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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전쟁, 진실과 미래>

작성자gingery(이용호)| 작성시간12.11.29| 조회수1077| 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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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1949년 부터 1달러=360엔의 고정환율 정책을 실시하여 22년간 지속되었다.
    이것은 일본경제의 엄청난 추진력이 되엇으며
    미국의 철강, 컬러 TV, 반도체, 자동차 등 주요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엔과 달러를 둘러싼 환폐전쟁이 막을 올린 것이다,-160-161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1차 달러위기
    1960년 마샬플랜으로 인한 달러살포로 이하여 금을 구매하는 열풍이 불엇다,
    미국은 금을 투매해 금값을 안정화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2차 위기
    1968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자로 인하여 미국의 황금 보유량이 121억 달러로 떨어지고 단기 외채가 331억 달러에 달하자 시장은 달러를 팔고 금믈 사들였다, 구미 8개국의 gold pool은 대량으로 황금 투매에 나섰다,

    3번째
    1971년 5월, 유럽에서 달러투매 바람이 불자 8월 15일 금태환을 금지하엿다,

    4번째
    1973년 1월 유럽에서 대량의 달러투매가 시작되엇다,
    유럽각국은 자국 화폐와 달러 간의 조정환율제를 취소하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햇다,
    이로써 마침내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브레턴우즈는 완전히 붕괴하였다,/167-170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14년간 이어진 베트남 전쟁의 2,500억 달러의 군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국에서 엄청난 차관을 도입했다,
    전후 가장 부유했던 채권국 미국은 최대 채무국으로 전락하였다,
    국제수지 불균형으로 미국의 대외상환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달러의 유동성 확대를 통해 다른 국가가 보유한 달러의 가치를 하락시킴으로써 자국의 전쟁 비용과 경제위기를 전 세계가 분담하도록 만들었다,
    달러가 끊임없이 평가절하됨에 따라 미국의 최대 무역국 일본이 보유한 달러자산은 휴지가 되었다,
    그래서 대장성은 1978년 엔의 국제화를 도모하였다,
    1985년, 일본 외환 심의회는 <엔의 국제화에 관해> 정식으로 국제화를 추진했다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엔을 사용하면 일본 기업이 다른 화폐로 태환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없앨 수 잇다,
    화폐 태한의 위험성을 다른 국가에 전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익을 얻기 위하여는 엔화를 국제적으로 유포하여야 했다,
    1972년 부터 82년까지 5개 동맹국에 직접 투자한 자금은 101억 6,600만 달러였고,
    1960년 부터 1978년까지 동남아에 제공한 정부 개발 원조 총액은 35억 달러였다,
    1990년 일본의 수입액의 37,5% 수출액의 14.5%를 엔으로 결제했다,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1983년 10월 미국의 도널드 리건 재무장관은 가케시다 노부루 일본 대장성 장관에게 미국의 대일무역적자해소를 위한 일본의 금융시장개방을 요구했다,
    11월 방일한 레이건 대통령에게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미국이 금리를 인하하지 않아 달러의 고평가가 미국의 무역수지적자를 야기했다고 대응했다,
    1985년 9월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간은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의 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을 초청해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엔고 마르크의 평가절상을 합의했다,
    일본은 미국 시장의 폐쇄를 막기위해 순순히 양보했다,
    5개국은 공동으로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투매했다,
    달러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일본내에서는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플라자 합의가 잘못되었다고 입을 모앗다, 엔화가 평가절상되자 수출 기업, 특히 중소기업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카소네와 다케시다는 레이건과 볼커에게 엔이 더 이상 평가절상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미국은 의회의 민주당 보호주의 세력을 핑계대며 거절했다,
    일본의 엔이 평가절상되면서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은 약화되었지만, 엔으로 더 많은 달러를 바꿀 수 있어서(오버 슈팅 효과)일본의 부는 대폭 늘었다,
    미국자산매입열풍이 불었다,
    반면 일본으로서는 1. 원자재 수입가가 떨어져서 일본의 국제경쟁력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2. 당시 일본은 반도체의 핵심 기술를 보유하였에 제품 가격 상승에도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174-186
    이것이 결국 경제에서는 탄력성이 관건임을 증거한다,
    일본은행은 1987년 2월 이후 1989년 5월까지 장장 27개월간 초저이율을 유지했다,
    핫머니의 유입을 완화시킬 순 있었으나 국내적으로 금융 대출이 크게 늘어나는 상황을 촉발했다,
    투자로 이어지지 못한 채 투기가 되어 거품이 터지게 된 것이다,

    일본을 향한 진짜 총알은 금융 시장 전면개방이었다,-191쪽
    1983년 미국 재계가 제출한 <모건 보고서>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바로 일본을 압박해 빠른 시간 안에 금융 시자을 개방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엇다,
    1. 미국이 경쟁력이 있는 금융시장의 개방
    2. 엔화 평가절상을 노려 외환차익을 목표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3. 미국 자본이 버블형성 단계에서 투자를 확대한 다음 버블이 꺼질 때 재빨리 발을 뺌으로써 일본의 기업과 은행을 위험메 빠트리기 위한 것
    이를 "양털깎기"라고 한다,

    1987년 2월 서방 7개국 재무장관은 루브르합의를 맺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초저이율을 실시하도록 압박하였다.
    트로이 목마인 닛케이 주가지수 선물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1986년 싱가포르거래소(SIMEX)에서 닛케이 225주가지수선물이 상장되었다,
    외국 투자자들은 이를 통해 일본에 대한 투자에 대한 헷징이 가능한 데 반하여
    일본 펀드는 국내법으로 선물거래를 금지하고 있어 불리했다,
    1988년 일본도 주가지수선물을 도입했다,
    트로이 목마가 성공한 것이다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1.30 1989년 5월 일본 정부가 긴축정책을 실시한다는 소식에도 닛케이 225지수는 도리어 상승하였다,
    1989년 12월 31일 폐장날 닛케이 지수는 3만 8915 포인트를 기록했다,
    그런데 새해 첫거래가 시작되자 마자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하여
    10월에는 2만 포인트까지 곤두박질쳤다,
    91년 상반기에 잠시 반등했으나 하반기들어 하락세를 거듭하엿다,
    1992년 4월 1일, 1만 7,000포인트까지 떨어졌다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1989년일본이 통화긴축정책을 실시한 후 주가조정기에 미국 기관 투자가들은 대형주를 사들여지수상승을 이끄는한편 선물매도를 하였다.
    선물시장에서 지분을 팔고난뒤 현물을 대량 매도하여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다.
    ㅡ196/7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앞으로 벌고 뒤로 망하는 전형적인 사업.
    갑의 요구에 굽실거리는 을의 신세.
    한데 갑이 을을 완전 벗겨 먹으려고 작정을 하면
    그 갑을 관계조차 박살이 난다,
    이것이 97년 IMF 침공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1997년 경제위기가 동남아를 휩쓸 때, 일본은 자금을 몽땅 회수했고. 그바람에 더욱 위기가 심화되었다.
    동남아는 엔의국제화에 있어 가장중요한 시장이지만 일본은 신뢰를 잃었다.
    ㅡ202/3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당시 한국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데 미국의 클린턴은 일본 독자적으로 한국에 도움을 주는 것을 막았다,
    IMF를 통한 단일한 정책을 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한국은 이미 미국에게 군침도는 먹잇감으로 찍혀서
    한국처럼 미국이라면 찍도 못쓰는 일본은 미국의 명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은 날로 먹혔던 것이다,
    미국에게.
    90년 일본처럼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2008년 금융위기에도 중국은 환율안정을 지켜 신뢰도를 크게 높였다.
    ㅡ204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일본과 달리 중국은 미국에게 개길 것은 개기는 점에서 일본과 다르다,
    물론 중국이라고 한반도와 짜달시리 이익을 같이한다고 볼 순 없다,
    다만 지난 20세기의 경도된 일방적인 종미 사대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유연하게 중국 카드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 놈의 미친 나라. 즉 한번 대국에게 붙으면 좀체 그 망상에서 헤어나지를 못한 실정이라,
    즉 명나라에 대한 보은을 들어 청나라에게 당하고
    청나라에 대하여 빌붙다가 일본에게 당하고
    일본에게 빌붙다가 미국에게 당하고
    미국에게 당하다가 여태 대안없이 홀딱 벗겨짐을 당해도
    여전히 정신을 챙기지 못하는 골통들이 바로 우리네 보수라는 종자들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내수 촉진 없이 환율을 독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ㅡ209
  • 답댓글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박근혜의 서강학파는 이것을 무시한다.
    박정희가 해왔던 바의 내수희생으로 수출중시,
    이미 박정흰 미국에 의해 제거당했다.
    "2004. 4, 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9년 9월 카터는 공개적으로 박정희를 제거하라고 하였다."

    친일파로 일컬어지는 그 박근혜의 서강학파들의 패러다임은 일본이 미국에게 거덜당하듯
    일본이 미국에게 전쟁으로 진 것처럼 박정희 제거로 이미 졌고
    경제적으로는 일본은 90년, 한국은 97년에 졌다,
    그런 미국에게 기대어 뭣을 하겠다는 것인지?
    즉 미국에의 경도는 저임금을 강요하고 내수시장을 악화시키는 죽음을 강요한다,
    고로 박근혜가 사기치는 민생은 골로 더 간다,

    속지마시라
    악마 미소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유로가 출범한 지 얼마되지 않아 코소보분쟁을 빌미로 세르비아에대한 나토의 공습이 재개되었다. 유로화의 가치는 폭락했다.
    유로의 탄생과 성장에 최대 장애물은 바로 미국
    ㅡ239
  • 작성자 gingery(이용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2.12.01 97년 미국에게 털릴 때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는
    국제 투기를 이유로 금융규제를 강화해서
    지켰다.
    한국은 미국요구대로 다 넘겼다.
    그런 처지이니 어찌 일러 무삼하리?

    미국놈 따까리
    이중국적자들의 나라
    강남
    개한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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