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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문명

작성자eastno|작성시간09.01.13|조회수234 목록 댓글 20

역사란 인류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시대를 의미하며,

그 기간동안 인류 전체가 한꺼번에 파멸의 위기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

그간 여러 시기와 장소에서 다양한 자연재해가 발생했지만,

과거 5천년 동안 인류 전체가 절멸의 위기와 조우한 적은 한번도 없다.

푸른별 생성후 이런 상태가 한결같이 지속되어 왔을까 ?

5천년이란 시간은 몇백억년인지도 모를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사실 찰나의 순간이다.

유구한 먼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모르는 선조들이 그런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고,

종말론적인 위대한 신화들은 바로 그런시대였던건 아닐까..

신화는 세계 곳곳에 어느 민족이라도 있으며,

5천년내라면 어느민족의 신화에도 적용되는 수상쩍은 코드가 있다.

16세기 안데스지역에 살던 잉카제국의 사람들도

비라코차라는 신화가 있었다.

  

   최초의 고대사람들은 죄를 범해서 대홍수로 창조주에게 멸망당했다.

   대홍수후 창조주는 인간의 형태로 티티카카호수에 나타났다.그는 태양과 달과 별을 창조했고, 인간을 증식 시켰다.

   그의 이름은 비라코차였으며 턱수염을 기른 키가 큰 남자로 발뒤꿈치까지 내려오는 하얀외투에 허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는 위엄있게 생긴 백인으로 눈은 파랬고 모든 언어로 말할수 있었다.

   냉정하고 금욕적이었으며,술에 취하는일과 일부다처제 전쟁을 하지않도록 설교했다.

   다시 제자들과 합류한 비라코차는 육지를 여행하듯 파도위를 걸어서 태평양 저편으로 사라졌다.

 

스페인의 침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해안에 나타났을때,

서로 생소한 전혀 이질적인 문명의 만남은 큰 충돌이 없었다.

전설과 종교적 신앙을 통해서 잉카인들은 비라코차의 생김새에 대한 명확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그들은 턱수염을 기른 하얀색의 에스파냐인들이 해안에 도착 했을때.. 이 대목이 헷갈렸다.

비라코차와 그의 반신반인인 이들의 "비라코차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했다"는 전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 우연의 일치가 피사로에겐 행운이었다.

우수한 잉카군과의 전투에서 전략적, 심리적인 우위를 점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사용한 침략로 라는것도 이상했다.

잉카에는 고도로 발달한 도로망이 두개인데,하나는 해안을 따라 뻗어있고,하나는 안데스 산맥으로 뻗어있다.

전체 24,000km의 이 도로를 그는 대단히 고마운 마음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이 도로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머리털이 적갈색인 백인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고,

잉카인들은 물려받은 유산을 유지,관리하는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을뿐이다.

도로는 적교(매단다리)와,바위를 뚫어서 만든 터널등 근대의 설계와 기술이 사용되었다.

그는 이 의문스러운 도로를 이용해 지구의 배꼽이라는 뜻의,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접수했다.

 

갖은 약탈과 못된짓을 일삼던 침략자들은,

코리칸차 신전위에 잉카의 훌륭한 기초와 벽은 그대로 두고 그위에 스페인풍의 사원을 건립한다.

그들이 건립한 산토 도밍고 사원은 1650과 1950년의 지진으로 다 무너졌다가 그때마다 재건되었는데,

스페인인의 건축은 죄다 무너졌지만 잉카시대의 토대와 벽은 자연재해에도 짱짱히 버텼다.

다각형의 돌블럭을 짜맞추어 놓은 세련된 건축구조 때문이다.

돌블럭 하나를 조사했더니 12각도와 측면이 있었다.

접합부에 얇은 종이 한장을 밀어 넣어 보았지만 다각형의 돌은 이를 거부했다.

 

쿠스코 북쪽에 위치한 사크샤우아만의 고대성채에 사용된, 높이 8.5m의 돌도 심상치가 않다.

이돌덩이 한개의 무게인 360톤이란, 소형자동차 500대의 무게다.

바퀴의 존재를 모른다는 이들이 몇십키로가 떨어진 채석장에서 돌을 운반해 온것도 의문인데,

이리 거대한 돌을 어떻게 들어올려 각각의 돌블럭에 짜맞췄는지..

당혹감을 느낀건 침략자들뿐 아니라,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스페인 귀족과 왕실의 여자사이에서 태어난 16세기의 존경받는 사학자였다. 

  

     너무나 큰 석벽의 돌을 보고 마술을 사용한게 아닌가 싶었다.

   인디오들은 그돌들을 어떻게 절단했고 운반했으며,어떻게 조각했고 들어올렸는지..

   쇠와 강철을 모르는 그들이 바위를 뜷을수 없었을테고, 자르거나 다듬는 일도 불가능 했을것이다.

   마차나 우마차도 그들 세계에는 없었으며, 산길은 매우 가파르고 험했다.

 

그녀가 남긴 기록중 "잉카에 관한 보고서"가 있는데, 그 내용중에..

역사상 잉카제국의 왕이 고대성채를 건설한 선구자의 업적에 도전한 일이 있었다.

거대한 돌 하나를 몇km 떨어진 곳에서 성채에 추가해보는 일이었다.

2만명 이상의 인디오가 산을 넘어 급격한 언덕을 오르내리며 끌어 올렸으나,

어느 낭떠러지 지점에서 사람들 손을 벗어나 아래로 떨어져 3000명을 깔아 뭉갰다.

왕의 호기심이 빚은 이실험은 비록 대참사를 일으켰지만,

명확해진 것은 잉카인들이 그런 대형돌을 다루어본 경험도,기술도 없다는 것이다.

 

페루의 과거에 어떤 문명이 존재했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아주 오래전에, 문명을 전달한 사람들이 바다 저쪽에서 나타나 일을 끝내고

다시 그쪽으로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을뿐이다.

그래서 비라코차라는 뜻은 "바다의 거품"이다.

 

반신반인인 바다의 거품이 안데스 산맥에 그려 놨음직한 예술품도 마찬가지다.

황량한 남페루의 나스카고원은 너무 건조해서 사람이 살수없는 불모의 땅이다.

앞으로도 그러할, 달표면이나 거의 다를바 없는 320km의 광활한 대지에는 비도 거의 오지 않는다.

10년 한번꼴로 30분 정도 안개비가 내릴뿐, 지구상의 가장 건조한 지대다.

뭔가 표현하고 싶고,영원히 보존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있다면, 이곳은 선택된 장소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에 대한 보고서는 없다.

단지 그 주변에 묻혀있던 도기의 파편과 유기체에 대한 방사성 탄소측정이 B.C 350~600년 사이로 나왔다.

그러나 그 공예품들은 이 작품이 갖는 최소한의 시기는 될지언정, 연대 측정에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훗날 사람들이 가져 왔을수도 있기 때문이며,

단지 돌을 제거하면서 드러난 표현이고, 첨가한 재료가 없으니 추측할 방법이 없는 게다.

또 무엇을 위해 그려진 것일까? 여기에도 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가 20세기 초반까지 하늘을 날수 없었다는걸 염두에 둔다면

외계인의 착륙 활주로라는 매혹적인 생각도 그럴법할 얘기지만,

몇백광년의 우주공간을 날아올 우주인이라면 활주로가 필요할만큼 열악한 메카니즘이 아닐터이다.

그림은 화산폭팔시 생긴 검고 작은돌 몇천톤을 제거하여, 원래 바탕인 황색모래와 흙이 드러나게 했을뿐이다.

밝혀진것은 동물이나 새의 그림이, 기하학적 도형그림보다 먼저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기술발전의 법칙과는 반대로 앞쪽이 더 높은 수준이다. 그 사이의 기간이 얼마일까..

학자들은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저 뭉뚱그려서 나스카 문화라고 부른다.

 

시카고의 천문학자 피틀 루거박사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별자리와의 관계를 조사했다.

그 결과 거미그림은 오리온 자리를 지상에 그린것이며,

화살표 표시는 오리온자리의 세개의별이 변천한 기록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거미그림은 "리치눌레이"라는 거미인데, 열대아마존 우림의 오지에서만 사는 희귀종이다.

그 아티스트는 안데스를 넘어 견본을 채집해 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오른쪽다리 끝에 있는 생식기까지 그려져 있을까, 그건 돋보기나 들이대야 보일만큼 작다.

지역적으로도 콘도르 외엔 죄다 어울리지도 않는 그림 뿐이며, 고래나 원숭이는 또 뭔지..

후광이 그려진 사람은 외계인 같아 보이고, 어떤건 8 km의 직선이 있는가하면 섬세한 일필휘지도 있다.

높은곳이 아니라면 작가 자신도 작업진행의 형태를 알수가 없는건,

그림이 너무커서 땅위에서는 전혀 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스카 주변에는 볼만한 높은곳이 하나도 없다.

이 그림에 대한 전모가 밝혀진게 20세기 항공시대 이후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16세기 말에 루이스 몬존이라는 스페인 행정관이 이곳을 여행하던 중,

사막위에 마크같은게 있다는 기록을 하며(그에게는 단지 마크로 보일수 밖에 없다.)

이 마크가 비라코차와 연관있다는 전설을 기록했을 뿐이다..

 

햄콕은 쿠스코에서 서북쪽으로 130km의 거리를 3시간 가량 기차를 탔다.

과거 강릉행 기차를 타면 태백산맥을 넘을때 지그재그로 왔던 길을 오락가락하던 식으로,

마추픽추의 고원도 그렇게 가는 모양이다.왼쪽에는 검은 물의 우루밤바강이 흘렀다.

양쪽선로가 산의 경사면이었고, 빼곡한 녹색 밀림으로 뒤덮인 자연 장애물을 보며

누군가 이 험한 길을 넘어 숨겨질 장소를 원했다면 최소한 하나의 수확은 거둔셈이다.

1911년에야 미국의 탐험가 하이럼 빙험에 의해 알려졌기에, 파괴자 스페인인들로 부터 보호가 되었고

과거의 수수께끼 덩어리가 원형대로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유적 맞은편에는 우아나픽추가 있는데, 놀랍게도 정상 수십미터 아래에 수평으로 깎아,

낭떠러지 가까운 곳에 계단식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건축가는 누군지 상당히 심미안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이쪽은 유령도시의 느낌인데, 거대한 돌블럭은 이곳에도 있었다.

높이6m, 무게200톤 가량의 돌덩이를 고대 건축가들은 어떻게 이 험준한 곳까지 운반했을까..

단순히 15세기 이전에 지어진 것이라는 학계의 정설에,

포츠담 대학의 천문학교수 롤프 뮬러는 설득력있는 증거를 제시했다.

별자리 위치에 의한 수학적 계산결과(세차운동: 이책의 화두다.) 

유적은 기원전 4000~2000년 사이에 완성 되었다는것이다.

주류학자 입장에서는 선뜻 받아들일수 없는 가설이지만,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거대한 다각형의 돌들이 종이한장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벽속에 박혀있는것 처럼,

이 가설은 인류의 과거라는 마지막 퍼즐에 딱 들어 맞는다. 마추픽추의 꿈처럼..

 

볼리비아의 수도 라 파스는 우리나라 대구처럼 분지이지만,

분지도 분지나름, 대구가 300m의 고도라면 라파스는 3000m 이상이다.(백두산이 2774m)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선이 그어져 있는 티티카카 호수는 길이 222km에 폭112km인 의문점이 많은 호수다.

현재는 해발 3000m의 고도에 위치 하지만, 이 호수 주변에는 몇천만의 조개화석이 존재한다.

1억년전으로 추측되는 해저융기가 이 호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랜세월의 흐름에도 이호수에는 민물고기가 아닌 해양생물이 살고 있다.

어부의 그물에는 해마도 잡히니,이 물은 호숫물이 아니라 바닷물인 것이다.

 

지금은 내륙인 티아우아나코에 훌륭한 선착장의 유적이 있는것으로 보아

이 도시가 그 호수와 맞닿은 항구도시였다는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논란은 티아우아나코라는 도시가 언제 건설됐느냐다.

주류학자들은 A.D 500년 이전이 될수 없다고 추정하는데,

라파스대학의 포스난스키교수와 롤프 뮬러교수의 세차운동 계산법으로는 기원전 1만5000년이 된다.

세차운동에 의한 논리적인 증명이었지만,

보수학자들은 건설시기가 태고로 올라가는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무난한 A.D 500년 으로 추정하고 싶어한다.

이에 다른분야의 막강한 과학자들이 나섰다.

한스 루덴도르프(포츠담천문대소장), 프리드리히 베커(바티칸천문대),아르놀드 콜슈터(본 대학교수),롤프 뮬러

전부 박사학위 소지자인 이들이 한팀이 되어 연구조사 3년후 포스난스키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아울러 그 검증은 기원전 1만1천년에 갑자기 이지역에 대자연의 습격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스페인의 정복직후 이곳을 찾아온 초기 여행객들이

이곳 건축물들의 크기와 신비감때문에,

원주민에게 이 거대한 유적이 잉카시대의 것이냐고 물었을때

그들은 답하길,

잉카시대보다 훨씬 전에 지어진 것이며, 조상때부터 전해지는 얘기로는 모든것이 하루밤 새에 생겼다고 했다.

  

   도저히 믿을수 없는 티아우아나코의 건축물에 대하여 서술하지 않을수 없다.

   가장 경이로운것은 돌문인데, 길이가9m 폭 4.5m 두께가 1.8m나 된다.

   하나의 돌인데, 어떤도구와 장치를 사용했는지 상상할수가 없다..

 

이 글 역시 16세기에 베가가 남긴 글이다.

이곳은 도굴이 잦지만 이런유적이 아직 남아 있음은 도둑도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포스난스키는 고대문명의 수도였던 티아우아나코가 궤멸한것은 홍수때문 이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해저생물과 물고기와 인간의 유골이 같은 충적층에서 발견 되었다.

   대혼란의 무질서속에 세공된 돌,농기구,인간과 동물의 유골이 누운채로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그의 견해가 옳다면 재해는 1만2000년도 더됐다.

그후 물이 빠지고 나서도 고원의 문화는 전면적으로 쇠퇴했다.

예전에 발생한 다양한 사건들을 꿰 맞춘다는건 어려운 일이지만 지진과 홍수후 안정된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기후 악화로 결국 그들은 다른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비라코차 사람"들로 전해지는 고도의 문명인들은

고투를 거듭하다 떠났지만 불가사의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누군가가 고지대에서 성장하는 식물과 감자같은 농작물에 대해 놀랄만큼 상세한 분석을 했음이 밝혀졌다.

그들이 일구어논 땅은 한쪽은 낮고, 한쪽은 높은 파도 모양이었는데,

이 기복양식을 이해하게 된건 60년대 이후다. 그러니까 그들의 능력은 근대를 앞서는 것이다.

근래에 고고학자와 농업학자에 의해서 복구된 이땅에 실험적인 재배를 했는데,

가장 생산성이 높은 농장의 세배에 달하는 수확이 있었다고 한다.

강한 서리에도, 파괴적인 가뭄에도 그곳의 작물은 탈이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태고의 문명이 개발한 이 기법은 볼리비아 농촌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세계 몇곳에서 이기술의 응용재배중이다.

 

비라코차의 또다른 유적은 언어다.

이지역의 인디오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이며, 주목할 것은 "인공적 구문법"이다.

그건 자연스레 만들어진 언어로는 범접할수 없는, 정교하고 교묘하게 디자인된 만든말이라는 거다.

볼리비아의 컴퓨터 과학자 로하스는 이언어가,

컴퓨터에서 다른언어의 번역에 사용되는 알고리듬으로 변환될수 있으며,

어떤 언어라도 아이마라어로 교환하면 간단하게 변환이 가능하다고 한다.

 

비라코차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토록 티아우아나코에서 불굴의 노력을 한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고투와 포기 실패를 인정한후 다시 어디로 전설처럼 사라졌을까..

그들의 발자취에 대한 발견은 3200km 북쪽의 멕시코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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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eastno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1.16 ㅋㅋ 새글을 따로 하나 올리시지요..^^ 책마다 저자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죠, 보는 관점이나, 철학에 따라 변수가 있으니까요..라틴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상호보완도 되구요..^^
  • 작성자도담 | 작성시간 09.01.14 ㅎㅎ 또,두분의 지적충돌이 일어나네 그랴~ 한마디로 난 댓글이 더 재미있는 사람,ㅋㅋ
  • 답댓글 작성자eastno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1.15 읽기가 구찮으신감네유..알것슈, 이번 시리즈만 마저 끝내면 절대루 길게 안쓸께유..죄송시럽다는..(요렇게 얘기허믄 좀 미안하겠지? ..켕)
  • 작성자solo | 작성시간 09.01.15 도대체 모르는게 뭐죠~~~~~그저 리스펙토라는~~~^.^
  • 답댓글 작성자eastno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1.15 읽었던 책보구 쓰는건데유, 뭐 ( 아즉 살아계시구먼..난 돌아가신줄 알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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