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78. 조선을 진정으로 사랑한 일본인- 노리마쯔 목사

작성자익투스|작성시간19.09.24|조회수119 목록 댓글 4

 

성지순례|조선을 진정으로 사랑한 일본인- 노리마쯔 목사
2010년 12월 23일 (목) 10:45:28 박경진 장로 kj4063@hanmail.net
 

 

 

 
▲ 노리마쯔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
수원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인 동신교회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기독동신회는 1830년경 영국에서 일어난 플리머드형제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승송 목사’로 불리는 노리마쯔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는 일본 메이지학원대학 신학부 재학 때 플리머드형제단 소속 영국인 선교사 H.G. 브랜드의 영향을 받아 신학부를 중퇴하고 조선선교를 준비했다. 1896년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된 뒤 기독인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 노리마쯔는 조선인들에게 사죄하고 소망을 잃은 조선인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돌보고자 그해 12월23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는 일본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선교사례이다.

인천에서 말을 타고 서울로 가기 위해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던 노리마쯔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몇 번이고 "하나님, 하나님"하고 외치자, 마부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첫 신자가 됐다고 한다. 노리마쯔는 서울에 도착하여 한 여인숙에서 주인의 도움으로 청년 조덕성을 소개받고 1897년 1월부터 한글을 배우며 노방전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인이란 이유로 돌팔매질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이 조선 아이들한테 맞아서 울며 돌아오기도 했다. 선교범위를 넓혀가면서 경기도 장호원까지 가서 전도를 할 때는, 재워 주는 집이 없어 시골집 굴뚝을 껴안고 잠을 청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그는 조선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에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를 드렸다.
   
▲ 수원동신교회


노리마쯔는 한복을 입고 한옥에서 조선식으로 생활하면서 아들에게도 조선말을 가르치는 등, 조선인처럼 살았다. 한편 1898년 브랜드가 내한하여 서울지역을 맡자, 노리마쯔는 1900년 8월9일 수원 장안동으로 이주하여 9월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성서강론소'로 하고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09년 8월 김태정이 수원천변 토지를 기부하고 신자들의 헌금과 협력으로 한옥의 집회소를 지어 '수원 성서강당'이라 하였다. 1917년 일제 당국의 요청에 따라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로 종교단체 등록을 하여 훗날 수원동신교회가 되었다.

노리마쯔는 극도로 가난했지만 조선인을 뜨겁게 사랑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왔다. "점심식사를 하셨습니까?" 라는 인사말에 청년은 먹지 못했다고 했다. 노리마쯔는 즉시 아내를 불러서 “빨리 점심을 대접하라”고 했다. 그러나 쌀독에 쌀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머리카락을 잘라 시장에 내다 팔아 양식을 구해 손님을 대접하였다. 이 일로 한동안 그의 아내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다녀야 했다. 결국 가난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그의 아내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두 자녀와 남편을 남겨둔 채 조선 땅에서 하나님의 품에 먼저 안겼다.

노리마쯔는 경상북도, 충청북도 등 38개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등 열정적으로 사역을 펼쳤으나, 건강은 날로 쇠약해져서 결국 1914년 고향인 오다하라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건강을 회복하고 3차례나 수원교회를 방문하여 말씀을 전했으며, 1919년 3월1일에는 병든 몸으로 수원에 다시 와서 3.1운동을 높이 평가하며 조선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다시 병이 악화되어 1921년 2월 조선에 뼈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1922년 동신회 수원교회 성도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오다하라까지 찾아가, 유골을 가져왔다. 그리고 수원교회 뜰에 그의 무덤과 기념비를 세웠다.

노리마쯔는 일본 명문 메이지학원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일본에서 성공적인 삶이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사죄하기 위해서 찾아와 주님의 방법으로 살면서 조선인들의 상처를 싸매고 어루만지며 헌신적으로 선교를 하였다. 조선의 원수였던 일본의 한 청년이 수원과 화성, 이 땅의 곳곳에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함같이 오늘날 5만 교회 1000만의 성도로 많은 열매가 맺혀진 것이다. 이처럼 노리마쯔 목사는 조선을 진정으로 사랑한 일본인이다.
   
▲ 노리마쯔 목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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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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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엘리야후 | 작성시간 19.09.24 노리마쓰는 참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가 세운 모임들이 경기도 지역에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형제모임 사람이었기 때문에 < 목사 > 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교계에서는 조지 뮐러도 < 조지뮐러 목사> 로 부릅니다만, 그들은 목사제도를 강력히 부정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 작성자엘리야후 | 작성시간 19.09.24 본문에 나오는 브랜드라는 형제는 인도 총독의 사위였습니다. 그는 장모와 부인을 대동하고 조선에 왔는데, 고종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성문에서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고종은 < 일없다> 고 해라 해서 보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지 얼마안되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나온 방문시기 보다 조금 먼저 왔었을 것입니다. 그때가 1893- 4년이었을 것입니다.
    노리마쓰, 승송 형제가 개척한 모임들과 후기에 들어온 형제모임이 함께 교제하고 싶어서 모였을 때, 승송 형제가 개척한 모임들의 대표자들은 노인들로서 긴 담뱃대에 담배를 물고 대화를 하게되었습니다. 여러면에서 함께할수 없다고 판단되어
  • 답댓글 작성자엘리야후 | 작성시간 19.09.24 교제가 중단되었습니다. 아마 경기도 화성군 사랑리 부근이었을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익투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9.24 이 당시 고종은 미, 일, 러, 청들의 거만한 외교관계에 풍전등화같은 조선을 생각하느라 알렌이 세운 병원인 재중원 같이 백성들과 나라를 위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들이 아니면 어려워했을 겁니다. 학문적 성향으로 느껴지는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존의 가치관과 대치됨을 넘어서 분쟁의 소지가 생길 수 있어 어려워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그당시 교육과 의료선교에 힘을 썼던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의 활동이 조선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훨씬 더 인지도가 높았을 겁니다. 시대적 상황의 한계를 넘어서 순수한 복음을 대면하기는 왕으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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