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 마오쩌둥
Event 12 : 왕이천축국전
1955년 2월, 총통부와 각료 전원은 그간 중화민국의 우방으로 인식되었던 인도공화국이 티베트와 조약을 맺어 분쟁영토를 자국령으로 편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는 네루-보세 양당 지도자가 의욕적으로 펼치던 반카스트 운동의 반동으로서 급성장하던 [힌두 민족주의] 열풍에 대항한 것으로, 인도 정부로서는 친중 독재정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행한 일이었죠. 당연히 중국에서 대표단이 방문해 네루 총리 및 보세 당수 일행과 회동했고, 그곳의 정책고문이 된 왕이에게서 “네루-보세 정권의 민족주의적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서는 포르투갈령 고아에 대한 총공격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대표단은 차라리 그 힌두 민족주의인지 근본주의인지 하는 얼치기들에 대한 참수작전을 벌이고, 미국 정부가 그들을 후원한다는 사실을 야당인 공화당을 통해 폭로하자는 대체 계획을 세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작전은 성공했으나, 중국군이 동원되어 “민족주의 세력”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델리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세력들의 공분을 사고 말았습니다. 또한 미국 야당이 스티븐슨 민주당 행정부를 공격해 인도 지원이 중단될 것이라는 희망적 예측과는 달리 미국내 여론은 인도 개입 찬성론으로 불타올랐으며,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가 내전의 불꽃으로 불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기어이 멀쩡한 독립국에서 내전을 촉발시키고 대규모 병력까지 파견한 미국의 행태에 대해 서유럽은 강력히 규탄하며 유럽경제공동체 계획을 밀어붙였고, 중국과 아시아 동맹국들은 반제국주의 항전을 선언하며 인도공화국 정부 측에 제각기 파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와중에 티베트는 중국의 자치령으로서 편입된다는 새로운 조약에 서명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Event 13 : 열강, 조금 부족한.
사실상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코민테른의 사정 역시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국제주의, 평의회 인민민주주의를 외치며 불사조처럼 떠오른 티토 정권은 1955년에 인간을 외기권에 보내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여 단기적이지만 압도적인 핵무기 격차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오스트리아 분단, 이탈리아 공산당 지원 등으로 서유럽과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키고 무엇보다 농업정책에서 큰 실책을 저지르는 등 내홍에 휩싸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도의 전황 역시 부정적으로 흘러갔습니다. 미군과 인도연방군(힌두 민족주의측)은 1955년 가을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어진 대규모 공세에서 뭄바이를 사수하고 나그푸르를 점령하며 공산당의 권력기반이자 제2항구인 캘커타까지 접수, 사실상 북쪽의 인도공화국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반제해방군은 상당한 전력손실을 입었고, 설상가상으로 서쪽의 파키스탄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아유브 칸 장군이 국내 단결의 수단으로 인도와의 대립을 선택하면서 전황은 끝도 없이 부정적으로 흘러갔습니다.
민국의 상황도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미국과의 무역이 단절되면서 공산품 및 기계설비 공급부족과 원자재 수요과다가 동시에 발생, 일명 “가위 위기“로 경제적 핀치에 몰린 것이 특히 심각했습니다. 중화민국은 농업생산성 하락에 따른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코민테른 측과 거래하여 공업자원을 충당하고 전쟁에서 도움을 받을 방책을 찾아 헤맸는데, 소련의 현 집권세력 ”국제주의파“의 제안은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언론자유와 민주주의가 증대된 틈을 타 티토 정권을 매섭게 공격하는 ”보수주의파“를 꺾기 위해, 식량수출 확대를 빌미로 중국에게 핵미사일을 증여한다는 계획이었죠.
물론 중화민국이 핵미사일을 통해 아직 대륙간 미사일 타격능력이 없는 미국을 협박, 인도에서 전세역전에 노린다는 시나리오는 가능성이 있었으나… 그 누구도 세계멸망을 대가로 해서까지 전쟁 승리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쑨커-티토 회담에서는 중국의 식량수출 확대와 소련의 공업설비 수출 확대라는 조건이 타결되었고, 중국에 굴욕적으로 끌려다닌다는 비난을 받은 티토는 권좌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이는 짧았던 국제주의 전성기의 끝을 의미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드미트리 셰필로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를 필두로 한 일명 ”신스탈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티토 정권이 한껏 끌어올린 민주주의 분위기는 이 보수파들의 재집권을 동유럽의 대규모 민심이반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며, 결국 독일이 중립국으로 통일되고 발칸 및 헝가리가 통째로 반소 사회주의 진영으로 분리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중화민국의 경제난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달리 말하면 전쟁에서 이길 방도가 도저히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민국은 미합중국과의 협상이라는 길을 선택했죠. 중화민국의 지위를 결정할 중대한 협상 말입니다…
Event 14 : 다윗의 진영
캠프 데이비드, 즉 미국 대통령의 개인 별장에 초대된 쑨유얀 외교부장을 필두로 한 중국 대표단은 미국 국무장관 딘 러스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러스크 장관은 ”어차피 헛된 이념 때문에 수억명의 목숨을 걸고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미중협력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는데, 민국측의 조사에 의하면 이는 미국을 ‘배신’한 서유럽에 대한 응징을 바라는 국민여론의 반영이자 몇 년 전부터 외교라인을 장악해가던 “아시아 중시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결합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러스크 국무장관은 미국 정부가 중국 위안화의 금태환 가치를 보증해주는 방식으로, 미국과 완전히 대등한 파트너로서 중국을 대우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이 조건은 대번에 중국의 권력층을 찬반 양론으로 분할시켰고… 더 이상 인도 이야기는 주된 의제로 취급되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1990년 이전 소련을 제치고 경제규모로서 세계 2위에 오르게 된다는 예측이 보고됨으로써 잔난셴과 베이베이 등 일부 고위급 관계자들은 전율했습니다.
그러나 수석대표인 쑨유얀의 생각은 달랐고, 그녀는 미국이 사실상 파시스트 국가인 시리아와 인도연방을 후원하고 내부적으로는 민권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하는 등 “위험한” 정책을 지속 중이라는 점에 집중하여 “파트너로서의 신뢰성 부족”을 이유로 제안을 거절…하려 했습니다. 결정이 떨어지기 직전 베이베이 국가안전부 부부장이 경호원들을 동원해 마린 중장을 제압하고 쑨유얀을 무력으로 제지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지요.
결국 회의는 결렬되었고, 다음날로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에서 스티븐슨 대통령과 쑨커 총통이 인도 분단 및 미중무역 정상화를 골자로 한 “제한적 합의”를 발표하며 상황은 수습됐습니다. 결론적으로 중화민국은 최소한 인도공화국 정권을 보존해야 한다는 책무를 다하면서도 피해를 극단적으로까지 키우지 않는 데 성공한 셈입니다.
대부분 영전에 성공해 민국 권력의 최상단에 근접하게 된 왕년의 “신성”들은 “이번에도” 직접적 책임을 지는 일을 피하며 “어찌되었든” 상황이 잘 해결되는 모습을 본 셈입니다. 그러나 대가없는 영광은 없는 법. 중화민국의 미래는 모두의 영광을 연료삼아 미지와 혼돈에 빠져들 것이었습니다..
Epilogue.
캠프 데이비드 선언 이후 친중 북인도(공화국)와 친미 남인도(연방)은 익숙하다는 듯 적대적 공생에 접어들었고, 소련의 관료독재 보수주의 정권과 미국의 “보수적 뉴딜연합” 정권 역시 안정세를 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1956년 대선에서 무난하게 승리한 애들레이 스티븐슨 대통령이 1957년 2월 급진 흑인 민권운동가에게 암살당하며 세계질서는 혼란 속에 빠졌습니다. 미국의 혼란을 틈타 이탈리아에서는 아마데오 보르디가 총서기가 이끄는 공산당이 집권해버렸고, 모스크바와 베오그라드의 양방향 공세를 이기지 못한 서유럽은 미국의 충성스러운 개가 되기로 맹세했습니다. 미국 민주당의 당권을 장악한 남부 주권민주당의 스트롬 서몬드 대통령 역시 투표권과 인종분리가 각 주의 자율에 의해 판단할 사항이라고 선언, 미국의 정국 역시 암흑에 빠져버리고 말았죠.
재선 포기를 선언한 쑨커 총통은 1959년 라이징썬 전 행정원장에게 보위를 넘겨주었고, 부총통직은 당내 단결을 위해 원로인 류원후이에게 돌아갔습니다. 행정원장을 역임하던 쑨유얀은 (실질적 당수 역할인) 당 비서장이 되었죠. 관리형 지도자에 가까웠던 라이징썬 밑에서 실권을 잡은 것은 자연스럽게 다수여당의 수장인 쑨유얀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중국인들의 열망이 무엇인지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6억 중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은 마다하지 않았기에 철저한 대중주의 노선에 입각해 당의 체질을 바꾸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대중주의에 입각해 “모험적” 정책을 펼치려면 역설적으로 강력한 정책실현력을 담보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권력, 이를 뒷받침하는 강고한 관료체계가 필요했습니다. ”미쳐날뛰는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곡예를 부려야 한다“는 라이징썬과 쑨유얀의 의지가 맞아떨어져, 이들은 독일식 제도주의자이자 테크노크라트의 거두 잔난셴을 총통부 비서장으로 등용, 일선에 나서는 것을 극구 거절하던 류웨이 원수를 국방부장에 임명하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미국의 경제적 번영, 서유럽의 제도적 민주주의, 소련의 보편복지, 아시아적 가치의 확립“이라는 혼합정체를 추구하던 이 현실주의자들이 선택한 방법론은 정계와 관료사회, 재계가 강력히 유착한 “철의 삼각형”이었던 것입니다. 어느새 유태공화국에서 사업가로 부활한 베이베이가 각종 대외정책에 관여한 것 역시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효율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의 생산성을 저해하는 원흉으로 지적받은 한자는 라이징썬 집권기동안 적극적으로 추방되어 “국문(주음부호)”으로 대체되었고, 때만 되면 정치적 논쟁거리로 올라오던 반삼민특위 재판 논란은 재심 청구에 따른 “대타협”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발목을 잡는 정치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 아니,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 라이징썬 정권은 집단농장을 재건하여 농업생산성을 바닥까지 낮춘 소련을 곡물 수출로를 동원해 압박하고 미국의 앞마당에 왕이와 마린이 이끄는 “구 반제해방군”을 침투시켜 쿠바 정부를 카스트로 민족혁명당(Partido Revolucionario Nacional de Cuba, PRNC) 정권 하에 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중화민국은 삼민주의와 민족혁명주의 간의 그 어떠한 연관성도 부정했습니다만)
그러나 “테크노크라시를 통한 효율적인 대중 모험주의”라는 기괴한 키메라는 1964년 라이징썬이 총통 재선을 포기할 무렵 오히려 국민당 정권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있었습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운동까지 민족혁명주의에 감화되고 이를 참지 못한 미국이 자국 항공기를 납치하는 자작극까지 펼친 끝에 중미에 대한 대대적 공세에 나서고, 소련이 쿠르드 반군을 이용해 터키를 전쟁터로 만들며, 다시 유럽에서는 미국이 스웨덴을 NATO에 편입시키는 일대 대혼란이 벌어지는 세기말의 분위기 속에서… 새로 집권한 쑨유얀 총통은 임기 시작부터 그간의 “효율”이 “덫”으로 변하는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미중소 3대 열강은 국경지대나 제3세계에서 끝없는 “세력 과시 전쟁”이라 불리는 괴상한 양태의 무력대결을 펼쳐댔고, 정권의 정경유착과 부패를 참지 못한 이들이 국민당에서 집단 탈당해 민주사회당, 민주당, 심지어 무덤에서 부활한 연성자치론자들이 치공당까지 재건하며 국민당은 라이벌인 농공민주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하는 지경에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카스트로 형제, 왕이, 체 게바라, 마린, 프란시스코 라모스 등이 이끄는 카리브 민족혁명주의 정권이 미국의 남미정책(즉, 마약 밀매를 통한 ‘더러운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 대가로 혁명의 내적 완결을 인정받을 무렵인 1965년, 태평양을 한 번 더 건너 신흥종교와 결합한 민족혁명사상인 “관념부흥”… 즉 “관념 측면의 대혁명”을 주장하는 “문화혁명홍위병단”이 혼란한 사회분위기를 틈타 급격히 세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쑨유얀 정권은 유태공화국 정권의 비호를 받던 베이베이를 유인해 제2차 광동 엄타를 실현하고 그를 정보중개상으로 용도변경함으로써 위기에 대처하려 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옛 전우 라이징썬이 정권의 무능을 비판하며 1969년도 총통선거에 재출마하겠노라고 선언하고 군부가 끊임없이 “구국의 결단”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은퇴한 류웨이를 종용하는 동안, 카리브 혁명의 기수 마린이 중화민국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중화민족혁명당(족명)이라는 좌익 급진주의 정당은 (그들 기준으로 사이비 종교집단에 불과했던) 문화혁명홍위병단을 길거리에서 린치하는 등 과격하게 짓밟았고, 타락한 국민당의 삼민주의 국민혁명 이념을 계승할 이는 자신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여러 번의 군사쿠데타 시도를 자신의 영향력만으로 억제하던 류웨이가 “이번에야말로” 군부 및 “보수주의” 유권자들의 지지를 업고 총통직에 나서겠노라 선언하는 형국이었습니다.
베트남이 기어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괴뢰화 - 태국과 전쟁상태에 돌입하며 시리아가 이집트와 전쟁을 벌이고 미국과 영국이 남아공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노던케이프 핵시설에 전술핵을 발사하는 “세계의 백열 상태”가 지속되면서, 세 번째 대전쟁을 막는 문턱은 점점 낮아졌습니다. 달콤한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쑨유얀, 군부의 압력을 이용해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류웨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놓겠다는 라이징썬, 혁명의 방향을 수정하겠다는 마린, 그리고 정치이념 그 자체를 문제삼으며 순수한 테크노크리시를 추구하는 잔난셴까지… 각자 다른 이상을 품은 다섯 명의 “옛 신성”들은 1967년이 된 지금까지도 “민국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파멸을 예고할지라도 말입니다…
모두들 한달 반 가량의 긴 여정을 즐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 다시 돌아올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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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3.04 중정, 경호실, 보안사가 무력화되고 옳은 정보와 적의 역정보, 심지어 남침 이전 보안사가 뿌린 정보오염을 구분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정찰총국 병력이 보안사를 습격해 구금되어 있던 김재규와 정승화를 납치하는 초유의 사태마저 벌어졌습니다. 적 병력이 서울 이곳저곳을 누빈다는 것은 곧 육본, 수경사, 총리공관이 함락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신호였죠.
그 누구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던 비상식적인 순간에,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팬텀기 1개 편대가 군산에서 이륙했습니다. 미군과 국군이 기지를 나누어 쓰는 군산기지의 특성 상 이는 국군 항공기의 요격활동으로 여겨졌지만, 용산에까지 들이닥친 특작병력과 교전 중이던 미8군 사령부 본대는 그야말로 뒤집어졌습니다.
그 팬텀기 편대가 340kT 위력의 B61 전술핵탄두를 싣고 평양으로 향한다는 소식이었죠.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3.04 뒤늦게 이 항공기들을 추적해 요격하려 했던 미군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NLL을 넘은 상태였으니까요. 대노했던 위컴 사령관 역시 서울을 방위하기도, 정부 요인들을 데리고 피신하기도 어려운 시점에는 차라리 참수작전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오히려 MGM-52 랜스 미사일을 북한의 주요거점으로 날려버렸습니다.
비록 팬텀 편대는 평양의 방공망을 뚫지 못한 채 핵탄두를 엄한 곳에 뿌리고 말았지만, 미군이 발사한 중성자탄의 위력은 상당했습니다. 마치 무선침묵이라도 지시한 것처럼 북한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붕괴했고, 소련과 중국은 핫라인을 가동시켜 워싱턴 DC에 비상연락을 취했습니다. 물론 다섯 자리수에 달하는 소련의 핵미사일들이 발사준비태세가 들어간 상태였죠.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3.04 한반도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사건을 카터 행정부는 어떻게든 수습하려 나섰습니다. 12월 13일 (한국 시각) 오전 7시, 국군 지상병력이 난장판이 된 서울을 두고 무작정 북진에 나서는 와중에도 카터, 브레즈네프, 덩샤오핑은 세계를 불태우지 않기 위한 물밑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 주요인물들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시점에 한반도 북부를 지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묵인을, 덩샤오핑은 중월전쟁에 대한 협조를 요구했습니다. 다시 브레즈네프와 덩샤오핑이 각자의 이권영역을 존중한다고 약속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긴 하루는 막을 내렸습니다.
결국 한반도는 잿더미 속에서 통일되었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정권을 지켜냈으며, 중국군이 베트남군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다 죽어가던 크메르 루주가 다시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3.04 과연 처음 군산기지에서 핵탄두를 무단 불출해 평양에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가 누구였는지는 오랫동안 비밀에 싸여 있었습니다. 1988년 나고야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미중소 3개국 정상이 전략무기제한협약에 서명할 무렵 발표된 한 장의 회고록이 전세계를 뒤흔들기 전까지는 말이죠.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핵개발을 진두지휘하던 청와대 경제3수석이자 예비역 대장 정원상이 모든 전모를 밝힌 것이었습니다…
(끝?)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4.03.04 E.E.샤츠슈나이더 오.. 역시 핵의 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