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리스트
-
작성자 엘리야후 작성시간16.09.21 하마트면 모르고 지나갈 뻔한 역사적 사실을 알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글이라 생각됩니다.
존 브라운에 대해 처음 알게되었고 그의 죽음이 찬송가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을 보면 영적으로 상당한 반영이 있었다고 믿어집니다.
이 글을 통해서 보면 존 브라운은 좀 아쉽게 죽은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나중에 1년반만 참았더라면 그는 북군에 가담하여 정당한 전쟁의 군사로 노예소유자들과 노예제도 유지론자들과 싸울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예제도의 문제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보다 엄청 큰 문제였다는 것이 역사를 파고들면 드러납니다.
기독교인들의 양심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기도가 막히는 문제였기 -
답댓글 작성자 엘리야후 작성시간16.09.21 때문입니다. 노예로 흑인들을 학대하면서 하나님 앞에 축복해달라고 기도하면 들어지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링컨 이전에 2대 대통령 존 아담스는 노예제도를 강력히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반영하여 노예제도 문제는 1820-1860년까지 링컨 이전에 항상 최대의 이슈였습니다.
한가지 기억할 것은 한국의 38선 처럼 미국에도 36도 30분 그러니까 36.5도 선이 경계였습니다. 그 이남은 노예제도를 허용하고 그 이북은 노예제도를 불인정하는 것이 바로 미주리 합의 ( Missouri Compromise) 라는 것이었습니다. 공화당 이전에 민주당을 대항하던 정당이 휘그 당이었는데 휘그당과 북부 미국인들은 택사스주의 미국 합병을 반대하였 -
답댓글 작성자 엘리야후 작성시간16.09.21 습니다. 그 이유는 텍사스가 미국으로 들어오면 미국내에 흑인 노예들을 허용하는 주가 늘어나고 그리되면 노예해방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조건과 단서가 붙은 상태에서 텍사스 주가 1844년 미국으로 합병됩니다. 그 이전에는 1836년부터 1844년 사이에 텍사스주는 독립국가로 있었으며 별도의 국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노예제도 문제 때문에 북부는 영토 확장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북부는 노예제도를 싫어하였습니다.
노예제도 문제는 워싱턴 대통령때부터 문제였고 그는 노예제도에 반대했지만 그것을 공표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갓 태어난 나라가 노예제도 때문에 분쟁에 휩싸이면 곧바로 붕괴될 -
답댓글 작성자 엘리야후 작성시간16.09.21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노예제도 문제는 건국과 동시부터 내재해 있던 큰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존 브라운이 봉기하였던 시기는 바로 노예제도를 고집하고 강화하려는 민주당의 집권기였고 당시 대통령은 프랭클린 피어스와 제임스 부캐넌의 시기로 보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보는 것은 역시 비폭력 저항운동이 오히려 강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폭력은 실질적으로 위험이 있을 때 정당방위 수준이 허용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저항운동 방식이 오늘날에도 크게 인정받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존 브라운은 그런 점에서 좀더 가다듬어졌어야 하였고, 또 전투를 했더라도 좀더 -
답댓글 작성자 KESLL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7.01.19 엘리야후 텍사스가 멕시코에 독립한 이유도 노예를 부리고 싶어서 였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 멕시코에서도 노예제도를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텍사스에 있는 불법체류 미국인(그당시에는 미국인들이 멕시코 영토에서 불법체류했었음)들이 반대하여 텍사스가 멕시코군과 전쟁해서 독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미국인들이 자기영토에 넘어오지 못하게 했었어야 햇는데 그렇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 동안 멕시코는 텍사스 정부한테 독립해도 미국과 합병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미국과 합병이 되었고 결국 멕시코의 반발로 미국-멕시코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크게 패해서 멕시코는 더욱 많은 영토를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