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 7일 일본제국은 베이징 외곽에서 일어난 총격전을 빌미로-노구교 사건- 대대적인 중국 침략에 나섭니다. 하지만
일본이 착각한게 있었으니 지금까지 상대한 중국군과는 전혀 다른 상대가 일본군을 맞이 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일본군이 아는 중국군대라고는 군벌뿐이었죠 대표적인게 만주의 실권자 장작림-
이제 일본군이 상대해야할것은 지금껏 승승장구하며 남부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장개석의 국민당군이었습니다. 국민당군은
다른 군벌의 군대와는 다르게 훈련도 잘되어있었고, 무엇보다도 애국심과 민족주의로 무장한 상대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1인자 총통 장개석-
일본은 허수아비 중국군 따위 3개월이면 쓸어버릴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들의 우수한 무기와 앞선 전술로 중국군 따위 청일전쟁때
처럼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당군의 외곽지역이나 다름 없는 베이징과 텐진을 날름먹은 일본군은 더욱더
국민당군을 과소평가했고, 이는 단숨에 전쟁을 끝내버리겠다는 일본군 수뇌부의 생각과 맞물려 바로 국민당군의 본진지역인
상하이 및 난징으로 처들어가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웁니다.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밀고 내려가는 것보다 상하이에 상륙해서 난징까지 가는게 더 가깝지요??-
당시 중국은 해군이란게 전무했기 때문에 압도적인 해군전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은 상하이에 함재기를 이용한 공습을 한뒤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켜서 상하이를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군의 생각으로는 상하이 점령에 몇일 안걸리거라 생각
했고, 바로 난징을 공략하여 1937년이 가기전에 중국군대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민당군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지요. 1930년대 초 장개석은 군대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그는 나치 독일과 손을 잡고 군대를 개편
했습니다. 심지어 일본-독일-이탈리아 추축동맹이 성립되었지만 나치 독일은 장개석을 계속 밀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파견된
독일의 한스 폰 젝트 장군은 국민당군을 정예화 시켜주었습니다.
-국민당군을 키워준 한스 폰 젝트 장군-
-독일식으로 차려입은 국민당군 인터넷에서 많이 보던 사진이지요?-
-장개석의 차남 장위국, 군복을 보면 독일식이라는걸 확연히 아실수 있을겁니다-
물론 대부분의 국민당군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곤 하지만 상하이와 난징을 지키는 장개석의 직속부대들은 잘훈련되고 보급품도
좋은 정예부대였습니다. 즉 일본군은 국경에서 만나본 국민당군이 전부인줄 알았기에 이런 대담한 작전을 수립한것이었지요.
1937년 8월 22일 일본군은 상해 상륙작전을 시작합니다. 압도적인 해군전력으로 해안가를 무력화 시킨 일본군은 손쉽게 상하이를
점령할거라 생각하며 각종 함재기의 엄호아래 순조롭게 상륙을 시작합니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일본 항공모함 아카기-
일본군은 상해파견군이라는 이름하에 2개 사단 6만명의 전력으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만 기다리고 있는 국민당군대는 25개 사단
33만명이었습니다 ㅡㅡ; 그리고 한스 폰 젝트 장군이 미리 마련해 놓은 대규모 벙커밭과 토치카들이 일본군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대표적인 사례가 상하이 외곽에 위치한 오송 상륙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의 선봉에 선것은 일본군 제 3사단(속칭
나고야 사단)이었는데 이들은 무슨 소풍나온 느낌으로 상륙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국민당군의 대규모 토치카와 벙커였죠.
일본군은 예나 지금이나 착검 돌격을 좋아했는데 이때도 내려진 명력이라고는 포복으로 벙커에 접근한 뒤 착검 돌격이었죠.
-예나 지금이나 착검하고 돌격!-
일본군은 지금까지 상대해온 국민당군은 착검 돌격하면 도망친다는 전례로 미뤄보아 이번에도 착검돌격하면 도망칠거란 생각에
바로 돌격을 시작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지금 버티고 있는 건 국민당군 최정예...... 상륙한지 수십분만에 벙커&기관총밭에 걸린
제 3사단은 전력의 절반인 1만명이 사망하는 ㅎㄷㄷ한 전과를 냅니다. 하지만 정신력의 일본군 그들은 지치지 않고 계속 돌격을
감행했고, 결국 다음날 사단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_-; 일본군 사단장은 후퇴를 해야하는가 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근성의 일본군은 9월 2일 다시 제 2차 상륙을 감행했고, 어찌저찌 이 오송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제 3사단은 전력의 90%가
날아가버렸다고 합니다. 한편 이런 일본군의 근성에 놀란 국민당군은 일본군을 공포의 군대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하여간
오송에 상륙한 일본군을 기다리는 건 마찬가지로 더욱더 요새화된 상하이 외곽이었습니다. 뭐 어찌되었든 일본군은 상하이에
돌격했고, 결국 3개월의 전투끝에 상하이를 점령합니다. -일본군 사상자 5만여명, 국민당군 사상자 25만명(......)-일본 수뇌부는
3개월만에 중국본토를 점령한다는 목표아래 시작한 작전이 3개월만에 겨우 상하이 하나만을 함락시키자 당황했습니다. 한편
예상 밖의 피해에 악이 받친 일본군은 바로 난징으로 진격했고, 마찬가지로 -_- 상하이에서 주요 부대를 날려버린 국민당군은
이 진격을 막을수 없었습니다. 결국 12월 1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은 함락되었고, 그 후 6주간 난징대학살이 벌어졌습니다.
-끔찍한 사진들이 많은 관계로 난징 대학살 사진은 넘어가겠습니다......-
이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대규모로 중화민국의 지원이 쏟아지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인도차이나 반도와
남쪽 홍콩을 통한 영국 미국의 지원과 북쪽 소련의 지원이 계속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주요도시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한뒤에
육군이 점령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중국 내에서 영토를 늘려갔습니다만 곳곳에서 중국군 게릴라-주로 공산당 계열-과 전투를
벌이며 보급로가 늘어나면서 일본군이 감당할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국민당군이 육군 숫자는 많아도 고생한 이유는 이런 공군전력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결국 일본군은 더 이상 영토를 늘려 중국 전토를 장악하는것 보다는 대륙의 모든 경제적인 기반과 보급로를 끊어
중국을 경제적으로 굶어죽이겠다는 작전을 폅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은 막나가는 일본에게 석유 수출 금지령을 내립니다.
석유 수입의 90%를 의존하고 있던 일본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조치였죠.
-예나 지금이나 석유는 중요 또 중요-
미국 영국의 요구는 간단했습니다. '석유 먹고 싶음, 지금까지 먹은 땅 다 토해놓고 만주로 돌아가삼' 일본은 이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최후의 수단을 쓸수 밖에 없었습니다. 없으면 뺏어서 쓰겠다는 심산이었죠.
-이런 험난한 상황서 일본의 총리대신, 수상이된 도조 히데키-
육군 사관학교를 나와 육군 대신 출신으로 수상에 오른 도조 히데키는 이제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독일령이 되어버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 일본군을 배치 시켜 동남아의 석유자원을 노렸습니다. 한편 이렇게 남쪽으로 전선을 확대 시키려
하자 뒤통수가 서늘했으니 바로 미국의 존재였습니다.
-내가 지켜보고 있지-
애초에 해군 군축 조약시기부터 일본은 가상적국을 미국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중일전쟁이 격화되자 일본을 억제하려
던 미국의 의도는 더욱더 노골적이었고, 석유 수출 금지를 내린 미국이란 존재가 일본의 대규모 함대가 동남아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미국의 함대가 일본 본토로 처들어온다면 일본으로서는 제일 중요한 본토가 날아가는 대참사가 벌어질것이었기 때문이었죠.
-미국 본토와 일본 본토 사이에는 오직 바다뿐......-
게다가 미국 해군은 태평양함대를 사령부가 있는 샌디에이고에 함대를 정박시킨것이 아니라 하와이 진주만에 배치해서 언제든
일본해군에게 압박을 가할수 있게 조치했습니다. 일본해군으로서는 이 태평양함대의 존재가 너무나도 껄끄러웠습니다. 결국
일본은 이 위협을 먼저 제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작전계획을 짜내가기 시작합니다.
-태평양함대의 운명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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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Venice의 선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11.27 뭐 장개석 직속 몇개사단은 말그대로 정예화 되었지요 이들이 상하이랑 오송서 일본군과 투닥투닥하다 다말아먹은게 좀 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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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Che_GueVaRa 작성시간 11.11.27 베니스의 선원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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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Venice의 선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11.27 투르크랑 비교하기 애매한게 투르크는 말그대로 영국군을 갈아먹고 후에 그리스군도 날려버릴정도로 강해졌는데 중국 국민당군대는 워낙 부정부패가 심해서 이 정예사단 날아간 뒤로는 힘도 못쓰고 게릴라전에서 힘겹게 싸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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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Che_GueVaRa 작성시간 11.11.27 저도 써놓고 웬지 좀 애매하다 싶어 그 부분을 지웠는데. 쩝.
그리고 당시 투르크는 엔베르 파샤가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몇 차례에 걸쳐 한 게 컸다 생각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투르크의 예비 병력 --> 콘스탄티노플에 1개군이 편성되어 있었죠.
이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철도 체계가 갖춰줘 있었고 지휘관이 굉장히 유능했죠. --> 무스타샤 케말.
또, 갈리폴리전투에서의 영국군이 심각하게 무능한 지휘관들이었다는 것도 한 몫하죠.
암튼 잘 모르는 중국군 얘기에 대해 하나 배워갑니다. 꾸벅. -
작성자기러기 작성시간 11.11.27 드디어 태평양 전쟁의 서막이..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