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간(同氣間)
임병식 rbs1144@hanmail.net
나는 혈육의 정을 표현한 말 중에서 유독 동기간(同氣間)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말에서 한 핏줄이라는 것이 연상되고 그 속에 따뜻한 정이 흐르고 있어서다. 마치 가마솥에서 막 퍼낸 밥 내음처럼 훈기와 정이 느껴진다,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멀건 국물에 말아 먹는 밥이지만 함께 모여서 이마를 맞대고 먹는 밥은 얼마나 달고 맛있었던가.
그리고 잠자리에서는 눅눅하고 묵직한 솜이불을 함께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면 얼마나 아늑하고 편안했던가. 헤픈 꿈을 꾸다가 흘러내린 침이 이불깃에 묻어 그것이 채 마를 사이도 없이 다시 입술에 갖다 대고 잠을 자도 싫지 않은 게 형제 사이였다.
나에게는 그런 형제자매 중 스무 살을 갓 넘겨 세상을 뜨고만 손위 누나가 있다. 몽매간도 잊지 못하고 잊을 수도 없는 동기간이다. 건강하던 누나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무슨 병고인지도 모른채 숨을 거두고 말었다. 옷가지를 보쌈질 해놓고 다르미질을 했다는데 사망원인이 심장마비인지, 숯불로 인한 일산화탄소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손 쓸 사이도 없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 바람에 가족들은 망연자실해 질수 밖에 없었다. 바로 손아래 동생인 나는 그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열여덟살 나이의 나는 온 세상이 허무하기만 했다. 그런 충격을 이기려고 아니,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나는 사진을 찍듯이 그 안타까움을 사연을 여러 편을 글로 남겼다. 그것이 7,8편이다.
그런데 동단 이후 그간 천 이백여 편의 글을 써왔는데도 내 의식 속에는 누나에 관한 느낌과 안타까움이 아직도 상당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그만큼 내게는 절절하고 안타깝고 사무쳐서 잊지를 못한다.
나는 누나의 죽음에 대해 글을 쓰면서 단 한 번도 가벼운 마음으로 펜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누나를 생각하면 묵직한 슬픔이 밀려와 머릿속을 채워놓은 때문이다. 그래서 평상심을 유지하고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그런 누나의 이야기는 가슴에 바윗돌을 올려놓은 듯 무겁기만 했다. 그런 만큼 작품을 읽어보면 슬픔의 농도가 어느 것이나 임계선상에 닿아서 터트려지지 일보 직전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어떤 절실함의 반영이 아닐까. 적어도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영원히 잊히고 말 것이라는 강박관념. 그것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한다. 다른 형제들이야 피를 이어받은 자손들이 있어 죽은 후라도 기억해 주겠지만, 결혼도 못하고 자식 없이 죽은 누나는 다르지 않는가. 남은 형제들이 죽고 나면 영원히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걸 염려해 딴에는 누나가 세상을 뜨자 네 살 바기 조카에게 잊지 않도록 열심히 입력을 시켰다. 누워있던 고모 모습과 보았던 상여를 잊지 않도록 상기시켰다. 그 덕분에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큰 조카는 기억의 편린을 간직하고 있다. 퍽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고모 얼굴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형제들이 죽고 나면 잊히고 말 것이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해오던 참에 최근에 나는 의미 있는 것을 하나 찾아냈다. 하나도 누나의 시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찾아낸 것이다. 취업차 외국으로 떠난 아우가 맡기고 간 사진첩을 보았더니 누나의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사진은 열여덟 살쯤에 찍은 것으로 영락없는 당시의 시골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휜 저고리에 검정 무명치마. 머리는 뒤로 묶었는데 몸은 옆으로 살짝 틀고 앉은 모습이었다. 앞섶에는 길게 늘어뜨린 옷고름이 매달렸다. 누나는 무척 나비 브로치를 좋아 했는데 그때는 아직 그것이 달려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나가 죽어서 누워있을 때는 작은 노랑 나비 브로치를 달고 떠났다.
‘ 아! 누나.’
사진을 보자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신음 같기도 하고 탄성 같기도 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귀한 사진인가. 오직 딱 한장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 나는 간직하지 못했는데 막내아우가 소중히 간직한 것이었다. 고마운 마음이 와락 들었다. 누나가 비명횡사를 한 당시 내 나이가 스물두살이고 내 열여덟, 아우가 열두 살이었다. 그런 아우에게도 누나는 특별했던가.
나는 사진을 찾은 즉시 이 사실을 네 살 터울의 여동생과 외국에 나가있는 막내아우에게 알렸다. 그러자 며칠 후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누나의 사진을 확대 복사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진을 찾아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외국에 머물고 있는 아우한테서는 “가슴이 아프네요”하는 문자가 날아왔다. 이 이상 무슨 언술이 필요하겠는가. 동기지간이니 아프고 얼굴 매만지고 싶고 보고 싶고 그리운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 저장해 놓았다. 그리고는 한 번씩 꺼내어 바라본다. 저 손으로 나를 얼마나 정성들여 뒷바라지 해주었던가. 학교길이 먼 동생을 위해 새벽밥을 지어주고, 빨래 해주며 맛난 반찬을 만들어 주었던가. 혼자서 되뇌어 본다.
누나는 영혼결혼식을 치러 얼굴도 모르는 매형의 고향에 함께 묻혔다. 그러니 고향집이 헐리고 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부모님과 형님은 이미 타계하여 가슴에 묻고 떠났고 남은 동기의 가슴에만 남겨있을 뿐이다. 그 마저도 남은 형제들이 나중에 죽고 나면 영영 이별하고 말 것이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핸드폰 속 누나의 사진을 보니 순박하게 웃고 있는 표정이 무거운 마음속으로 다가온다. 많은 세월이 흐른 만큼 이제는 마음이 가벼워질 때도 되었건만 그렇지가 않다. 워낙에 당시 사별의 충격이 크게 각인되어서인지 모른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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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청석 임병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5.22 결혼도 못한 상태에서 남긴 형육이 세상을 떠나 형제들이 죽으면 영원히 잊혀질 누나이기에 더욱 가슴이 아린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에 대한 헌신, 통학길이 먼 동생을 위해 새벽밥을 지어주고 옷이며 양말이며 챙겨서 뻘아주던 누나였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뒤늦게 찾은 사진이니만큼 잘 간직허며 생각날때마다 들여다 봐야겠습니다. -
작성자인제 김권섭 작성시간 20.07.22 손 위 누님은 아래 동생에 대하여 사랑함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는 듯 싶습니다. 저도 칠십대 중반이고 누님도 칠십대 후반인데도 불구하고, 저를 지금도 만나면 누님이 어려서 저를 위하는 마음이 예와 똑 같으니 지금도 누님을 뵐 때면 제가 어렸을 때로 돌아 간듯합니다. 이제 황혼이 되었으니 누님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겠는데 누님을 만날 때면 지금도 은혜를 입으니 하나님이 주신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청석님의 누님에 대한 애절한 사연 공감이 가고 심심한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청석님의 순진무구함이 절절이 강물처럼 샘물처럼 촉촉이 젖어듭니다. 좋은 글 잘 읽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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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청석 임병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7.22 누나를 생각하면 세상떠난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가슴이 에입니다. 엘범에서 어렵게 사진을 찾아내어 동생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수만히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때문인지 동생도 처연한 기분을 전해왔습니다.이 누나에 대해서는 아마도 죽는날 까지 잊지 못하고 지낼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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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리산 작성시간 20.08.24 눈물이 납니다. 누나를 보내시고 사무친 그리움이네요. 저도 20여년전에 여동생을 폐암으로 보내고 아직도 눈물샘이 열려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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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청석 임병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8.24 동기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이지요. 젊은 나이에 먼저 간 누나를 생각하면 늘 가슴이 먹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