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해를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아이들은 '감정이 끓어 올라서.' 자해를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이 들까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어떤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이니?'
대부분 아이들이 하는 대답은 '그냥 짜증이 나요.'입니다.
짜증.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특히 그 나이 때 아이들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감정이 이 짜증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화가 나는 것도 짜증이 나는 것이고, 슬픈 것도 짜증이 나는 것이고, 심지어 무료한 것도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감정이 하나의 단어에 담겨 있으면, 우리는 해결하기 어려운 너무나도 큰 감정의 덩어리를 마주하게 됩니다.
사실 감정이라는 것은 아주 세분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습니까. 얼마나 많은 감정을 느낍니까.
그런데 그 많은 감정이 한 단어에 들어가서 우리에게 인식되어 버리면, 그 덩어리는 너무 큰 덩어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너무 커져버린 그 감정의 덩어리를 처리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해하는 아이들에게 처음 하는 훈련이 '감정 나누기'입니다.
먼저 짜증이라는 단어에서 '화, 슬픔, 무료, 공허' 등을 분류 해 냅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단어들의 의미로 말이죠.
이 과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하기 쉽게 만들어 줍니다.
더 나아가면, '슬픔'도 여러 종류로 나눕니다.
어머니를 떠올릴 때 느껴지는 슬픔과 헤어진 남자 친구를 떠올릴 때 느껴지는 슬픔은 다르겠지요.
이렇게 종류로 나눌 수도 있고, 감정의 강도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감정을 나누고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감정들이 생깁니다.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감정이 생긴 원인과 과정, 결과를 파악하게 되지요.
그러면 그 감정이 스스로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처리됩니다.
처리된 감정은 가끔 떠오를지언정, 이전에 아이들이 표현하던 대로 '끓어오르'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세분화하지 못 한 감정은 너무나 큰 덩어리라서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이렇게 큰 감정 덩어리의 원인을 찾고 찾고 찾다 보면, 결국 '태어난 게 죄'가 됩니다.
안 태어났으면 이런 감정 덩어리가 안 생겼을 테니까요.
결국 태어나지 않은 상태가 되기 위해 자해를 하고, 자살을 시도하게 되겠죠.
그런데 요즘 사회 문제가 논의되고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 너무 큰 덩어리로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 문제라는 것이 어차피 인간이 문제인 것인데, 그 문제를 너무 큰 집단으로 보는 것 같아요.
'페미니스트'가 문제고, '검사'가 문제고, '이대남'이 문제고, '586'이 문제라고 하면... 이 얼마나 큰 덩어리입니까.
세분화를 한 단계 정도 해도 너무 큰 덩어리라고 느껴지는데요.
감정의 해결은, '아주 세분화된 감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세밀하게 파악해서, 자연히 처리되도록 보조' 해주면 됩니다.
사회 문제의 해결은 '아주 세분화된 집단이, 세밀하게 어떠한 점이 문제인지 파악해서, 그 부분이 처리되도록 보조'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정신과 의사에게 많은 사람들이 '내 이 커다란 감정 덩어리를 한방에 없애주세요.', '내 이 고민과 감정의 커다란 응어리를 시원한 말 한방으로 날려주세요.'라고 부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꾸준히 하나씩, 아주 조금씩, 숟가락으로 벽을 뚫는 빠삐용의 심정으로 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문제도 뭔가 한방에 해결될 리 없겠죠.
문제를 일으키는 아주 작은 그 집단을 잘 찾아서,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를 이해하고,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큰 집단으로 묶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냥 욕을 하고 싶은 것이거나, 갈등을 조장하고 싶은 것이거나, 실은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병원이 수기차트를 쓰던 곳인데, 들어가서 전자차트 도입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네요 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그대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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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아빠나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8.11 ㅎㅎ 그걸 가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본인이 깨닫고 있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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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그녀가가잖아-_- 작성시간 21.08.02 법륜스님께서 항상 강조하는 즉문이죠. '알아차리는 것' 부터가 모든 수행의 시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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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아빠나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8.11 Metacognition 관점에서 불교는 대단한 학문이죠 ㅎㅎ 사실 불교가 모티브인 정신과 치료들이 최근 상당히 발전 중입니다. 다만 그걸 할 정도의 환자분은 중증이 아니라 경증인 분들이라서, 약 한알이면 좋아진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지만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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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영실수석비서 작성시간 21.08.12 오랜만에 글 쓰셨네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모다피 작성시간 21.09.23 정신과 외에 이렇게 감정을 쪼개는걸 매우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문학이죠. 시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노래하기 위해선 절대 '슬픔'이나 '눈물'같은 큰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것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즈려밟힌 진달래꽃이나 남의 나라에 있는 육첩방 같은 아주작은단어로 만들때 비로소 공감할 수 있는 시가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