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가톨릭

초대교회의 신앙 이야기 : 고해성사(화해예절)에 대하여

작성자비전문가|작성시간13.08.31|조회수673 목록 댓글 109

 

교회의 첫 3세기는 박해의 시기였으므로 어떠한 일정한 성사의 틀을 마련하기에는 어려운 시대였다. 또한 이 시기는 주요 대도시(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이방인 공동체로 퍼져나가는 기간이었고 따라서 유대인들의 풍습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이방 문화를 만나는 시기였다.

유대인들은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절실히 체험하였고 이는 구약성서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신명4:31). 비록 인간이 죄 중에 있더라도 용서를 청하고 뉘우칠 때 하느님은 그를 구원하여 주신다(이사 44:21). 예수는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선포하며 길 잃어 헤매는 양을 어깨에 메어오는 주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한다.

 

비록 주석학적인 쟁점들은 있을 수 있으나 복음서에서 우리는 간접적이든(마태 16:18-19; 18:18), 직접적이든 (요한 20:21-23) 죄의 용서에 대한 성사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묶거나 풀어줄, 또한 용서해줄 권한을 이양한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 열쇠권을 가진 사도들 앞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그러자 신자가 된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자기들이 해 온 행실을 숨김없이 고백하였다 (행 19:18)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 여러 곳에서 초대교회의 화해 성사를 가늠하게 해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음행, 탐욕, 우상숭배 등의 중죄를 범한 이들에 대해 공적인 추방을 언급한다. 그리고 또한 그들에 대한 용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실은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짓을 한 자에게 벌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깥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 악인을 제거해 버리십시오"

(1 코린 5장 발췌)

 

사도 바오로의 언급을 정리해보면 초대교회의 화해의 예절에 대해서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중죄(살인, 간음, 배교 등)를 지은 죄인은 공적으로 교회로부터 교회 공동체 혹은 지역 교회의 감독에 의해 추방당하며(그 자를 사탄에게 내어준다) 얼마간의 기간이 경과한 이후에 다시 공적으로 용서를 받음으로써(그 영이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 비로소 화해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일부의 신학자들은, '추방된 사람의 영에 대한 주님의 날에 구원받음'을 베드로 후서 2장 20절 이하의 내용 및 헤르마스의 목자 3장 1절과 연관지어, 추방자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경우 심판의 날에 주님에 의하여 대승적으로 죄를 용서 받음을 강조하며, 일단 교회 안에서 추방된 경우에는 다시는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부 소수 개신교 성도들은 신앙 편의주의적 관점에서 소위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신학적 견해를 이 구절에서 이끌어내기도 한다.

 

어쨌든 이러한 화해 예절은 2세기 중엽의 문헌인 디다케에 보다 구체적-발전적으로 드러난다. 디다케는 화해 예절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여기서 초대 교회의 화해 예절은 공개적으로 공동체의 모임에서 행해졌으며 성체성사와 연결되어 완결됨을 볼 수 있다.

 

교회에서 네 범법들을 고백하며, 언짢은 양심으로 너의 기도(모임)에 나아가지 말라, 이것이 생명의 길이니라 (4:14)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 자기 동료와 더불어 분쟁거리를 가진 모든 이는, 그들이 화해할 때까지는, 여러분의 제사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모임에 함께하지 말아야 합니다. (14:1~2) 

 

이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1세기 말)에 저술된 로마의 클레멘스가 코린토스인들에게 보낸 편지(96년경 저술된 것으로 추정)에서는 참회는 성직자 아래서 무릎을 꿇고 벌을 수락함으로써 이루어졌고 용서받기 위해서 참회자는 애덕을 실천하여야 했다.

그리고 2세기 초~중엽 작품으로 추정되는 헤르마스의 “목자”는 초대교회의 화해예절을 3가지 면에서 더욱 자세히 그려낼 수 있게 해준다. 첫째, 화해예절의 종말론적인 성격이 부각되는데 화해성사는 죄인을 하늘나라로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둘째로 화해예절에서 죄인의 마음 깊숙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마음의 진정한 통회 없이는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화해예절은 세례를 받은 후에 오직 일생에 있어서 한 번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천사님, 우리가 물속에 잠겨 죄의 용서를 받은 회개 외에 다른 어떤 회개도 없다는 것을 여러 스승으로부터 배웠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천사는 나에게 ‘올바로 들었다. 사실 그렇다.’하고 대답했다. 사실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짓지 말고 깨끗이 살아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이나 또는 앞으로 믿을 사람들에게 구실을 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미 믿음을 가졌거나 또는 믿을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오직 죄의 용서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전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위하여 회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의 속마음을 아실뿐만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하느님의 종들을 악에 빠뜨리고 흠을 내게 하는 마귀의 간교함까지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니 사람들에게 이 참회의 기회를 마련하시고 이 권한을 내게도 주셨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거듭 말한다. 만일 누가 이 거룩하고 위대한 부르심을 받은 다음에 혹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었다면 단 한 번의 참회의 기회가 허용된다. 그러나 그 후 다시 죄를 짓고 참회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살 희망이 거의 없으리라. 나는 천사에게 ‘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들었고 다시 태어나는 듯합니다. 제가 다시 죄를 짓지 않으면 구원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천사는 나에게 ‘네가 만일 이것을 잘 준수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말하였다 (목자, 환시 3:1~6)

 

이상에서 우리는 아주 간략하게 초대교회의 화해성사에 대한 언급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초대교회는 박해를 받고 있었고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대단한 결심을 필요로 한 일생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후에는 모든 신자들은 대단한 신앙심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해 또다시 죄를 짓게되고 여기에 하느님의 자비의 표징으로 화해예절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 각 교회는 정확하게 초대교회에서 집전되던 형식의 화해예절을 되살려낼 수는 없다. 

당시 박해라는 상황과 지역적인 광대함은 지역적으로 조금씩 다르게 화해예절이 집전되도록 하였을 것이다. 뒷날까지 많은 영향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헤르마스의 목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세례를 받은 후에는 일생에 단 한 번만 화해 예절에 참여할 수 있었던 지역교회도 많이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에도 지역적 한계를 초월하는 화해 예절의 공통점은 내적 참회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였고 또 공적인 형태로 공동체와 그 수장(주교나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다시 공동체와 하느님과 화해하는 형식의 예절을 집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나티스트 같은 일부 교회적 이단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던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주의로 나아가서, 배교의 죄를 저지른 사람의 경우에는 교회의 화해 예절을 통한 회개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는데, 그들은 배교자들의 경우 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여 정통 세력에 의해서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공개적인 화해예절과 그 엄격성은 훗날 죄의 사적 비밀 고해로 이끌어질 수 밖에 없는 심각한 부작용을 가톨릭 교회 안에 불러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좀 더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하토브. | 작성시간 13.09.04 죄를 내면적 깊이에까지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는 것이 카더라 통신입니까?

    개톨익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앞에 죄를 자복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이야기 하면 까마득한 카더라 통신으로 들릴 것입니다.

    이 고해성사는 개톨익이 종말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무기로 사용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도 이탈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비전문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9.04 물론 주님께 직접 고백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고해성사도 시작은 통회, 즉 마음 속으로부터의 참된
    반성을 전제로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일찌기 열쇠권을 주셨고, 다시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정통적
    죄사함의 권한은 가톨릭과 정교회 등 사도전승 교회로 이어졌지요.

    아마 형제교회에서는 이 구절은 탐무즈(두무지)가 말했다고 이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가톨릭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를 탐무즈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니 말이지요.^^ 이는 그들의 기독교 안티 속성을 드러냅니다.
  • 작성자하토브. | 작성시간 13.09.05 죄의 자백, 고백과 회개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하며 그분과 마음속의 골방을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의지하여 그분앞에 담대히 고백하며 그분으로부터 사하심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간구를 들으시고 그 죄를 이제야 우리가 간절히 구하므로 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에 의한 사하심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하시고 깨닫게 하심으로 용서해주십니다. 그분의 죄사함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이 근거가 됩니다. 그것 없이 영성체를 들어올리거나 포도주 잔을 들어올린다고 사해지는 것도 아니며 인간 우상제사장에게 찾아가서 고백했다고 마음이 후련해지는
  • 답댓글 작성자하토브. | 작성시간 13.09.05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죄사함의 기쁜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에게 고백했다하여 죄사람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최대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과의 화해와 평화를 얻는데 있으며 그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을 근거로 나아갔을 때 그 속죄 희생이 자기 것이 되도록 하나님은 성령으로 깨우쳐 주십니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에는 인간에게 가서 죄를 고해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하나님께 가서 모든 죄를 직접 고해했는데 어찌 또 인간에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직접 고해성사를 하십시오. 인간 우상제사장이 왜 필요합니까?
  • 답댓글 작성자비전문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9.05 바로 하느님께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를 증언하지요.

    초대교회 정통 신앙은 엄격한 화해예절이었고, 가톨릭 교회는 고해성사를 통해 그 정신을 잇고 있습니다.
    여건에 따라서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주님께 직접 기도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예외적 방식이 정통적인 고해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악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종교개혁자들과 몇몇 실천적 신학자들은 초대교회 화해예절의 정신을 나름대로 되살리려고 노력하였지요.

    형제교회의 자의적 성경 해석은 일견 그럴듯 하지만,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온 정통적 가르침에서 벗어난
    이단적 신앙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