄이면 안되겠는가?" 하고 부탁을 하기까지 합니다.


몽의는 황제의 부탁을 들어주지만 조고는 이에 대해 큰 원한을 품었습니다. 조고는 황제의 둘째 아들인 호해와 붙어다니며 기회를 였보았고, 몽씨 형제는 이는 알고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천하를 순시하던 시황제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급사를 하고 마는데, 천하에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순행길에 따라 나섰던 조고와 호해, 그리고 승상이었던 이사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후계자로 유력한 사람은 장남이자 몽염과 같이 북방에 있던 부소였는데, 조고와 호해는 짜고 호해를 황제로 만드려고 작당하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사였는데 이사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며 이 계획에 반대합니다. 조고가 이때 팔아먹은 사람이 몽염이었습니다. 조고는 몽염의 여섯가지 큰 공을 예로 들며 "이 중 하나라도 승상이 나은 점이 있느냐"고 묻자 이사는 "내가 그 모두 몽염 대장군만 못하다." 라고 인정합니다. 조고는 그렇다면 몽염과 친한 부소가 황제가 되면 이사는 볼품없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이사도 마음이 움직이게 됩니다.


결국 호해가 황제가 되었고, 조고는 이제 원한을 값을 시기라고 생각해 작당을 하게 됩니다. 호해가 본래는 훨씬 먼저 황태자가 될 수 있었는데, 몽의가 시도때도 없이 반대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몽씨 형제를 처단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몽씨 가문의 공이 워낙 거대해 호해는 머뭇거립니다. 명망 높은 황족이던 자영까지 몽씨 형제의 처단을 반대하였지만, 조고가 "폐하를 황제로 만든 저를 믿으십니까, 아니면 몽씨 형제를 믿으십니까?" 하고 워낙 우겨대는 통에 결국 몽의는 자결을 명령받게 됩니다.


몽의는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조고는 중간에서 이것을 가로챕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도끼로 몽의를 살해하였습니다.


몽의는 쉽게 죽였지만 대군을 이끌고 있는 몽염은 문제거리 였습니다. 호해는 조서를 꾸며 진시황이 살아있는것처럼 하고,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마음 약한 부소는 자결했고, 몽염은 자결을 거부해 양주에 구금되었다가 동생의 죽음과 자결하라는 명을 다시 한번 듣자 더 이상 뻗대지 않는 대신에 길게 한탄을 합니다.


"나는 참으로 죽어 마땅할 것이다. 만여리나 장성을 쌓으면서 얼마나 많은 지맥을 끊었던가? 내게 죄가 있다면 이것이다."


그리고 자결했습니다.




몽염은 당대에 이미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사가 순순히 자기가 그 공보다 못하다고 한것도 그렇고, 사마천 역시 명장이라고 인정은 하였으나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시황제의 악행을 막을 생각은 못하고 순응한것에 대해서는 비판했습니다(왕전에 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지맥드립에 대해서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하기도 하면서...



붓을 만든 사람이 몽염?

'염필륜지'(恬筆倫紙)라는 말이 있는데, 몽염이 붓을 만들었고 채륜이 종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몽염이 토끼털등을 이용해서 붓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채륜의 기록이 상세한것에 비하면 몽염의 구전으로 내려온게 많고 기록으로는 ≪박물지 博物志≫ ≪예문유취 藝文類聚≫ ≪백공육첩 白孔六帖≫  ≪태평어람 太平御覽≫ 등에 蒙恬造筆(몽염조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증거가 불충분 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상 - 주 시대에도 붓으로 글자를 새긴 흔적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마천의 몽염 열전에는 특별한 말이 없고, 송나라 사람 소이간(蘇易簡)은 저서 ≪문방사보 文房四寶≫에서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자기들의 치세(治世) 동안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발명설을 주장한 것 같다.” 고 했습니다.

몽염이 만약 붓을 만들었다면, 그러한 계기가 된것은 제나라 공략 후 내사가 되었을떄인데, 내사는 국가의 법전을 관장하며 조서 및 궁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을 말합니다. 이는 공문서의 기초나 서사·복제 따위의 일을 맡은 직책이었기 떄문에 그러므로 일을 위해 서사 용구를 개량한 것이라 하면 앞 뒤가 맞긴 합니다.


보통은 몽염이 붓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고, 만약 관련이 되있다면 개량한 것이 아닐까로 보는 듯 합니다.



진나라가 이미 천하를 병탄하자 몽염에게 30만의 군사를 주어 융적(戎狄)의 무리들을 북쪽으로 쫓아내고 하투(河套) 지역의 하수 이남의 땅을 진나라 영토로 삼았다.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해서 지형에 따라 험난한 요새를 연결하여 성채를 쌓고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렀는데 총 길이가 만리에 달했다. 장성은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의 능선을 점거하고 뱀처럼 꾸불꾸불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군사들을 10여 년 넘게 변경 밖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상군(上郡)에 주둔했다.
 
그때 몽염의 위세는 흉노의 땅을 진동시켰다. ─ 사기, 몽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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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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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gksmf | 작성시간 12.04.21 ㅋㅋㅋ

  • 작성자블라디미르 대공 | 작성시간 12.04.21 명나라 환관 왕진 vs 6진의 수호신 엉규이
  • 답댓글 작성자jowlaw2 | 작성시간 12.04.22 왕진 이 깔려면 한도 끝도 없으 ㅋㅋㅋ
  • 작성자jowlaw2 | 작성시간 12.04.22 독립유공자 무다구친렌야 성님이 제일임
  • 작성자사탕찌개 | 작성시간 12.04.22 정말 한신같은 사람은 신기하죠. 보통 경험이 있어야 저리 잘할수 있는데 평생 찌질이로 살다가 갑자기 낙하산 인사로 높은곳에 올라가니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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