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에 소개하는 두 글은 기행문과 기행수필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남일보 2015년 2월 6일자에 발표된 글이고, 하나는 저가 대가야신문에 집필한 '에세이로 풀어낸 대가야 고령의 역사와 문화' 연작 중의 한 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극명하게 다른지 두 글의 차이점을 세세히 살펴 보시고 창작 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고령 신촌리 벽송정과 신촌숲
조용하게 흘러가는 안림천변 최치원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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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최치원이 중건한 벽송정. 벽송정 유계가 500년을 이어 오고 있다. 벽송정 안(작은 사진)에는 고운 최치원,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의 시문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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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에 해인사 기거하던 최치원 안림천변으로 종종 내려왔다가 들 한가운데 퇴락한 벽송정 중수 1920년 하천 범람으로 유실 잔해 모아 학산 아래로 옮겨 지어 500년 전통 유계는 지금도 이어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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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림천 너머 학산 기슭에 벽송정이 보인다. 안림천변의 신촌숲(작은 사진)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숲으로 여름철 야영장으로 이름나 있다. |
‘늙어서 돌아와 송정 아래 누웠으니 / 한 가닥 가야산이 푸름 속에 숨었네.’ 최치원의 제영시가 걸려 있는 오래된 정자가 고령 신촌리의 안림천변에 있다. 벽송정(碧松亭)이다.
◆학산 아래 벽송정
벽송정에서는 안림천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자리에서 약 300m 떨어진 들 한가운데가 원래의 자리라 했다. 1920년에 큰 홍수가 났었다. 하천이 범람해 벽송정은 유실되었고, 이후 그 잔해를 모아 신촌리의 뒷산인 학산 아래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누가 언제 처음으로 벽송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라시대 최치원이 중건하고 상량문을 지었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벽송정은 6칸의 누각으로 그 밑으로 달구지가 드나들고 도리깨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고 한다. 지금은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에 팔작지붕이 얹어진 모습이다. 정자 안에는 고운 최치원과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시문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외곽은 방형의 기와 담으로 둘렀고 정면과 왼쪽 측면에 작은 일각문이 있다. 전체적으로 엄격하고 단정한 느낌이 짙다. 한 그루 배롱나무가 유일하게 화려한 벽송정의 치장이다.
◆500년 이어온 벽송정 유계
계(契). 계의 기원은 불확실하다. 많은 설이 존재하지만 원시 공동체에서부터 출발했을 거라는 의견은 공통적이다. 사전은 계를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던 협동단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종류도 다양하고 기능도 복잡해 그 개념을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지역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특정한 이해(이익) 또는 여러 가지 이해를 공동으로 추구하기 위해 조직된 하나의 기능집단’으로 보는 견해에 무게가 실려 있다.
벽송정을 중심으로 한 계가 있다. ‘벽송정 유계’다. 그 기원은 아주 오래 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총 10권의 ‘벽송정 계안’을 보면 조선시대인 1520년대부터 벽송정을 중심으로 계가 결성되었고, 그 일대의 전답과 재산의 운용으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벽송정 유계에는 조선시대 고령 지방의 양반을 중심으로 전국의 양반이 참여했는데, 명망 있는 고령 지역의 사족은 대부분 벽송정 유계에 가입해 지역 유림의 여론을 주도하고 영향력을 키웠다고 한다. 가입 절차와 계원의 자격 유지도 매우 까다로워, 참석률이 저조하면 벌칙을 받거나 계원 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한다.
계안에 따르면 벽송정은 활터였다. 계원들은 모여 활을 쏘고, 시문을 짓고, 연회도 열었다고 한다. 벽송정 유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500년 세월이다. 지금도 100명이 넘는 계원이 매년 음력 4월 초열흘날 모임을 가진다고 한다. 활을 쏘거나 시문을 짓지는 않지만 벽송정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전통은 그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 안림천변 신촌숲
현재 벽송정은 고령읍에서 쌍림면을 거쳐 합천 야로로 가는 안림천변의 26번국도 옆에 위치한다. 이 길은 해인사로 통하는 대표적인 길이다. 대가야 시대에는 야로에서 생산된 철을 왕도인 고령으로 운송한 철의 길이었고, 신라 말에는 최치원이 경주와 해인사를 오갈 때 걸었던 길이었으며, 조선 초기에는 낙동강 개경포에서 내린 팔만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운반했던 길이기도 하다.
가야산 해인사 골짜기에서 시작된 천은 합천에서는 가야천이라 부르고 고령에서는 안림천이라 부른다. 안림천변에는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나루터를 만들려고 할 때 봉새가 날아와 울었기에 봉나루 혹은 봉진이라 했고, ‘봉(鳳)’자를 빼고 새나루, 새나리라고도 했다. 벽송정이 있는 신촌은 새나루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벽송정에서는 안림천이 보이지 않지만 신촌 마을 앞 천변에 서면 물길 너머 벽송정이 보인다. 이 즈음에 나루터가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수량이 적어 강돌들이 수면위로 머리를 내밀었지만, 과거엔 물 깊어 배가 다닐 수 있었을 게다. 아림 혹은 안림이라 했을 만큼 천변의 숲도 무성했을 게다. 지금도 숲은 신촌숲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무성하지는 않지만 자연적으로 자라난 수목만이 지니는 자유로움이 있다. 최치원과 수많은 유림이 벽송정에서 본 것은 물과 숲의 그 자유로움이었을 것이다.
벽송정 푸른 솔은
곽 흥 렬
정자 양편으로 붉은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칠월의 배롱나무가 빚어내는 꽃구름이다. 이글거리는 태양빛의 세례를 받은 송이 송이들이 한껏 요염한 자태를 뽐낸다. 벽송정의 여름은 이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처음 벽송정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 이름에 걸맞게 아름드리 푸른 솔이 청청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을 것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막상 찾아가 보니 첫인상에 실망이 앞선다. 오랜 풍상을 견뎌낸 노송들은커녕 허리통만 한 소나무조차 눈에 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는 필시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갑자기 돋보기를 들이대고픈 심정이 인다.
벽송정은 쌍림면 신촌 마을 앞의 학산 기슭에 서 있는 정자이다. 중수기重修記 현판을 통해 내막을 알고 나니 ‘그러면 그렇지!’ 하는 소리가 탄식처럼 튀어나온다.
벽송정이 원래 자리하고 있던 곳은 봉진 마을 앞 안림천 변이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가야산 해인사에 기거하면서 자주 이곳을 드나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선생이 언제 적 분이던가. 아득한 옛날, 신라 때 인물이 아닌가. 그로 미루어 보면 얼마나 오래된 정자인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그만한 역사를 지녔다면 아름드리 노송이 둘레를 감싸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그 이름도 푸를 벽碧 자 소나무 송松 자를 써서 ‘벽송정碧松亭’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던 것이 1920년의 대홍수로 대부분 유실되고 기둥 몇 개만 남고 말았다. 천년 세월을 간직한 정자가 하루아침에 이슬처럼 스러지고 말았으니 그 참담한 심경이야 오죽했으랴. 훗날 뜻 있는 선비들이 머리를 맞대고 중지衆智를 모은 끝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고, 그 뒤에도 몇 차례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의 모습으로 갖추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이름에 어울리는 정자가 되지 못하고 있으니 적이 아쉽기만 하다.
벽송정 마루에 걸터앉아 멀리 안림천을 굽어본다. 느닷없이 가곡 <선구자>의 한 소절이 떠오른다.
‘일송정一松亭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려니 불현듯 가사를 바꿔 부르고 싶은 마음이 충동질을 한다. 이 가곡은 일송정보다는 차라리 벽송정을 위해 지었어야 더 어울림직한 노래가 아닐까.
‘벽송정 푸른 솔은 큰물 져서 떠나가고 한 줄기 안림천만 무심히도 흐른다’
언제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쌓는 것은 기나긴 시간이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늦었다 싶을 때가 오히려 빠른 때라고 했으니, 오늘이라도 그 이름에 걸맞게 푸른 솔을 심어 두고서 세월을 기다려야 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