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화폐전쟁, 진실과 미래>

작성자gingery(이용호)|작성시간12.11.29|조회수1,078 목록 댓글 20

1. 전쟁이라는 남는 장사

크롬웰 사후

1660년 네덜란드에 있던 찰스 2세는 브레다에서

청교도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은 사면하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며

혁명 중에 구입한 토지와 상품의 보유권을 인정한다

는 선언문을 발표하여 영국 의회는 청교도 혁명으로 쫓겨난

스튜어트 왕조의 왕정복고를 하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앙위에 오르자마자 브레다 선언을 완전히 저버리고

혁명 가담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버지 찰스 1세 심판에 관여한 사람들에게 군주시해라는 죄명을 씌워

중혀으로 다스렸다,

크롬웰의 시신을 꺼낸 다음 교수대에 매달았다,

그리고 머리를 잘라 찰스 1세를 심판한 웨스터민스터 홀에 걸어놓았다,

 

 

찰스 2세는 망명 시절 프랑스 루이 14세의 비호를 받은 탓에 국가의 대사를 루이 14세의 간섭에

크게 의존했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크롬웰이 스페인에게서 빼앗은 됭게르크를 프랑스에 팔아버리기도 하였다,

유럽 대륙으로 진출하는 유일한 항구를 잃은 후 영국은 대외 무역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1685년

찰스 2세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카톨릭 광신도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1688년

자산 계급과 신귀족은 네덜란드 총독이자 제임스 2세의 사위인 윌리엄을 불러 들여

명예혁명을 통해 왕권신수에서 民授 로의 입헌군주제를 향하게 되었다,

 

 

1683년 윌리엄 3세는 아일랜드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 루이 14세에 대항하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에 가입하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전쟁은 돈을 요구했다 그래서 전비를 조달할 수 있는 은행이 필요했다,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은 120만 파운드의 거금을 빌려주어 유럽 대륙을 상대로 한 전쟁의 지원자가 되었다,

이 돈은 연리 8%의 영원한 채무가 되어 이자에 더한 관리비 4,000 파운드를 합쳐서

매년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했다,

 

민간 자본이 은행으로 유입되어 영국은 수월하게 전쟁을 치룰 수 있었다,

그리고 승리를 거둘 때마다 투자자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었다,

/39-52쪽

 

 

 

 

 

3. 금태환제의 브레튼 우즈 체제 1944년-1971년

몇 몇 금융가, 은행가, 정치가들의 음모에 의해 달러가 패권을 차지한 게 아니다,

음모론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력에 있다.

70년대를 오일쇼크라 배우지만,

거꾸로 보면 달러위기이다,

즉 미국이 전후 최대의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하게 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하여

달러는 신인도를 잃었다,

결국 닉슨은 금 1온스당 35달러라는 브레튼 우즈 협약을 배신하였다,

그러니 달러를 기준으로 한 석유가격이 오를 수 밖에.

 

"1970년대의 달러 평가 절하는 미국 경제쇠퇴의 10년,

또는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10년을 가져왔다."-115쪽

 

1974년 키신저는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협상을 통하여 달러를 석유수출거래의 유일한 대금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128쪽

미국은 금이 아니라 석유를 담보로 자신들의 달러의 생명을 연장한 것이다,

 

미국 경제가 위기의 늪에 처했을 때 일본은 매우 빠른 성장세를 나타냈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장장 18년간 연평균 10% 이상의 놀라운 성잘을 기록했다,

 

하지만 달러의 지속적인 평가절하=일본 엔의 평가절상(환율인하)로 인해

수출 기업들이 심각한 환율 위험에 부딪히자 일본은 무역거래에서 달러를 엔으로 점차 대체하려 했다,

1985년, 일본 외환 심의회는 <엔의 국제화에 관해> 등 일련의 정부 문건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엔의 국제화를 추진했다.

1달러에 360엔 하던 환율이 가장 (엔화의 평가가) 높을 때는 1달러에 80엔까지 내렸다,

당시 세계 10 대 은행 가운데 일본 은행이 여덟 곳이었고,

10대 기업 중에는 대여섯 개를 점유했다,

돈이 넘쳐난 일본은 부동산에서 그림까지 닥치는 대로 미국을 사들였다,

<일본이 세계를 삼키고 있다>는 책을 보았습니다,

록펠러 센터를 팔리고 난 뒤 미국인들의 좌절이 대단하였지요,

 

우리네는 87년 6월 정치민주화와 7월 전국적 파업을 통한 경제민주화이후 3저 호황을 누렸던 때,

지니계수가 0.3밑으로 내려간 살기좋았던 10년. 97년 외환위기까지의 10년,

민주화와 총파업을 해서 경제가 좋아졌군,

정치가 밥먹여 줍니다,

 

 

 1980년대 중반 미일 무역마찰이 불겨졌다,

미국은 일본에 금융보험업 개방과 산업구조조정을 요구하였다,

국내법인 반덤핑에 대한 슈퍼 301조와 지적 소유권에 대한 스페셜 301조를 내세워

국제경제제재로 위협했다,

 

"수차례 무역마찰을 겪는 동안 일본은 결정적인 순간에 늘 양보와 타협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결국 일본 경제의 장기적인 침체 원인이 되고 말았다,"-122쪽

 

중국은 일본을 따라하지 않겠다는 군요,

 

<화폐전쟁>에서 언급했듯

1990년 1월 12일, 미국은 뉴욕 증권시장에서 닛케이 주가지수 풋옵션이라는 신흥금융의 핵무기를 이용해서 일본 도쿄 증시에 대한 원격 비접촉식 전략 공격을 실시했다....결국 일본 경제는 17년이라는 반신불수의 긴 터널에 갇혀 있어야 했다.
ㅡ441/2쪽

 

 "1990년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붕괴함으로써 일본의 경제는 장기간 쇠퇴기에 진입했고,

일본 엔의 국제화도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123쪽

 

반면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간 미국은 역사상 가장 긴 번영기에 진입해

연평균 성장률이 3.4%에 달했다, 이는 일본의 1.1%, EU의 2.0%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인플레율도 3% 이하로 떨어져 안정적인 성장을 실현했다,

미국은 1991년부터 세계 최대 상품 수출국의 왕관을 되찾았고,

2001년에는 전 세계에서 미국 GDP 가 차지하는 비중이 32.5%까지 증가해

경제강국의 패권을 회복했다."-131쪽

 

미국이 유로화의 대두로 인하여 자신들의 달러를 지키기 위하여 벌인 것이 이라크 침공이다,

즉 후세인은 미국의 명령에 따라 이란의 회교혁명을 막기위하여 8년간 전쟁을 벌였던 미국의 충복이었다,

미국 디트로이트시의 명예시민이 바로 후세인,

그리고 그 8년 전쟁이후 이라크의 한 지방이었다가 영국에게 불어 따로 떨어졌던 쿠웨이트에 대하여 미국의 허락을 받아 침공을 하였다,

후세인은 김일성이 1950년 육이오때 미국에 속았던 것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퇴하는 이라크군에 대하여 미국은 철퇴를 날린 것이 페르시아 만 전쟁인데,

이 용어조차 미국은 걸프전이라고 보통 명사를 고유명사화 하였다,

-<이봐, 부시 내나라를 돌려 줘>나 <화씨 911> 마이클 무어에 잘 나옴,

 

잠잠하던 후세인이 이라크의 석유 결제 화폐를 유로로 교체한다고 선언하였기에 미국은 이라크 침공을 하였고, 이란이 또한 유로로 바꾸겠다고 발표하자 이란의 민주화니 뭐니

미국의 용병 이스라엘을 동원한 이란 침공계획이 나왔던 것이다,

-133쪽

 

2001년 이래 미국은 세계 최대 채무국으로 전락하고,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이상에서 1/3수준으로 떨어졌고 대외 무역 비중 역시 60% 이상에서 16%로 크게 감소햇다,

-135쪽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01 일본과 달리 중국은 미국에게 개길 것은 개기는 점에서 일본과 다르다,
    물론 중국이라고 한반도와 짜달시리 이익을 같이한다고 볼 순 없다,
    다만 지난 20세기의 경도된 일방적인 종미 사대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유연하게 중국 카드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 놈의 미친 나라. 즉 한번 대국에게 붙으면 좀체 그 망상에서 헤어나지를 못한 실정이라,
    즉 명나라에 대한 보은을 들어 청나라에게 당하고
    청나라에 대하여 빌붙다가 일본에게 당하고
    일본에게 빌붙다가 미국에게 당하고
    미국에게 당하다가 여태 대안없이 홀딱 벗겨짐을 당해도
    여전히 정신을 챙기지 못하는 골통들이 바로 우리네 보수라는 종자들
  • 작성자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01 내수 촉진 없이 환율을 독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ㅡ209
  • 답댓글 작성자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01 박근혜의 서강학파는 이것을 무시한다.
    박정희가 해왔던 바의 내수희생으로 수출중시,
    이미 박정흰 미국에 의해 제거당했다.
    "2004. 4, 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9년 9월 카터는 공개적으로 박정희를 제거하라고 하였다."

    친일파로 일컬어지는 그 박근혜의 서강학파들의 패러다임은 일본이 미국에게 거덜당하듯
    일본이 미국에게 전쟁으로 진 것처럼 박정희 제거로 이미 졌고
    경제적으로는 일본은 90년, 한국은 97년에 졌다,
    그런 미국에게 기대어 뭣을 하겠다는 것인지?
    즉 미국에의 경도는 저임금을 강요하고 내수시장을 악화시키는 죽음을 강요한다,
    고로 박근혜가 사기치는 민생은 골로 더 간다,

    속지마시라
    악마 미소
  • 작성자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01 유로가 출범한 지 얼마되지 않아 코소보분쟁을 빌미로 세르비아에대한 나토의 공습이 재개되었다. 유로화의 가치는 폭락했다.
    유로의 탄생과 성장에 최대 장애물은 바로 미국
    ㅡ239
  • 작성자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01 97년 미국에게 털릴 때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는
    국제 투기를 이유로 금융규제를 강화해서
    지켰다.
    한국은 미국요구대로 다 넘겼다.
    그런 처지이니 어찌 일러 무삼하리?

    미국놈 따까리
    이중국적자들의 나라
    강남
    개한미국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