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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밥통을 넘어서 - 어느 퇴직교수의 회고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16.12.05|조회수835 목록 댓글 5

아래 e-book 저널에 실린 글을 소개합니다. 


한국대학학회, 대학담론과 쟁점, 2016년 제2호, pp. 43~50, 2016/12/1

 

나는 불혹의 나이에 그 당시 기준으로서는 아주 늦게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전 직장인 국토연구원에서 3년 정도 연구원 생활을 하다가 19903월에 수원대에 조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후 25년간 근무하다가 20158월에 정년퇴임을 하고 지금은 강원도 평창에 있는 작은 시골집에서 백수생활을 즐기고 있다.

 

1990년이면 노태우 정부 시절인데,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여파로 아파트값은 갑자기 3배로 올랐고, 정부에서는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대학설립준칙주의로 대학의 수가 늘어나기 전이었고, 비정규직인 계약제 교수 제도가 도입되기 전이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조교수로 임명받을 수 있었던 어찌 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느 대학에서나 볼 수 있는 계약제 비정규직 교수는 없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40세가 넘으면 교수로서 뽑아주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39세 가을 학기에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고 늦깍이 교수가 되었다. 대학교수가 된 후 어느 날 학과장회의에 참석을 하였는데, 두 명의 교수가 지각을 했다. 이전 직장인 연구원에서는 회의 시작하기 5분전까지 모든 사람이 다 자리에 앉아서 원장님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대학에서 학장님은 교수들의 지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의아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그만큼 대학은 좋게 말하면 자유스런 분위기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느슨한 분위기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후 다른 대학 교수로 근무하는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니, 사립대학과 국립대학은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국립대학은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매우 안정되고 자유스런 분위기였다. 봉급은 사립대학보다 적었지만 정부에서 특별히 간섭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립대학은 총장이 교수를 임명하고, 재단에서 총장을 임명하는 구조였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사립대학은 재단의 입김이 세게 작용하였고, 국립대학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사립대학은 일반 회사와 국립대학의 중간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회사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짤리지는 않지만, 재단의 입김이 작용하는 재임용에서 탈락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수원대학의 설립자가 건설회사를 경영하던 분이었기 때문에 수원대의 분위기는 다른 사립대학에 비해서도 매우 경직된 그런 분위기였다. 외출하기 위해서는 외출부에 기록을 해야 했고, 1주일에 4일은 강의가 없는 날에도 출근을 해야 했다. 안식년 제도는 형식적으로만 있었다. 나는 25년 동안 안식년을 한 번도 가지지 못하였다. 안식년을 가지려면 재단 실권자를 찾아가 이른바 인사를 해야 했는데, 나는 그런 일에는 원래 서툴렀다. 전반적으로 학교의 운영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총장의 말 한마디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설이나 추석 명절이 되면 보직교수들은 교무처장 주도로 돈을 모아서 선물을 사들고서 총장에게 인사를 가는 전통이 내러오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설립자가 돌아가시고 둘째 아들이 총장이 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왔다. 최근 시행된 김영란법의 기준으로 보면 불법이지만, 당시는 윗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이름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전통은 내가 근무하던 연구원이나 일반 회사에는 없는 독특한 전통이었는데 목소리를 내어 이의를 제기하는 교수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수원대의 독특한 전통은 2013년 봄에 수원대교수협의회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교수가 된 초기에는 연구과제 따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경쟁이 요즘처럼 심하지 않아서 1년에 1~2개 과제의 연구비를 따서 연구를 매년 수행할 수가 있었다. 연구비의 사용과 정산도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다. 학교에는 10%의 간접비를 내고 대학원 학생의 인건비를 지출하고 교통비와 출장비는 넉넉히 잡아서 약간은 개인적으로도 쓸 수 있는 그런 시절이었다. 업적평가기준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일년에 단독으로 1편 정도의 학술논문을 국내학회지에 실으면 충분히 업적평가기준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교수의 말을 잘 따랐다. 학생들이 교수의 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없었다. 유교적인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는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부임한 이듬해인 199112월에 사은회가 있었다. 장소는 서울에 있는 작은 호텔이었다. 여학생이 한복을 입고 나와서 교수들에게 큰 절을 하여서 매우 당황스럽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풍성하고 격식을 갖춘 그런 사은회는 몇 년 간 계속되다가 어느 해 부터인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515일 스승의 날이 되면 학과 학생회장이 찾아와서 꽃도 꽂아주고 작은 선물도 주었다. 스승의 날 저녁에는 졸업생들이 찾아와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1993년인가 스승의 날에 1회 졸업생들이 찾아와 수원의 한 갈비집에서 즐겁게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졸업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오다가 뒷차가 내가 탄 차를 들이받아 엔진에서 불이 나 차가 전소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뒷좌석에 두었던 내 낡은 가방이 불에 타서 없어졌고 나는 병원에서 하루 머물렀던 기억도 새롭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한 학과의 정원은 20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수원대에서는 한 학과의 정원이 40명이었고, 몇 년 후에는 야간이 신설되어 정원이 80명으로 늘었다. 곳곳에서 대학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시골의 군소재지에도 대학이 세워졌다. 전체 대학의 입학정원이 늘어나자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는 정원을 채우지 못해 교수들이 신입생을 유치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수 친구에게 물어 보니 그것은 소문이 아니고 사실이었다.

 

나중에 궁금해서 알아보니 1995년에 김영삼 정부에서 소위 ‘5.31 교육 개혁 조치에 따라 나온 정책이 대학설립자유화’(대학설립준칙주의)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고등교육영역을 시장으로 보고 자본의 진출입을 자유롭게 하여 자유경쟁을 통해 고등교육의 질 향상을 도모하려는 의도로 추진되었다. 한 마디로 교육계의 신자유주의 정책이라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대학의 양적 팽창만 가져왔을 뿐 고등교육의 질적 향상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세계적 수준의 대학도 육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설립운영 기준을 낮춤으로써 대학의 전반적인 부실만 초래했다. 우리나라처럼 대학의 서열이 견고한 상황에서 대학의 수를 늘려도 경쟁을 통한 서열의 변화는 발생되지 않았다.

 

오랫 동안 교수직은 속된 표현으로 철밥통이었다. 한번 교수가 되면 여간해서는 짤리지 않고 정년까지 교수로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사회의 변화와 학문의 변화는 천천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작년의 강의노트를 올해에 사용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회에서 교수직은 선망의 직업이었다. 어느 자리에서도 교수님이라는 칭호를 듣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또 국민들은 교수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학생들에게 교수의 말은 권위 그 자체이었고, 학생들에게 교수란 영원히 도전할 수 없는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밥통에 금이 간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던 1999년에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여 계약임용제 교수제도를 도입한 이후라고 생각된다. 계약임용제 교수란 쉽게 말해서 비정규직 교수를 말한다. 개정된 사립학교법은 2002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사립대학에서 비정규직 트랙이라는 이름으로 계약제 교수를 뽑기 시작하였다. 계약제 교수는 매년 재계약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분이 불안해졌다. 계약제 교수는 재단이나 총장의 부당한 요구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총장과 교수와의 관계에서 계약제 교수는 매우 나약한 이 되고 말았다.

 

수원대에서도 2003년부터 비정규직 계약제 교수를 뽑기 시작하였다. 20138월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딸을 조교수로 임명하기 전까지 수원대에서는 10년 동안 100여명의 교수를 모두 1년 계약 연봉제로 채용했다. 김무성 의원의 딸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임명한 조교수였기 때문에 당연히 특혜시비가 일었다. 김무성 의원의 딸은 2014년 여름에 결혼을 하고서 가을학기를 끝내고는 퇴직해 버렸다.

 

교수의 철밥통을 깨뜨리는 데에 기여한 것은 인터넷의 발달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두 세 개의 주제어를 치면 그에 관련된 모든 지식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그 중에서 필요한 것은 즉시 프린트도 할 수 있다. 지식을 외운다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 복잡한 공식을 외울 필요성도 없어졌다. 이공계 분야에서는 학문과 기술의 발달이 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언젠가 컴퓨터 공학과 교수의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컴퓨터 분야의 기술 발달이 너무도 빨라서 최신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너무도 힘겹다는 것이다. 때로는 학생들이 최신의 변화를 더 빨리 인터넷을 통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2년 전의 강의 노트를 올해에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년 강의 노트를 수정하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부끄럽다고 한다. 교수들도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빨리 적응을 해야 살아남게 되었다.

 

내가 수원대에 부임한 이듬해인 1991년 봄에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학생들의 요구는 학생이 참여하는 대학발전위원회를 만들어서 민주적으로 학교를 운영하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학과장이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총장은 시위를 막으라고 하고, 학생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처럼 보이고. 학교측과의 대화가 막히자 학생들은 어느 날 강의실의 의자를 모두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나는 학생들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였다. 그 다음날 강의 시간에 나는 언성을 높였다. “아니 어떤 놈들이 의자를 모두 던져버렸느냐?” 그러자 한 남학생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교수님, 놈이라고 욕을 하지는 맙시다.”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위기였다. 그렇다고 학생에게 사과할 수도 없고. 나는 순간적으로 학생들이 시위하면서 벽에 붙였던 대자보를 기억해냈다. “너희들이 붙인 대자보를 보았지? ‘적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자. 심장에 비수를 꽂자는 놈들한테 놈이라고 했다고 뭐가 잘못되었나?” 발언한 학생도 다른 학생들도 모두 침묵을 지키고, 나는 위기를 벗어났다.


2003년에 이명박 정부가 시작되면서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와 돈을 숭배하는 맘몬주의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사회 각 분야에서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잘 보여주었듯이 회사에서는 사장이 절대적인 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사장도 회장 앞에서는 이 되고 만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많이 훼손되었다.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할 국회가 대통령에게 굴복하고, 권력을 감시해야 할 언론마저 권력과 자본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학사회 역시 우리 사회 전반의 변화와 맞물려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겸임교수, 산학협력교수, 강의전담교수, 계약제 교수 등등 각가지 이름의 비정규직 교수들이 늘어났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똑같이 강의하는데도 저임금을 받았고, 학교의 운영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대학입학정원이 고교졸업생 수보다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지방의 신생대학과 서열이 낮은 대학들은 교수들을 신입생 모셔오기경쟁으로 내몰았다. 강의평가제도가 도입되어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평가하고 그 결과는 업적평가점수에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교수들은 이전처럼 강의실에서 갑으로 군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교수들이 학생들의 눈치를 보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학교의 주인은 등록금을 내는 학생들이라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연구비의 관리도 엄격해져서 예전처럼 연구과제에서 대학원 학생들의 인건비를 뗴어 먹다가는 언제 고발당할지 모르는 분위기가 되었다.

 

예전에는 자가 붙는 직종은 인기가 좋았지만 이제는 변하였다. 의사도 예전 같지 않고, 변호사도 예전 같지 않다. 세무사, 회계사도 예전 같지 않다. 물론 교수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최근에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교수들은 더욱 움츠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요즘에는 교수직을 철밥통이라고 생각하는 교수는 거의 없다고 본다. 교수라는 직업에 만족하며 연구하면서 즐거움을 찾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보람을 느끼는 시절은 간 것 같다. 교수라는 직업이 좋았던 시절은 과거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개인적으로도 지난 몇 년 간 어려움을 겪었다. 어느 날, 수원대의 계약제 교수와 대화를 나누다가 깜짝 놀랐다. 수원대에서는 2003년부터 신임 교수를 ‘1년 계약 연봉제조건으로 뽑았다. 매년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하니 신분 보장이 안 되고 매우 불안하였다. 연봉은 놀랍게도 3000만원부터 시작하였다. 대학 졸업하고 석사 2년 박사 3년을 추가로 투자했는데도 계약제 교수의 초임 연봉이 인기 분야 대학졸업생의 초임보다도 못하다니! 재단에서는 돈이 없어서 봉급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가? 그게 아니었다. 수원대에서 등록금을 걷어 다 쓰지 않고 은행에 쌓아둔 적립금은 4000억원이 넘고 전국적으로는 4번째로 적립금이 많은 대학으로 보도되었다. 나는 계약제 교수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서는 차마 모르는 체 할 수가 없었다.

 

20133월에 교수들이 용기를 내어 총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30여명의 교수들이 수원대교수협의회를 만들어서 재단과 총장을 상대로 어려운 싸움을 시작하였다. 나는 정년이 임박하였지만 동료교수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3명의 공동대표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열심히 투쟁하였다. 수원대는 총장의 부인이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총장의 처남은 교무부처장이라는 보직을 맡았는데 실세이었다. 처음부터 학교측과 대화가 되지 않았다. 20141월에 나는 다른 3명의 교협 간부들과 함께 파면을 당했다. 우리는 기나긴 소송전을 시작하였다. 2015831일에 나는 65세 정년을 맞았고 연구실에서 짐을 뺐다. 그러나 정년퇴임식은 없었다. 파면당하면 퇴직연금은 반절만 받게 된다. 나는 파면 상태에서 정년퇴직을 맞는 대한민국 최초의 교수가 되었다.

 

26개월의 법적 투쟁 끝에 201699일 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파면은 취소되었다. 밀린 봉급을 되돌려 받고 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요즘에는 지공도사(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도사)가 되어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제는 열심히 살기보다는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직책을 맡아 업적을 남기려 하기 보다는 후배 교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나는 뒤로 빠지려고 한다. 어느 모임에 가든지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스티브 잡스나 안철수를 본받기 보다는 노자와 장자를 본받고 싶다. 바쁘게 살기 보다는 느리게 살려고 노력한다.

 

오랜 재판 과정에서 검사도 만나고 판사도 만나고 변호사도 만나 보았다.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를 만나 보고서 내가 내린 결론은 교수라는 직업이 비록 철밥통은 깨졌지만 그래도 검사보다 변호사보다 판사보다는 더 낫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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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사군자 | 작성시간 16.12.06 탁월한 가치와 통찰로 천둥 비바람에도 버겁다 한마디 않고 훌륭한 인생길을 걸어오신 교수님의 참다운 삶이 잘 정리되어 담겨있습니다. 긴 시간과 공간이 메워진 소중하고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많은 이들과 함께 언제까지 넉넉하고 건강하십시요~
  • 작성자마중물 한방울 | 작성시간 16.12.06 윗글을 읽으며 이제와 되돌아보면, 수원대 역사에서 우리가 지독히도 암울한 시기를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원대가 형편없이 망가지는 시기에, 대부분의 구성원이 침묵하며 방관하는 가운데 이상훈교수님은 작은 촛불하나로 우리 주변을 밝혀 주셨습니다.

    이상훈교수님, 참 고맙습니다!
  • 작성자마중물 한방울 | 작성시간 16.12.06 그러나 이상훈교수님이 법원에서 파면무효 판결을 받고도 복직을 못한 상태에서 정년퇴직을 맞는 대한민국 최초의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은 수원대학교 전체의 수치라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인수총장과 최서원이사장은 법과 원칙을 무시한 채, 자신들이 부여받은 권한을 남용하여 수원대의 이름으로 양심적인 교수를 괴롭히는 만행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는 수원대 구성원 모두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주었고 또한 매우 불행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 작성자마중물 한방울 | 작성시간 16.12.06 이교수님은 정년을 불과 2년 앞둔 시점에서 교협대표를 맡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계약제 교수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서는 차마 모르는 체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 인하여 이상훈교수님은 지금까지 온갖 어려움과 괴롭힘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마중물 한방울 | 작성시간 16.12.06 그 계약제 교수님들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교수님을 포함하여 해직된 교수들의 어려운 처지를 안다면 계속 관심을 갖고 아는 체라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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