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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논평](2012년 7월 24일) 생물학적 인간학이란 무엇인가?

작성자아이온|작성시간12.07.25|조회수1,095 목록 댓글 16

우리 인간은 “자연의 제왕”인가? 인간은 오히려 동물에 비해서 생물학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여타 동물과 비교할 때 인간처럼 생존에 불리하게 태어난 존재가 어디 있는가? 스스로 생존하기까지 유달리 긴 성장기를 거쳐야 하는 것도 인간이 떠안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우리 인간은 충동구조의 불안전성으로 인해 행위과정에서 평생 혼란스럽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러한 인류의 운명을 가장 우려한 철학자가 20세기 비판사회학과 현상학적 인간학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던 독일의 아르놀트 겔렌이다.

 

겔렌은 무엇보다 우리 인간을 “결핍된 존재(Mängelwesen)” 또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동물(das noch nicht festgestellte Tier)”(Gehlen. 1962, 83)로 규정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결핍을 생존의 수단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가 자신의 연구를 지향적인 ‘실천’으로부터 시작하고 인간을 추상적이고 성찰적인 의식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을 경계한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자신의 최고 역작 『인간 Der Mensch』(1940)을 펴내기 전의 한 논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주어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분석의 출발점은 사고하는 성숙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환경, 어떤 조건에서 살고 있는가?’ 이다. 상황이란 내가 나 자신을 우연한 결정들을 가지고 발견하는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입장이다. …… 사상가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상황에 대한 이러한 분석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는 철학적 ‘인간학’ 즉 ‘제1철학(prima philosophia)’이라 할 수 있다(Gehlen, 1935: 272).

 

겔렌의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분석은 최근까지 이루어진 굵직한 생물적 발견을 반영하고 가장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서구에서 “인간학”이라는 학문 분야는 그 의미의 과잉으로 다소 진부한 면이 없지 않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게 다가오는 인간학(anthropology)이라는 용어는 사실 1596년경 문헌에 책 제목으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인간학 프로젝트는 18세기 말경에야 비로소 광범위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학문으로서 인간학은 데카르트에서 비롯해 칸트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운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경험적인 의미의 인간에 대한 학문이 식물학, 생물학과 나란히 인간에 대한 제3의 생물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편 영미권에서는 인간학적 관심이 “문화인류학”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철학의 영역에서 인간학은 첫째, 소크라테스적인 “너 자신을 알라”에서 초월 철학자들의 초월론적 주관성으로까지 인간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철학사를 다시 써내려가려는 “형이상학적 인간학”으로, 둘째, 20세기초반 독일에서 막스 셸러, 플레스너, 겔렌, 리트(T. Litt)를 중심으로 태동했던 “현상학적 인간학”으로, 셋째, 형이상학적 인간학에 내재해있는 인간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서 “비판적 인간학”으로 발전하였다. 비판적 인간학에서는 주로 철학의 중심을 인간에 맞추고 있는 성찰 이면에 깔린 이해관계를 파헤침으로써 서구적인 사고 안에서 인간에 대한 개념을 비판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인간학이나 비판적인 인간학 양쪽 다 ‘사변적인’ 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현상학적 인간학은 ‘비사변적인(non-speculative)’ 철학적 인간학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얼마 전에 작고한 프랑스 철학자 리쾨르(Paul Ricoeur)는 “의심의 대가들”(masters of suspicion)이라 불렀던 비판적 인간학을 대표했던 사상가로 맑스, 니체, 프로이트, 『일차원적 인간』의 마르쿠제 등을 꼽는다.

 

제3의 철학적 인간학의 방식으로서 현상학적 인간학은 무엇보다 인간의 이미지를 포괄적인 존재론에 근거 짓는 대신에 무엇으로도 환원불가능한 지향성의 작용 측면으로부터 이해하고자 한다. 즉 인간의 지향작용은 단순히 정신활동이 아니라 외적 인상에 대한 인간의 자각적 정향(Sichrichten)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중요한 본질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현실관계를 괄호 치고 있는 현상학은 과학자의 인간도,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인간도 배제한다. 겔렌 스스로 자신을 현상학자라 부르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지향성의 현상학에 의존하는 인간 탐색을 그 목표로 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언어를 통해서 표현된 인간의 자각적 정향이 곧 모든 사고의 역동적인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Gehlen, 1962: 201). 그래서 그는 현상학의 초월론적 입장과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자했고 가능하면 경험적이고 반존재론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전반적으로 그가 표방하는 생물학적-철학적 인간학은 기존의 기계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환원론과 이원론에 입각한 인간에 대한 해석을 거부하고, 인간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궁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1920년대 독일에서 막스 셸러(Max Scheler)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철학 운동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셸러는 ‘합리적인 동물’로서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니체, 프로이트 등의 이른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부정적인 이론들’ 사이를 중재하고자 하였다. 그는 정신(Geist)을 우위에 두는 전통을 인정하면서도 정신 자체는 무력해 그러한 영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물적-심리적 하위구조를 필요로 한다는 정신의 단계도식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겔렌은 “형이상학적 입장 표명을 필요로 하는 ‘정신’이라는 주제와 셸러의 핵심적인 통찰인 단계도식을 문제 삼는다. 먼저 셸러가 제시하고 있는 정신의 단계도식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겔렌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셸러가 주장하는 단계도식의 제1단계는 베르그송의 “생의 약동(élan vital)”에서 비롯된 생의 충동 또는 본능이다. 이러한 본능은 대상과 무관하게 쾌락을 지향하고 불쾌를 꺼리는 데서 발생한다. 생 본능의 주요 기능은 다른 단계들에 에너지를 제공하며 일종의 탈자적(ecstatic) 감정에 의해 작동한다. 그래서 이 단계는 어떠한 목적론도 용인하지 않는다.

 

제2단계는 현상학적 주위세계(Umwelt)로부터 비롯된 본능적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모든 강도의 심리적 삶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자율적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본능은 주위세계와 매여 있는 것으로서 믿을만하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의 충동과 본능은 다분히 자신의 목적론적 직접성을 상실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제3단계는 파블로프식의 연상적 기억이다. 이는 훈육을 통한 습관 형성의 단계로서 재생산과 조건반사의 현상을 대변한다. 인간에게서는 이러한 연상적 기억이 전통을 수립하도록 한다. 제4단계는 볼프강 쾰러(Wolfgang Köhler; 1887-1965)의 침팬지 실험에서 비롯된 실천적 지능이다. 그는 자신의 실험을 통해서 유인원 또한 새로운 상황에 대한 여러 통찰을 보여주는 지능, 그것도 창조적인 지능을 소유하고 있어(Gehlen, 1962: 149) 그들이 행하는 거의 모든 행동은 단순한 재생산이나 모방이 아니라 생산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쾰러는 침팬지의 ‘응시(Blicken)’ 기능을 통해서 자신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러한 기능은 단순히 고등동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포식동물이나 수목동물에게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쾰러는 낯선 공간에서 시각적으로 스스로를 정향 짓지 않으려는 유일한 동물로 개를 꼽는다. 더욱이 쾰러는 침팬지가 과일을 따기 위해서 막대기를 사용하고 긴 옷이나 철사조각 등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목한다. 그는 이러한 능력이 개념형성을 위한 물리적-감각적 선결조건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침팬지와 인간의 궁극적인 차이는 침팬지가 사물에 대한 고정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높은 곳에 있는 먹이를 얻기 위해 전체적으로 안정된 조형물의 형태를 갖추지는 못하더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침팬지는 사물들을 조작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조작했던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기대를 되살려내지는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단계에서 새롭고 중요한 것은 행위 가운데에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될 것이다. 이러한 능력으로부터 인간과 동물에게 ‘기술’이라 하는 것이 발생한다. 양자는 본능이 아니라 (인과성과 효율성)의 지성을 소유하고 있어 개개인의 수행능력과 지배에 대한 지식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 단계는 이전의 모든 단계를 부정할 수 있는 정신으로 집약된다. 인간은 자신의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상태를 대상화할 수 있으며, 그 점에 있어서 인간은 동물과 다르며 나아가서 생존의 법칙도 부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적 작용의 주체로서 인간은 가치의 객관성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인 이념화, 스스로 어떤 환경과의 연관성도 초월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개방성, 정신을 수단으로 자신의 생에 대해 금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억압 및 저차원적 존재영역의 에너지가 고차원적 존재형식에 이용될 수 있다는 승화(sublimation)의 기능 등을 소유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현상학적 인간학의 문제는 동물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자연의 등급에 있으며, 그 최상급이 정신이라는 형이상학적 인간학의 공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서 겔렌은 셸러의 본능, 습관, 실천적 지능, 인간 지성의 단계도식(Stufenschema)이 매우 일반적인 편견이자 기만적인 질서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어쨌든 셸러의 이론은 ‘위계도식’이라는 아주 일반적인 편견을 숨기고 있다. 이러한 도식은 본능, 습관, 실천지능 그리고 인간지성의 단계로 구성된다. 이 위계는 기만적이어서 신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질서에는 다음 두 가지의 가능성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동물이 이미 가지고 있는 실천지능과 인간지성 사이에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동물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지속적인 이행이 있을 뿐이라서 인간은 다만 더 큰 집중력, 세련정도, 또는 동물적인 ‘속성들’의 복잡성 증대에 의해서 정의된다. 이것이야말로 전적으로 고전적 진화론이 정의하는 바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양자의 차이 및 인간의 본질을 다만 ‘지능’이라는 특수한 속성, 즉 ‘정신’이라는 특수한 질(Qualität)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정신이 실천지능까지의 모든 기능과 서로 대비되어야 할 것이고, …… 그럼으로써 정신은 탈자연화(denaturiert)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신’이 생명의 외적인 것 혹은 초생명적인 것이라는 (셸러-클라게스의) 주장은 새롭게 기여한 바가 전혀 없고, 인간이 특정한 강제 도식에 매여 있기 때문에 다만 지금껏 우리가 생각해왔던 방식을 분명히 해줄 뿐이다(Gehlen, 1962: 22f.).

 

인간이라는 특정한 지위를 중시하는 셸러의 위계도식을 논박함으로써 겔렌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점진적인 분화만이 존재한다거나 인간의 정신을 통해서만이 그 양자가 구별된다는 주장을 배제한다. 무엇보다 이 도식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규정되지 않은 본질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우에 정신이 동물적인 전제들을 통해서 발생하는지의 여부를 밝혀낼 수 없게 한다. 특히 그는 인간이 “자연에 반하여(gegennatürlich),”(Gehlen. 1962: 23) 정신을 통해서만 규정되는 것을 경계한다. 인간을 적절히 규정하기 위해서 오히려 “인간의 신체적 조건”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인간은 특수한 환경에 대한 동물 특유의 적응능력을 일찍이 포기한 존재이다. 인간의 경우 신체적 전문성이 부족하고 하나의 유기체로서도 매우 취약하기 짝이 없으며 진실한 본능과도 거리가 먼 반면에, 동물의 경우 신체기관의 전문성이 확실하고 여러 특별한 본능을 타고났으며 환경에 대한 결속력이 서로 끈끈하게 얽혀있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주어진 생물학적 소질만으로 직접적이고 야생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인간과 동물의 생물학적 차이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을 주로 이성이나 정신에 의거해서 규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전적으로 “괴물적(monströse)”(Gehlen. 1962: 36)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존재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 여기에 생물학적 문제가 걸려있다. 이에 대한 겔렌의 대답은 확고하다. 유기체로 파악된 인간 존재는 오직 행위를 하는 존재로서만이 살아갈 수 있다. 미국의 퍼스, 듀이, 제임스의 실용주의 전통과 셸러의 ‘세계 개방성’ 논의에 밝은 겔렌에게 원초적인 의미의 행위는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따라 변경시키는 활동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겔렌의 근본주장은 “자연적 조건에서 생존에 매우 저해가 되는 인간구성의 모든 결핍적 요소가 인간 자신의 주도권과 행위를 통해서 오히려 생존수단이 된다. 이야말로 행위를 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특징과 세계 내에서 인간 고유의 입지를 위한 토대이다”(Gehlen. 1962: 36). 요컨대 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이행에 적용될 수 있는 법칙은 신체적인 이행으로부터 정신적인 이행에 이르기까지 올곧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겔렌은 과학적 인간학의 결과물들을 취합해 자신의 철학에 어떤 경험적인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그의 철학은 한 마디로 “철학적 생물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에 대한 그의 생물학적 고찰이 인간의 동물성(physis)과 침팬지의 동물성을 비교하고자 하는 그런 류의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겔렌은 자신의 ‘생물학’ 개념을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다. 예컨대 그는 인간의 의식, 상상력, 언어가 신체적 과정으로부터 파생하거나 예술, 종교, 법률이 단지 유기체적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생물학적” 접근 상상력, 언어, 사고 등과 같은 인간의 상위지능의 과정을 근본적으로 음미하려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Gehlen. 1962: 18).

 

겔렌의 철학적 생물학의 핵심 질문은 “모든 동물과 본질적으로 비교 불가능한 존재가 어떻게 생존 가능한 것인가?”에 있다(Gehlen. 1962: 36). 이는 본질적으로 궁핍하고 취약하며 위험에 노출된 존재가 여하히 존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러한 질문은 역설적으로 살아 존재하는 과제(Aufgabe)로서 인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인간에 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석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또는 자기와 더불어 어떤 과제를 발견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경험적 자료를 동원한 과학적인 인간학은 오늘날 미국식의 인류학을 의미하고 있지만 독일에서 이 인간학은 주로 인간의 생물학-형태학적 토대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여기서 ‘과학적’이라 함은 주로 겔렌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를 말한다.

 

우리는 겔렌의 생물학적 인간학을 사고체계나 어떤 종교에 통합되는 것과 같은 인간관이나 세계관을 다루는 이데올로기적 인간학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구방식으로 기독교적 인간학, 실존주의적 인간학 또는 맑스적 인간학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인간학은 칸트의 인간본질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에서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철학적 인간학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모든 철학 그리고 앞으로 나타날 어떤 철학도 사실은 인간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에 생물학적 접근방식을 최초로 활용한 철학자는 플레스너(Helmut Plessner)였다. 그는 식물, 동물,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동물은 그 중심으로서가 아니라 중심으로부터 살아가는 반면에 인간은 자기 입장에 대한 중심을 견지하며 살아간다. 즉 인간은 자기 몸과 중심 사이의 거리에 의거해 생존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자기준거적 체계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를 경험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에서 간단히 살펴보았던 셸러에게 있어 포괄적 범주가 ‘정신’이었다면, 플레스너의 범주는 탈중심성(excentricity)인 셈이다. 즉 동물이 중심을 그 자체 내에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자기-중심적이지 않다. 인간에게서 탈중심성이 의미하는 인간은 세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세계로부터 물러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탈중심 개념을 통해서 플레스너는 생물학적 연구의 사회적 함의를 밝혀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겔렌과 달리 생물학적 연구로부터 제도의 이론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철학과 생물학을 동시에 전공한 겔렌에게서 모든 고차원적인 정신적 삶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생물학적 인간학에 필수적인 지도체계로 드러난다. 그는 인간의 삶을 어떤 배후세계(Hinterwelt)의 형이상학을 통해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궁극적인 무엇에 입각해 더 생물학적인 정향을 가지고 이해하고자 한다.

 

하지만 겔렌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과 동물이 동일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무엇보다 인간을 모든 살아있는 존재 가운데에 가장 내버려진 존재로 이해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동물은 전문화되고 생존할 수 있는 특수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전문화 기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결국 겔렌은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의 특성이 무엇보다 “허점과 결핍(Lücke und Mängeln)”으로부터 비롯한다고 해석한다(Gehlen. 1962: 83). 갓 태어난 아이가 같은 급의 동물에서와 달리 어떤 표상도 지어내지 못하고 소리를 통해서 자신의 충동을 표현하지도 못하는 것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그 형태적 구조의 측면에서 생물학적으로 생존에 가장 부적격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연의 버려진 고아”(83)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생물학적 고찰과 형태학적 관점에서 그는 인간의 생활양식에 대한 학을 발견한다.

 

즉 인간은 형태학적으로 여타의 다른 고등동물과 반대로 무엇보다도 결핍에 의해서 규정되는데, 이 결핍은 엄밀한 생물학적 의미에서 부적합성, 비전문화, 원시성, 즉 미개화(未開化)로 표기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소극적이다. 인간은 자연적 풍우를 막아줄 모발이 부족하며, 공격을 위한 자연적인 신체 기능을 결(缺)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피를 위한 적절한 신체구조도 갖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동물 감각의 민감성은 인간을 능가한다. 인간은 실제로 생존에 위협받을 만큼 본능을 결하고 있다. 그리고 전(全) 유아기와 아동기 동안 다른 동물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장기간 보호를 받아야 한다(Gehlen. 1962: 33).

 

위에서 겔렌이 제기하고 있는 인간 신체의 원시성은 첫째, 인간은 여타 동물과 비교할 때 육체적 결함으로 인해 생존에 불리하게 태어난다는 점, 둘째, 스스로 생존하기까지에는 긴 성장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 인간의 생존을 위한 행위시 충동구조의 불안전함은 자발적 판단에 부담(Belastung)의 생리상태를 갖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동물처럼 어떤 제한된 환경 조건에 맞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생물학적 형태 안에서 개방적이며 유동적인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보았던 것처럼, 겔렌에게 있어서 인간학의 과학성은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 즉 “인간-생물학(Anthropo-biologie)”을 통해서 가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자신의 인간학을 제3의 생물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연의 기획(Naturentwurf)”의 측면에서 행위자인 인간은 결코 형이상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결정될 수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이는 곧 인간에 대한 실존 조건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을 비교할 때 인간은 분명 동물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이다. 겔렌에 따르면,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본질을 사회적으로 결정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바뀌어왔던 자연에 토대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간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은 사회적이다.

 

육체의 유기체적 구조가 갖고 있는 결핍현상으로 인해 자유로운 자연 속에 적응할 수 없는 인간은 한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부담”이자 “고통”이다. 이와 같은 인간이 자연적 조건을 바꾸어가는 일을 우리는 “학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겔렌에 따르면,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의식하며 어떤 인위적인 자연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곧 문화이다. 문화는 개인에게 있어서 배움을 통해서 체험되며 생활세계이자 절대 환경이 된다. 겔렌은 이 문화를 인공적 환경이자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제2의 자연”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결핍된 존재로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현재 처한 상태에 맞추어가며 열린 가운데에서 자신의 본질을 결정하게 되는지를 정치적으로 더욱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생존에 적합한 구성요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동물의 생존방식에 적합하지도 않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생존을 관리해온 방식은 필연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제도화 과정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에 대한 논의 또한 우리 개개인이 생물학적, 감정적 그리고 인지적인 견지에서 불완전함을 강조하는 데서 시작한다. 특히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은 통제 불가능한 충동에 따라 행동할 때 자칫 빗나가게 되어있어 각자 주관적인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요구하게 된다고 본다. 20세기 들어 가장 논쟁적이고 독창적인 보수주의 이론을 제시했다고 평가를 받는 독일의 아르놀트 겔렌(Arnold Gehlen; 1904-76)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겔렌의 생물학적 인간학의 입장에 준해서 우리 인간이 “자연의 제왕”이라기보다는 “결핍의 존재”임을 살펴보았다. 결핍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겔렌의 논의는 원래 18세기 독일철학자 헤르더(Johann G. Herder)의 통찰이다. 그는 헤르더의 인간학과 여러 현대 생물학의 발견을 접맥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겔렌의 철학적 기여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확고한 본능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인간이 특정한 환경에만 적응할 수 있는 여타 동물과 달리 세계에 개방적일(weltoffen) 필요가 있음을 상세히 기술해 낸데 있다. 그는 이러한 세계개방성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미완성적인 인간본성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자유, 창조성, 발전능력을 확보할 수 있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술시대에서 여전히 열려있는 세계에서조차 인간을 당혹스럽고 불안정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늘 대면하게 되는 자극과 정보의 홍수라 할 수 있다. 모든 자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자극의 과잉으로 인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에 기초한 제도이다. 겔렌에게 있어 결혼, 재산, 법, 국가, 종교와 같은 사회적 제도는 각자 삶의 방향성과 지침을 제공하고 생존에 따르는 모든 부담을 덜어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생존을 위해서 인간은 늘 미래지향적으로 자연을 변형시켜야 하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숙달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밖에서 자연을 변형시켜 제2의 자연, 즉 인간세계를 구축해가야 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실용적이며 행동하는 존재라고 겔렌은 주장한다.

 

 

참고문헌

 

Gehlen, Arnold. 1935, “Der Idealismus und die Lehre vom menschlichen Handeln.” in Theorie der Willensfreiheit und frühe philosophische Schriften. Neuwied, 1965: 197-221.

Gehlen, Arnold. 1962, Der Mensch: Seine Natur und seine Stellung in der Welt. Bonn: Athenä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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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이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7.31 그의 결별에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이 큰 몫을 하지요. 1933년 우파헤겔주의적 성향의 자기확신을 가지고 국가사회당에 가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나치 제복을 입거나 인종주의나 생물주의를 보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더군요. 이 점에서 우리는 그의 인간학적-생물학적 접근과 생물주의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 작성자한살림 | 작성시간 12.08.10 처음 글 제목을 보고서 꼭 읽겠다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와서야 읽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요즘 '겔렌'이라는 이름을 종종 듣게 되는군요. 요즘 제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겔렌이 매우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우선 그의 주저를 구하여 읽어볼까 합니다. 그리고 정신병자님과 나눈 대화에서 라캉을 언급하시니 한 마디 거들면, 라캉은 글에서 언급하신 W. 퀠러의 연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겔렌의 아버지 세대에 속하는 프로이트도 당시 생물학에 '토대를 두고서' 정신분석학을 발전시킵니다. 지금 자세히 논평할 처지가 아니지만 문득 프로이트가 떠올라
  • 답댓글 작성자한살림 | 작성시간 12.08.10 그가 1926년에 발표한 Inhibitions, Symptoms and Anxiety (억제와 증상과 불안)상의 한 대목을 옮겨놓습니다. 마지막 장의 후반부에 있습니다. "The biological factor is the long period of time during which the young of the human species is in a condition of helplessness and dependence. Its intra-uterine existence seems to be short in comparison with that of most animals, and it is sent into the world in a less finished state."(p.80) 저는 화이트헤드와 함께 동물에 비하여 사람이 '-a(마이너스a)'라기보다는 '+a'라고 생각합니다. 결핍이 아니라 어떤 과잉. 이에 대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 작성자아이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8.12 사회학을 하신 한살림님께서 겔렌은 그리 낯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슈츠에게서 배웠던 사회학자 토마스 루크만과 피터 버거가 겔렌의 현상학적 인간학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들의 제도론의 입장을 정립하였구요. 루만과 하버마스 역시 겔렌의 언어, 문화 그리고 제도관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최근 그들의 제자이자 지젝과 같은 세대라 할 수 있는 독일의 요아스와 호네트가 겔렌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쾰러의 침팬지 연구에 기초한 게슈탈트 심리학은 현상학자, 인간학자 정신분석학자들에게 공히 잘 읽혔던 것 같습니다. 겔렌이 그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생물학자 von Uexkuell이 있습니다.
  • 작성자아이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8.12 아마 겔렌이 프로이트를 자기 이론에 적극 끌어들이는 이유가 바로 위 인용문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겔렌의 결핍 개념을 후설의 과잉(more than)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로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겔렌의 경험철학은 후설의 초월철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요컨대 겔렌의 생물학적 인간학은 현상학적 인간학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의 입장은 위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의 선배 현상학자이자 인간학자였던 셸러와 플레쓰너와 확연히 구분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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