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세월호나 천안함 침몰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유가족들이 “억장이 무너지고~~”라는 인터뷰를 많이 봤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쓰는 말 가운데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다. 이렇듯 현실이나 TV드라마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억울하고 극심한 슬픔이나 절망 따위로 가슴이 몹시 아프고 화가 치민다’는 표현으로 자기의 가슴팍을 팍팍치며 비통해 하는 소리이다.
그 ‘억장’이 무엇이며 어디가 무너지는 것인지 궁금하다.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니까 가슴이 무너진다는 소리인지 또 다른 무엇이 무너진다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억장(億丈)이란 ‘억장지성(億丈之城)’ 즉 높은 성의 준말로서 중국 진시황이 지은 철옹성을 말한다. 억장은 한 자(尺)가 약 30cm로서 그 열배인 한 장(丈)으로 약 3m이다. 억장은 3억m이니 30만km이다. 지구둘레 약 4만km보다 8배가 길며 달까지 거리인 38만km에 가깝다. 억장이 무너지기 전에 그만한 길이의 뭔가를 쌓아올리는 것부터 불가능하다.
아무리 중국 특유의 과장법이라고는 하나, 이 억장의 표현은 너무 심하다. 그런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높은 성이 무너질 때처럼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억울하고 답답할 때 공들여 높이 쌓아 올린 성이 무너지는 심정이란 것이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선 억장(億丈)을 臆(가슴 억)臟(내장 장)이라고 하기도 한다. 30cm 한 뼘에 불과한 가슴이 무너지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억(億)의 만 배인 조(兆)가 있어도 아직 현대인에게는 억이 가장 많은 수를 상징한다. 지구의 역사가 46억년이니 억 단위가 가장 긴 세월이다. ‘억 소리난다’는 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억을 말한다. 억수로 퍼붓는 비는 빗방울이 억 개나 내리는 비를 말하고, 경상도 말도 무척을 뜻하는 ‘억수로’는 억수(億水)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또 다른 비슷한 말로 “복장이 터진다”란 말이 있다. 여기서 복장(腹臟)은 ‘가슴 한복판’으로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한다. 그러니까 “복장 터질 노릇이다”하며 가슴을 치는 것은 딱 맞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앞으론 억장이 무너진다고 가슴을 칠 일이 아니라, 복장이 터진다하며 가슴을 쳐야 뜻과 행동이 맞아 떨어진다.
노하거나 분할 때 사람들은 ‘부아가 난다(끓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고 한다. 이때의 ‘부아’는 우리 몸에는 오장육부(五臟六腑) 중에 하나인 ‘폐장(허파)’을 다른 말로 ‘부아’라고 한다. 오장은 사람 뱃속에 있는 5가지 생명활동의 중요한 요소 내장으로 간장(肝臟), 심장(心臟), 비장(脾臟), 폐장(肺臟), 신장(腎臟)을 가리킨다. 육부는 뱃속에 있는 6가지 기관으로 소화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담(膽), 위(胃), 대장(大腸), 소장(小腸), 삼초(三焦), 방광(膀胱)을 말한다
근데 의외로 ‘오장육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흥부전’에서 문학적 표현으로 ‘심술보’와 말꼴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오장육보로 쓴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래서 ‘화가 나다’ ‘화가 치밀다’ 따위의 ‘화(火)’를 떠올려 ‘부화’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다.
억장의 말 근원이 가슴인지 혹은 억장지성에서 나온 것인지, 말 뿌리는 달라도 관용구로 쓰이는 뜻은 엇비슷한 것 같다. 오랫동안 공들여서 해온 일이 소용없이 되어버려서 몹시 허무한 심정을 이르고, 견디기 힘들만큼 절망적인 상황일 때 쓰는 표현들이다.
이렇듯 우리는 생명활동과 소화활동의 중요요소인 인체의 장기에 비유하여 비통한 심정과 슬픔을 토로한다. 살다보면 절망적이고 모든 것이 뜻대로 안되고 답답하면 무조건 가슴부터 치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억장이 무너질 일, 복장이 터지는 일, 부아가 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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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태영(중4) 작성시간 21.07.19 하루빨리 건강한 세상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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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임지화(중부5기) 작성시간 21.07.19 '억장, 복장, 부아' 세 단어만 보고 읽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활에서 자주 쓰는 말이지만 그 말을 제대로 알고 적절히 쓰고 있는지는
가끔이라도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설파님의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아무튼 억장이 무너질 일, 복장이 터지는 일, 부아가 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만약에 세상사가 요로콤 순풍에 돛단 듯이~ 매듭없는 실타래처럼 술술 잘 풀린디면~ 아마도 에술가들은 애로사항이 많을 듯합니다만~ ㅋ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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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박호영(설파, 서부5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7.19 네.. 정말 억장,복장,부아 라는 말이 우리 입에서 안나오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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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판원(서부5기) 작성시간 21.07.19 새길수록 오묘하고
재미있는 우리 말과 글귀입니다
설파 박호영 회장님 글
잘 새기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박호영(설파, 서부5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7.20 이번에 호락호락 뉴스레터의 제호를 야송께서 캘리로 훌륭하게 써주셔서 빛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