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교 수 님 방

[<수필>]부래정에 걸터앉아 낙동강을 굽어보다

작성자곽흥렬|작성시간14.06.16|조회수109 목록 댓글 5

 

부래정에 걸터앉아 낙동강을 굽어보다

 

곽 흥 렬

 

 

 

 

   탁 트인 전망이 거칠 것이 없다. 이런저런 세상사로 울울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한 폭의 산수화가 넋을 잃게 만든다.

   간밤에 꿈을 꾸었다. 커다란 물개 한 마리가 저쪽 멀리서 고개를 쳐들고 내 앞으로 둥둥 떠 오고 있었다. 차츰 거리가 좁혀졌을 때 자세히 살피니 물개가 아니라 정자가 아닌가. 날이 밝으면 말로만 듣던 부래정浮來亭을 찾아보려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 들뜬 기분이 아마도 그새 현몽을 하게 만들었는가 보다.

   우곡면 도진리를 지나 답곡리로 접어들자 강변길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 좁은 비포장 길이다. 산책을 하면서 찌든 마음도 씻을 겸, 차를 세워 두고 다리 힘을 빌리기로 한다.

  한 이십여 분을 걸었을까, 저 멀리 날아갈 듯한 정자의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부래정이었다. 부래정은 이렇게 거짓말처럼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부래정에서 바라다보는 낙동강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다. 대낮에 보는 경치도 이렇게 장관이거늘, 하물며 달밤에 보는 풍광이야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불현듯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김황원(金黃元:10451117) 선생의 일화가 떠올랐다.

   선생이 어느 날 평양 부벽루를 올랐을 때의 이야기다. 선생은 부벽루에 걸린, 평양의 산천을 읊은 시구들을 보고는 하나같이 신통치 못하다며 모두 태워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이 스스로 시를 지어 걸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도무지 시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긴 성벽 한편으로는 도도한 물이요, 너른 들 동쪽 머리에는 점점이 산이로다)’이라는 시 두 구를 얻는다. 그리곤 그 경치가 하도 아름답고 웅대하여 끝내 나머지 두 구는 짓지 못하고 자신의 글재주를 통곡하며 내려온다. 이런 사연이 전해져 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부래정 마루에 좌정하여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를 굽어보고 있으려니 지금 내가 꼭 김황원의 그때 심경이다. 눈앞에 펼쳐진 이 절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무리 궁굴려 보아도 마음에 차는 구절이 떠오르질 않는다. 자칫 잘못 그렸다가는 무딘 글 솜씨가 지금 이 순간의 황홀한 감흥을 죽이고 말 것만 같아 망설여진다.

   하지만 한참 후 용기를 내기로 한다. 둔필승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글로 남기자. 비록 천학비재이지만 남겨 놓아야 훗날 누군가는 알고 찾아올 것이고, 그러면 그때 가서 그의 훌륭한 글재주를 빌리면 될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무슨 소명의식 같은 것이 솟구친다.

   부래정은 조선 선조조의 학자이자 임란창의사였던 박정번(朴廷:15501611) 선생이 세운 정자이다. 옛 부례扶禮 나루터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처음 세워졌다가 중간에 무너진 것을 올 5월 중수하면서 원래보다 규모가 커지고 높이도 높아졌다. 그래서 지금의 모양은 정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누각에 가까워 보인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지붕선이 금방이라도 물을 박차고 날아오를 듯 날렵하다.

   난간에 걸터앉아 다시금 오래 강물을 응시한다. 그러고 있으려니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된 느낌이다. 정자 이름은 떠서 온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내 몸은 어느새 어디론가 훨훨 떠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우화이등선이 이런 경지를 두고 이르는 말인가.

   꿈속을 헤매는 듯 몽롱한 오후다.

 

<'대가야신문' 2014년 6월 16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구예자(8기) | 작성시간 14.06.16 잘 읽었습니다. 제게도 느낌이 올까요? 부래정에 앉아 보고싶네요. 교수님 수업 많이 기다려집니다.
  • 작성자봄봄 ( 이정원 7기 ) | 작성시간 14.06.16 교수님도 표현 하기 어려운 부래정이라니.......난간이 그려집니다...................^^
  • 작성자박순태 6 기 | 작성시간 14.06.16 비누로 깨끗이 씻은 얼굴 같이 문장에 군더더기 하나 없습니다.
    익혀야겠습니다.
  • 작성자박영주(연구6기) | 작성시간 14.06.17 교수님 글은 그곳에 가고 싶도록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 작성자박영희 (5기) | 작성시간 14.06.17 교수님,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래정에 걸터앉아 낙동강을 굽어보듯 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