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소녀와 뒷창락 개울가, 그리고 ......눈물
단발머리 소녀가 있었다.
6.25전쟁 통에 이북에다 세 남매를 떨구고 남으로 밀려 내려온
그녀의 아버지는 다시 육 남매를 풍기에서 생산했다.
오일장에 장바구니 옆에 끼고
소녀의 손을 잡은 어미가 길을 나서면,
구루마위에 수북이 앉은 옆 마실 사내들이
힐끔힐끔 소녀의 어미를 훔쳐봤다.
화들짝 놀랄 만큼 미인이었던 어미는
아버지의 사랑을 끔찍이 받았지만 늘 일에 지쳐있었다.
어미가 사랑했던 수많은 과실수와 화초는
6남매의 주둥이에 밥을 넣어주기 위해
사정없이 잘려 나갔고 그 자리는 베틀이 장악해버렸다.
베틀은 직물을 생산하고
직물은 돈을 만들었지만
극악스러운 비명을 함께 생산한다.
꽃같이 젊은 어미가 베틀에 매달려
한줄한줄 날실과 씨실을 교배하며 천을 짤 때는
그 소리도 철컥, 철컥 느리게 울었지만
매달려 짜지 않아도 되는 자동화가 되어버린 기계 베틀은
모터가 내려지지 않는 한 멈출 수 없는 소음을 내뿜었다.
찰칵찰칵 찰칵찰칵.....철컥철컥 철컥철컥...
소녀는 늘 귀가 아팠다.
피붙이라고는 죄다 삼팔선 너머에 두고 내려온 아비는 도대체 일 밖엔 몰랐다.
소녀는 아비의 입이 열려 열 마디 이상의 말이 나오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칭찬엔 인색하고
야단엔 엄격한 아비가 너무나 무서웠다.
골목 어귀에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어쩌다 마주치는 아비의 친구들은 소녀를 보고 말을 건넨다
"니가 아버지를 똑 닮은 셋째 딸 머시기구나 야~ 야! 안 봐도 니아비 딸인걸 알 갔구나"
소녀는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뒤란을 찾아 하염없이 눈물을 짰다
그 무섭고 볼쌍사납게 입이 나온 아비를 닮았다는 게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그 어린 것이..무얼 알았겠는가?
학교를 가면 어른인 남선생님들이 입가에 미소를 짓는 것이 차라리 이상한 그림이었다
두 번 받는 성적표에 모조리 '수'만 찍혀 있어도 아비는 도대체 웃을 줄 몰랐다.
몰래 용돈을 쥐어 주는 어미의 손길이 따뜻했지만 소녀는 아비의 얼굴만 쳐다봤다.
간절히 칭찬을 바랬지만 아비의 입은 펴지질 않았다.
그 와중에도
기계 소리는 철컥철컥 비명을 멈추질 않았다.
소녀는 간절히 봄을 기다린다.
뒷창락 얼음 밑 냇물이 햇살의 구애를 견딜 수 없어 지 속살을 뿜어 터뜨리길 기다린다.
하교길 목덜미에 끈적이는 땀방울이 맺힐 때면
소녀의 발길이 바빠지고, 숨이 가빠진다.
가방을 집어 던지고 방마다 빨랫감을 미친 듯이 찾아 대야에 주워 담으며
드디어, 집을 나갈 궁리를 찾은 것에 환호한다.
엄마야~ 나 뒷창락 간다아!!!
빨래하러 간다아~~
공부 잘하는 것 보다 일 잘하는 것을 좋아했던 아비도
소녀의 빨래를 칭찬했다.
아~ 뒷창락!!
밤낮으로 키 작은 졸개들이 수천 명 뒤엉켜
칼과 창으로 전쟁을 하고 있는 듯한 베틀 소리를,
순식간에 지워 버리는 소녀의 무릉도원.
탱글탱글한 버들 강아지 지천에 거느리고
수천 명 졸개처럼 매끈매끈한 바윗돌 확! 뿌려 놓은 뒤
감로수처럼 투명한 물줄기 뽀얀 돌멩이 사이를 한없이 간지럽히면,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물가소리
졸졸 졸졸...찰찰 찰찰..차르륵차르륵...
넓은 바위 찾아
팔다리 쫙 펴고 누워 전신에 햇살 쪼이기를 하면
소녀의 온몸을 물들이는 봄 냄새.
이쪽으로 고갯짓 저쪽으로 고갯짓 해도
무릉도원엔 사람도 없고, 베틀소리도 없고, 무서운 아비도 없고...
오직,
물소리와 바람소리
풀 향기와 햇살내음..
까르륵~~
단발머리 소녀의 웃음소리.
빨랫감을 담는 그릇이 점점 커진다.
세수대야에서 커다란 고무다라.
삐쩍 마른 소녀가 휘청휘청 이고 가기엔 위험해 보여도
뒷창락 가는 발길을 막을 수가 없다
여름이니,, 소녀는 신명이 뻗친다.
뜨거운 태양은 풍기의 사과나무를 휘어지게 했다
아이 주먹만한 사과 알은 포도송이처럼 달라 붙어
붉은 빛깔 물들이기에 정신이 없고
아스팔트 없는 길바닥엔 펄러덕펄러덕 먼지가 춤을 춘다.
여름을 맞은 뒷창락은 분주하다
알 품은 송사리, 멱감는 아이들 고무신에 담겨질까 혼쭐나게 도망 다니고
아낙네 빨랫방망이 물소리에 장단치고
발가벗은 사내아이들 한번씩 뿌~하며 지나가는 기차 꽁무니에 넋을 잃어버렸다가
빈 철뚝길이 시야에 잡히면 와르르 물속으로 자빠진다.
소녀는 마음이 급하다
그 많은 빨래를 다 씻어 돌멩이에 널어 말리고 개켜가야 무게가 줄기 때문이다.
고사리 같은 그 손으로 어찌 그렇게 많은 빨래를 해댔는가?
그러고도 빨래 한번 안하고 산 손들보다 여즉 고우니
분명 뒷창락의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천성으로 물을 좋아하는 소녀는
빨래를 마치고 멱을 감는다.
수영 법을 모르니 개헤엄이고 잠수질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온몸에 소름이 바슬바슬 돋을 때까지 끈질긴 자맥질.
소녀의 몸뚱아리를 빈틈없이 어루만지는 그 보드라운 물살의 촉감이 미치도록 좋았다.
파릇이 언 몸을 녹이러 큰 바위에 올라가면
햇볕에 달구어진 바윗돌의 열기가 소녀의 궁뎅이를 화들짝 놀라게 한다.
사타구니를 타고 서서히 온몸을 덥혀주는 그 따스함.. 여름이 소녀를 달구었다.
이쯤에서 멈추어야 하는데, 멈출 수가 없다
잠을 자야 하는데, 뒷창락의 기억이 잠을 지우라 한다.
더 늦기 전에 그의 부름에 또다시 기억을 헤집는다.
소녀 집은 공장 집이고
공장엔 항상 언니들이 많다.
삼가동에서 자취를 하며 베짜던 모모 언니
동생 공부시키기 위해 학교를 포기하고 돈 벌러 온 모모 언니 등등..
진종일 서서 녹초가 되도록 기계를 돌리다가 여름 밤이 되면 잠깐 모터를 멈춘다.
야간 물놀이를 가기 위해서이다.
사람들 왕래가 많던 남원다리는 금물.
후레쉬를 앞세우고 으슥한 뒷창락으로 간다.
언니들 손에 잡혀 소녀도 간다. 마다할 일이 없다
미리 봐 두었던 곳으로 꽃 같은 처자들이 어둠 속에서 멱을 감으면
뒷창락 쓸쓸히 하늘 지키던 달님이 헤 벌쭉 미소를 짓는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에 언니들의 속살은 왜 그리 희고 고왔던가?
탱탱한 젖가슴에 내 손이 가면 쑥스러워 몸을 감으면서도
만지게 해주던 꽃님이 달님이 처자들.
엉덩이 반쯤 물에 담 구어 물싸움에 숨 넘어가게 웃어대면 밤벌레 후다닥 놀라 뛰고
오는 길에 뽀사시한 미소가 어찌 그리 싱그럽던가.
모두들 누구의 각시가 되어 한 세월을 살고 있나..
우연히 라도 만나면 불혹의 나이 되어 나타난
그 소녀의 등을 쓸어줄 고운 사람들..그립다.
앞마당까지 침범한 공장이
마지막 남은 감나무 두 그루만 남기고 호도나무,
포도넝쿨까지 쓸어 버릴 때쯤
소녀는 사춘기가 되면서 더 이상 물놀이를 하지 않았다
봉긋히 솟아나는 젖가슴처럼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솟아나자
옷을 훌훌 벗어 던지는 물놀이 대신 목욕탕을 찾았고
그 안에서도 수많은 처자들 속살을 봤지만
아름다움에 가슴이 울렁거리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마지막으로 뒷창락은 기억 속에서 잊혀졌고
비명 같은 공장소리에서도 탈출해 버렸다
무서운 아비는 소녀가 처녀가 되면서 더 이상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 였고
오히려 안쓰럽고 가여운 삶의 주인공으로 변해졌다.
그러나, 어릴 때 잃은 아버지의 사랑은
나이가 들어 되찾을 수 있게 되진 않았다.
자상한 남자의 미소에 한없이 목마른 것이 그 증거리라..
소녀가 서른 예닐곱 되던 해 인가.
불현듯 생각난 뒷창락에 조급증이 일어 새벽녘에 차를 몰고 고향을 찾아 갔다
삽으로 살포시 퍼진 채로 멀리 집어 던져진 것처럼
집과 공장과 모든 것을 잃은 뒤였다.
무엇이 그녀를 그 곳으로 가게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먼저 참담하게 잘려져 간 그녀의 옛집을 보고, 뒷창락으로 갔다.
..............
허물어진 뒷창락 다리에서 ...그녀는 그만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산천이 의구하다 고 어떤 위인이 말을 했든 가..
소녀가, 도시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을 때,
뒷창락도 병을 앓고 있었다
황량한 돌무더기 속에 겨우 숨 줄기를 트고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가느다란 물줄기..
옛추억의 무릉도원은 가르릉 가르릉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송사리도, 돌로 막아놓은 빨래터도, 햇살 받아 윤기 나는 바위도
모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옛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뿌연 돌무더기 사이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침 햇살에 글썽이는 눈동자로 뒷창락 다리를 바라보니
그 무서웠던 아비가 서 있다.
작은 몸뚱아리로 휘청거리며 빨래 통을 이고 가는 막내 딸이 염려되셨나..
노을이 깔려도 돌아오지 않는 소녀를 찾기 위해
자전거를 싣고 저 다리에서 나를 찾던 아버지..
묵묵히 내려와 빨래다라를 들고 가면서 이렇게 말했던가.
"앞으론 좀 적게 들고 오라우, 알간?"
그 한마디에 집으로 돌아 오는 어린 소녀의 가슴엔
기쁨이 눈물처럼 넘쳤던가..
그랬던 그 아비가 서서
나이든 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후로 몇 년인가
그녀는 참담한 고향의 추억만 떠올리며 비껴가기 바빴다.
아름다운 유년의 어미 젖 줄기 같은 고향 속살은 외면한 체
허물어진 모습에 절망하고 외면했다.
어느 날,
끊임없이 길을 걷고 살면서
길을 찾아 가고 살면서
정작 길을 잃어버리고 있진 않은가.. 라는 생각에 뒤돌아 보니.
내 삶의 모든 에너지가 고향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았다.
늦었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왜
그때 그곳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았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내게,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아름다운 유년의 무릉도원 그 뒷창락만이 해답을 알고 있을 거 같다..
뒷창락!
네 현재의 모습이 어떻든
난 널 잊을 수가 없구나
내 안의 그 단발머리 소녀를 품고 안아주었듯
영원히 날 품어 줄 보석 같은 친구야
널 사랑한다!!
2009.3.19. 이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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