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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Jang 교수 Column 

[조선일보][책마을]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가지 못한 길 (2002.09.13)

작성자★파란★|작성시간06.09.13|조회수77 목록 댓글 2
[책마을]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가지 못한 길 (2002.09.13)




가을이 되면 향수병이 더 깊어지시는 어머니가 뜰에 핀 국화꽃을 보시다가 말씀하신다. “이맘때믄 우리 과수원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고 온 세상이 사과냄새로 진동했댔는데….”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는 시란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연인을 사모하는 목메임으로 시작한다”고 말했다. 프로스트는 뉴잉글랜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열 한 살 때 미국 동북부의 뉴햄프셔주로 이주하여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줄곧 그곳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살았고, 그곳이 그의 시에 등장하는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이 현학적 사고에 근거해서 암호같이 난해한 시를 쓴 반면, 프로스트는 주로 잔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농부들의 건강하고 소박한 삶, 평범한 일상에서 문득 부딪치는 소중한 순간들을 진솔하게 묘사했다. 사과나무에 걸쳐놓은 사닥다리, ‘땅 위의 별’과 같은 반딧불, 자작나무 가지를 타고 오르는 소년, 펼쳐 놓은 책 위로 스치는 산들바람 등은 결국 그 속에 숨어 있는 보편적 진리로 연결된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시는 “기쁨으로 시작해서 지혜로 끝나는 것”이며 “잠시 삶의 혼돈을 피해 평화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프로스트의 시 중에 ‘고용인의 죽음’이라는 165행의 서술시가 있다. 농번기에는 돈을 더 준다는 꼬임에 빠져 다른 데로 갔다가, 농한기가 되어 일자리 없고 갈 데 없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늙은 고용인 사일러스에 대한 부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일손이 귀해지면 또 다른 데로 갈 테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남편에게 부인 메리는 늙고 쇠약해져 갈 곳 없는 사일러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서 묵게 하자고 한다. “여보, 사일러스는 죽음을 맞으러 고향에 온 거에요./아마 다시 떠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에요.’/‘고향은 무슨 고향,’ 남편이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고향이 아니고 뭐겠어요?/물론 우리 피붙이가 아니고, 길가다 지쳐서 숲에서 나온 나그네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고향이란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고,/ 무슨 자격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부부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고향이란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고 아무런 자격 없이도 갈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 내 가슴에 박히는 이유는 이북이 고향이신 부모님 때문이다. 2년 전인가, 서울에서 남북이산 가족이 만났을 때 100살 난 남한의 어머니 앞에서 신발 벗고 마지막으로 절을 올린 북한의 아들이 한 말이 생각난다. “오마니, 통일되어 아들 다시 보기 전에 눈을 감으면 안돼요. 알갔시요? 그거이 오마니가 해야 할 일이야요.” 어머니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을 ‘오마니가 해야 할 일’이라고 자꾸 우기며 아들은 울면서 떠났다.

친구분들이 산소자리를 마련할 때마다 당신은 통일되면 고향에 묻히실 거라시던 나의 아버지(고 장왕록 박사)도 결국 “아버지가 해야 할 일”도 잊으시고 이제 그만 타향에 묻히시고 말았다. 8년 전, 떠나시기 얼마 전에 한 영자신문에 기고하신 글에서 아버지는 프로스트의 유명한 시 ‘가지 못한 길’을 인용하셨다. “숲으로 난 두 갈래 길에서/나는 인적이 뜸한 길을 택했지요./그것이 모든 것을 변하게 했습니다.” 창작의 꿈을 가지셨으나 교수 월급으로는 여섯 자식 부양하기가 어려워 번역의 길을 택하셨다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그러나 일평생 걸어오신 그 길도 너무나 아름다웠고, 이제 통일이 되어 고향 용강에 가는 길을 꿈꾸신다고 글을 맺으셨다.

여우는 고향을 떠나 죽을 때면 어김없이 머리를 고향 쪽으로 향하고 눕는다고 한다. 한낱 미물인 여우가 그럴진대 하물며 사람이야…. 수마에 할퀴어 빈터만 남은 고향일지라도 명절에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기다리다 지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눕고 마는 실향민들이 자꾸 늘고 있기 때문이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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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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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혜영 | 작성시간 03.07.17 마음만 먹으면 고향에 갈 수 있는 저는 너무나 행복한 사람인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향에 부모님이 계셔서도 더욱 행복하구요. 그래서도 더욱, 평생 동안 고향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신 교수님 아버님의 아픔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군요.
  • 작성자고무신 | 작성시간 05.05.26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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