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명복을 빌며
작년 올해 가까운 친구들이 연이어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저께도 또 한 명이 작별을 고했다.
『백년을 살아보니』, 『숨결이 바람 될 때』,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름다운 마무리』,
『어느 시인의 삶』, 『불멸에 관하여』, 『LIFE』,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
‘삶과 죽음’에 관한 책들이 오늘따라 눈앞에 어른거려 기분이 더욱 우울해진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과연 죽음이란 나쁜 것인가? 그러면 영생은 좋은 것일까? 그래서 약 4년 전
경목카페 건강코너(2014년 10월 23~24일 No. 19, 20)에 올렸던 죽음에 대한 셸리 케이건 교수의
『DEATH』 요약 글을 다시 찾아보았다.
웰빙과 웰다잉을 위한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 강의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죽음은 언급하기 어려운 일종의 터부다. 웰빙(well-being)은 많이
얘기해도 ‘잘 죽어 가기’인 웰다잉(well-dying) 얘기는 꺼려지고 주저 서럽다.
필자는 약 2년 전 안사람이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고 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를 받는 큰 고통을
겪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톱·발톱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읽은 책이 미국 예일대학 셸리 케이건 교수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였다. 내용이
어려워 쉽게 읽혀지지 않았지만 죽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며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정리하며
위로를 받았다. 다행이 지금은 집사람도 건강을 되찾고 생활습관도 많이 바꾸어 옛날보다
더 적극적 삶을 위한 자기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작년 가을 중앙일보(2013. 9. 24. 및 10. 1.)는 셸리 케이건 교수의 저서를 인용하며 “웰다잉이
곧 웰빙”이라는 특집기사를 크게 실었다. 이제 우리는 죽음도 생각해 봐야 할 나이다.
이는 죽음을 위해서라기보다 길지 않은 여생의 값진 삶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감히 셸리 케이건의 저서『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주요 내용을 발췌 요약하여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한편 저자의 뜻을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셸리 케이건 교수의 저서 『DEATH』
1. 죽음은 나쁜 것인가?
사람들은 죽음을 당연히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왜’ 나쁜 걸까? 어떻게 죽음은 우리에게
악이 될 수 있을까? 죽음이 정말로 나쁜 거라면, 반대로 ‘영생’은 좋은 걸일까? 하지만 죽음이
정말로 끝이라고 믿는다면 죽음은 사자(死者)에게는 나쁜 것이 될 수는 없을 듯하다. 내가 없는데
대체 ‘무엇’이 내게 나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죽음은 내게 그 어떤 악도 될 수
없다. 죽음이 나쁜 것은 오직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죽은 자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나쁘며, 사자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슬픈 일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나쁘다고 하는 핵심을 ‘죽은 이’에게 초점을 맞춰서 분석한다면 죽음이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죽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살아있다면 얻을 수
있는 삶의 좋은 모든 것들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을 ‘박탈 이론’이라고도 부른다.
박탈 이론에 따르면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삶의 좋은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탈 이론은 아직 다 옳다고 할 수 없는 부분도 많고, 죽음이 왜 나쁜 지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셸리 케이건) 박탈 이론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접근방식이라고 생각한다.
2. 영생이라는 형벌
삶의 모든 축복을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영생이 아닐까? 박탈 이론을 기반으로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한다면, 영원한 삶은 당연히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박탈 이론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영생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둘째, 모순의 문제를 제쳐두고, 영생은 정말로 좋은 것일까?
먼저 첫 번째 질문을 보자. 삶에서 전체적으로 좋은 것일 때만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삶이 오직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죽음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끝내는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볼 때 박탈 이론을 수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영생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의무는 없다.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우리는 영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수명이 길면 길수록
더 좋은 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소설『걸리버 여행기』
에서 걸리버는 영원히 죽지 않는 나라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정말로 환상적이군요”라고
하였지만, 모두 죽지 않는 삶은 노화와 함께 몸은 허약하고 병들어 환상적인 곳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생이 정녕 이런 것이라면 죽음이 오히려 축복임을 얘기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
몽테뉴(Michel Montaigne) 역시 노년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고통과 괴로움과 비참함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죽음을 축복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바라는 영생은 언제나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으로 영생을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천국에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약속하는
종교들조차 그 세부적인 묘사에 있어서는 놀라우리만치 소극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영생을 구체적인 모양으로 그려놓으면, 영원히 아름다운 영생이 결국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거라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영화 <일곱 가지 유혹(Bedazzled)>은 인간의 이런 심리를 유머러스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이
악마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당신은 왜 신에게 반항을 한 거죠?” 악마가 대답한다. “그 이유를 말해주지.
나는 여기 앉아 있고, 당신은 이제 내 주위를 돌며 춤을 추면서 이렇게 말할 거야. ‘오, 신(악마)이시여.
당신은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답나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이렇게 불평하게 될 걸. ‘아, 너무 지루해요.
뭐 다른 거 없나요?’
내가 바로 그랬다니까.”
<일곱 가지 유혹>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나 기호품이라도 계속 먹거나 소지하면 지겹고 싫증나기 마련이다.
영생의 문제는 결국 지루함이며, 또한 최고 형태의 삶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영원히 갈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의 작가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는 단편 소설 『꿈』에서 바로 그런 형태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반스는 천국을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삶으로부터 충분한 만족감을 얻는다. 그리고 충분한 만족감의 시점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그만둘 수 있다. 누구든 언젠가 그만두기를 원할 때 그만둘 수 있는 삶, 즉 결국 영생은 갈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반스는 얘기하고 있다.
<줄리언 반스>
그러나 영생을 꿈꾸는 현대의 도박꾼들도 있다. 이들 도박꾼들을 보려면 미국 애리조나의 스코츠데일에
있는 이상한 창고를 찾아가야 한다. 그 건물에 들어서면 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 금속용기가 열을 지어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듀어(dewar)라고 불리는 이 용기에는 액체질소가 들어 있고, 그 안에는 인간의 시신
네 구 혹은 인간의 머리 여섯 개가 담겨 있다.
그곳은 ‘알코어 생명연장재단(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의 본부다.
이 재단은 대략 1000 명의 살아 있는 회원과 100 명의 사망한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20만 달러를 지급할
것을 확약하면 이 클럽에 가입할 수 있고, 법적 사망진단이 내려지면 그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 대가로 이 재단은 시신을 섭씨 영하 196도에서 영원히 보관할 것을 약속한다. 머리만 보관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가격은 8만 달러다.
<무한한 미래>라는 28분짜리 홍보 비디오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알코어’의 회원들은
낙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장기적으로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미래 언젠가는 죽은 신체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든 인체 조직을 재생할 수 있어도 기억이 저장된
두뇌만은 어려울 수 있기에 최소 머리만큼은 보관하기를 원한다.
(MIT 승현준 교수의 저서『커넥톰-뇌의 지도』 중에서)
<알코어 생명연장재단과 Dewar>
3. 피할 수 없는 죽음
1) 죽음의 필연성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진실이다.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깨달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선택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슬퍼할 이유가 사라져버린다고 스피노자는 생각했다. 죽음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이를 내면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덜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단편소설『지하생활자의 수기(Notes from Underground)』를 보자. 지하생활자는
‘2×2=4’라는 사실에 기분이 나쁘다. ‘2×2=4’라는 사실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를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
비슷한 맥락에서,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데카르트는 신이 수학적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그건 전지전능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신은 ‘2+2=5’라고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만,
다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이는 죽음을 더 나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슬픈 사실이 내게만 주어진 운명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2) 죽음의 가변성과 예측불가능성
죽음은 분명 필연적인 사실이지만 수명은 저마다 다르다. 이런 가변성은 죽음을 더 나쁜 것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더 좋은 것으로 만드는가? 개인적인 책임을 떠나서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사실은 나쁜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인 불평등을 도덕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본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죽음과 관련된 불평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가변성이 예측불가능성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가변성과 더불어 예측불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그렇다면 예측불가능성은 죽음을 더 좋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나쁘게 만드는가? 자신이 ‘언제’
죽을 것인지 알면 더 좋은 것일까?
내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는지 알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은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알게 된다면, 정말로 원하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될까? 이런 질문에 대해
고민해봄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삶에서 정말로 어떤 것들을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1년 또는 2년의 시간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공부, 여행, 아니면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인가? 이와 관련한 감동적인 사례가 예일대학에서 내가(셰리 케이건) 맡고 있는
‘죽음’ 강의에서 있었다.
몇 년 전 정말로 죽어가는 한 학생이 내 강의를 신청했다. 그 학생은 이미 1학년 때 암 선고를 받은 상태로
기껏해야 몇 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학생은 “남아 있는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죽기 전에 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목표를 세웠다. 그렇게 그 학생은 졸업반
2학기에 죽음에 관한 내 강의를 수강하게 됐다. 그 학생은 영혼과 죽음 이후의 삶이 있는지, 우리 모두
죽을 거라는 사실이 과연 나쁜 것인지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나를 숙연하게 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갑자기 건강이 더 악화되어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시골 고향으로 돌아갔다. 예일대학은
많은 논의 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하고 교무책임자를 그 학생의 고향으로 보냈다.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선택할까?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가? 죽음에 관한 예측불가능성은 죽음을 더 나쁜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더 좋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3) 죽음의 편재성,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죽음의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며, 우리의 삶에 만연해 있다. 등산을 하다가도, 섹스를
하다가도 죽을 수 있다. 스카이다이버들이나 자동차경주의 카 레이서(car raiser), 에베레스트
등반가들은 죽음도 무릅써야 한다. 그런데 막상 스카이다이버에게 물어 보면 이런 대답을 듣게
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너무나 환상적이지요. 그리고 스릴 만점이죠.”
이들에게 죽음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일상생활보다 조금 더 위험
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 말이 옳다면, 죽음의 스릴을 추구하는 사람들에서도 죽음의 편재성은
특별히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죽음의 편재성은 죽음을 그저 배경음악으로 만들어버릴 뿐이기
때문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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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창훈 작성시간 18.08.28 어제(20일)묵촌 박재길이 쏟아지는 빗속에 한줌의 재가되어 안장되는 것을 지켜보며
죽음은, 그리고 삶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어지러웠지요.
마침 만촌의 글은 다시금 죽음의 문제를 생각케 합니다.
죽음은 반드시 나쁜 것인가? 죽지 않는 것이 축복인가?
참으로 난해한 물음입니다.
만촌! 훌륭한 글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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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만촌 전석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8.28 묵촌과 소생은 아들들이 같은 회사에서 근무한 인연이 있어,
서로 평소 남다른 교감이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문상하면서 만감이 교차하며, 셸리 케이건 교수의 저서 생각이 나더군요.
그러나 무거운 주제의 글을 경솔하게 올린 듯하여 송구스럽기도 하네요.
우보! 부디 건강하소서.
우리 나이에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었이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