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의 제수이트 선교사(하비에르: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작성자KESLL|작성시간14.09.07|조회수342 목록 댓글 4

(스) San Francisco Javier(Xavier). 1622년 3월 12일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12월 3일. 1506. 4. 7 나바라 산귀에사 근처 하비에르 성~ 1552. 12. 3 중국 상촨 섬[上川島].

근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개요

인도, 말레이 제도,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색인 : 선교). 1534년 파리에서 예수회에 가입서약을 하여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이끌던 예수회 최초의 회원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초기생애와 교육

나바라(지금의 스페인 북부지방)에서 바스크어를 사용하던 하비에르 가문의 성(城)에서 태어났다. 나바라 왕이 소집한 공의회 의장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나바라 왕국은 곧 대부분 카스티야 왕에게 넘어갔다(1512). 하비에르는 하비에르에서 성장했고 어린시절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귀족 가문의 어린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도 성직자가 되도록 교육받았고, 1525년 당시 유럽의 신학 중심지였던 파리대학교로 유학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1529년 또다른 바스크 출신 학생이었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하비에르와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예전에 군인생활을 했고 하비에르보다 15세 위였던 로욜라는 깊은 신앙체험을 한 뒤 그의 이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원래 고집이 세던 하비에르도 점차 로욜라에게 설득당해 그 모임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 가담한 7명은 1534년 8월 15일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성당에서 평생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과 독신생활을 하겠다고 서약하고, 성지순례를 엄숙히 약속한 뒤 신자들이나 불신자들 모두를 대상으로 구원사역에 전념했다. 하비에르는 그뒤 이그나티우스가 자기 경험에 비추어 개인들을 하느님과 사람을 섬기는 일에 더욱 헌신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고안한, 30일가량의 연속 명상인 '영적 훈련'을 실행했다. 이 훈련은 하비에르의 마음에 그의 남은 생애를 이끌어갈 동기를 심어주었고, 그뒤 자주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인도
선교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모두 공부를 마친 뒤 베네치아에 다시 모였고, 1537년 6월 24일 하비에르는 이곳에서 사제임명을 받았다. 이 7명은 성지로 들어가려고 1년 이상 애썼으나 실패한 뒤 새로 가입한 회원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동안 이탈리아 중부 전역을 다니면서 설교하고 병자들을 돌보아 유명해지자 많은 로마 가톨릭 군주들이 이들에게 와서 일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인 포르투갈의 왕 주앙 3세는 그리스도교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자신이 새로 획득한 아시아 지역에 가서 전도할 성실한 사제들을 원하고 있었다. 원래 이 임무를 맡은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병에 걸려 출발하지 못하게 되자 이그나티우스는 대신 하비에르를 지명했다. 다음날 1540년 3월 15일 하비에르는 인도를 향해 로마를 떠나 리스본으로 갔다. 그해 가을 교황 파울루스 3세는 이그나티우스의 추종자들을 예수회라는 수도회로 공식 승인했다.

1542년 5월 6일 하비에르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활동 중심지인 동방의 고아에 상륙했다. 그의 동료는 리스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이곳에 함께 오지 못했다. 그뒤 거의 3년을 인도 남동부 해안에서 단순하고 가난한 진주조개잡이 어부들인 파라바인들과 함께 지냈다. 이들 가운데 2만 명 정도가 7년 전에 이미 세례를 받았는데 주로 적들에 대항하고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뒤로는 아무도 이들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비에르는 통역가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타밀어로 번역한 조그만 교리문답서를 가지고 온종일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고 선교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의 선한 뜻과 확신에 가득 찬 태도에 마을 사람들은 의사소통은 잘 안 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남서부 해안의 원주민들인 마쿠안족이 세례를 받을 뜻을 밝힌 직후 간단한 교육을 실시한 다음 1544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하비에르는 이들 가운데 1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자신이 학교를 세워놓으면 포르투갈 당국이 책임감을 느끼고 이 학교들을 존속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1545년 가을 하비에르는 전도할 기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말레이 제도에 갔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상업 중심지 말라카의 혼합인종들 사이에서 여러 달 복음을 전하다가 향료제도(몰루카 제도)에 사는 말레이 사람들과 사람 사냥하는 야만족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1548년 인도로 돌아갔을 때는 더 많은 예수회 수사들이 그와 합류하기 위해 그곳에 도착했다. 예수회는 여러 해 전에 고아에 세워졌던 성신대학(聖信大學)을 인수했고, 하비에르는 이 대학을 고아 교구를 위해 본토인 사제들과 교리문답교사들을 양성하는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이 대학의 영향력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서부터 중국에까지 미쳤다.

 

일본
에서의 활동

그러나 하비에르는 불과 5년 전에 유럽인들이 첫발을 디뎠던 일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말라카에서 그리스도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안지로라는 일본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일본 사람들이 인도에서 사귄 어부들이나 몰루카 제도의 야만족들과는 달리 문화수준이 높고 세련된 사람들임을 느낀 바 있었다. 1549년 8월 15일 하비에르, 갓 세례받은 안지로, 여러 동료들을 실은 포루투갈 배 한 척이 일본 항구 가고시마[鹿兒島]에 입항했다. 하비에르가 일본에서 보낸 첫 편지는 그 세기가 끝나기 전에 30판 이상 인쇄되었는데, 이 편지에는 '지금까지 발견한 민족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민족'인 일본 사람들에 대한 열정이 나타나 있다. 그는 점차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선교방법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가난한 생활이 파라바 사람들과 말레이 사람들을 얻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일본 사람들에게는 거리감을 주었다. 따라서 하비에르는 가난한 생활을 포기하고 일본 선교에 도움이 될 학자의 모습을 취했다. 일본에 도착한 이래 우편물이 전혀 오지 않자 1551년말 다섯 공동체의 2,000명가량 되는 사람들을 동료들에게 맡기고 그는 잠시 인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색인 : 기리시탄). 인도에 돌아가니 새로 설립된 예수회 인도 관구 수장이 된 그가 처리해야 할 행정상의 문제들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일본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일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방법이 중국을 통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중국에는 가본 적이 없었던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3일 당시 외국인들에게 문을 닫아걸었던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다가 상촨 섬에서 열병에 걸려 죽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4h2026b "브리태니커 하비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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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하토브 | 작성시간 14.09.07 이 글은 카톨릭의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믿어집니다.
    하비에르라는 이름은 Xavier 를 번역한 것으로 크사비에르 혹은 사비에르가 더 정확한데 아마 일본식 발음인지 모르겠습니다.
    위에 수없이 사비에르가 전도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기독교 진리가 아니라 카톨릭교리라는 말입니다.
    즉 카톨릭의 우상숭배는 잘못되었다고 전한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 카톨릭에서는 미사로 영성체와 잔을 들어올리며 죄를 사해달라 하는데 모든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으심을 사해졌으며 이제 그 진실을 믿으면 누구나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 답댓글 작성자하토브 | 작성시간 14.09.07 계속해서 늘 미사를 드리고 교회생활해야 구원이 유지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사비에르나 김대건의 전도 기록 어디에서도 인류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영원한 효력으로 사해졌다고 가르친 흔적을 저는 찾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잡신교 카톨릭을 전파한 것입니다. 그들은 교황제도를 전하였고, 기독교를 탄압하고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가서 선수치러 동양에 왔던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세계 곳곳 수백만 장소에 마리아가 날아갈 수도 없으므로, 마리아에게 기도한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마리아 우상에게 절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KESLL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9.07 맞습니다. 이 글은 카톨릭 관점에서 쓰여졌습니다.
  • 작성자하토브 | 작성시간 14.09.07 이 사비에르와 함께 들어온 포르투갈인들이 바로 일본에 화승총을 선물하였고 그것을 일본의 전국시대에 개량한 것이 일본 조총이었으며 그것이 조선의 100만 양민들을 살육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조선인구 전체의 11% 정도가 왜구들에게 살육당했습니다. 그 도구를 전해준 사람들이 바로 포르투갈인들인데 그들뒤에는 바로 이 사비에르가 있었습니다. 카톨릭은 전쟁은 하지않는 것처럼 뒤에 숨어 거룩한 척하지만 바로 그들은 전쟁을 배후 조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군이 그러했고, 히틀러 나치가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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