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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공화국은 아직 죽지 않았다 - (2)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6.06.17|조회수197 목록 댓글 580


“인격은 하나의 절대이다. 그것은 결코 어떤 전체의 일부로 간주될 수 없다 - 가족, 계급, 국가, 민족, 인류라 할지라도.”
- 에마뉘엘 무니에(Emmanuel Mounier), 『인격주의에 봉사하는 선언』, 1936년.





5. 바르셀로나 회의

아스투리아스의 패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사망자와 수감자의 숫자는 이미 통계가 되었지만, 그 숫자가 남긴 정치적 책임은 누구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PSOE 중도파는 라르고 카바예로의 급진노선을 비판했고, 카바예로는 오히려 불완전한 단결이 패배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CNT는 너무 자주 따로 움직였고, PCE·BOC·ICE·PCP는 각자 혁명적 진실을 말하면서도 하나의 조직으로 묶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좌파의 단결, 자르에서의 독일공산당의 전환, 그리고 아스투리아스의 참패는 스페인 혁명좌파를 같은 방 안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이날 바르셀로나에는 PCE, BOC, ICE, CNT, 생디칼리스트당, USC, PCP, UGT, JSE가 모였습니다. 중심 의제는 명확했습니다. PSOE 왼편에 있는 혁명적사회주의 통합당의 창당이었습니다.

레옹 드 클레르퐁은 팔미로 톨리아티와 함께 회의장에 들어왔습니다. 코민테른은 PCE를 스페인 내 정식 가맹정당으로 보고 있었고, 톨리아티와 레옹의 기본 임무는 그 정통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스페인 혁명좌파를 통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PCE가 그간의 제3기 노선과 종파주의 탓에 이미 너무 약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호세 디아스와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최근 프랑스와 자르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희망이었지만, 그것만으로 BOC와 ICE를 설득할 수는 없었습니다.

루이앙리 드 콩티브리삭은 런던 뷰로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는 BOC와 ICE의 대표들을 살폈습니다. 조아킴 마우린과 에마누엘 골드스테인의 BOC는 부하린주의 우익반대파와 룩셈부르크식 평의회주의 사이에 있었고, 안드레우 닌의 ICE는 트로츠키주의적 색채가 훨씬 강했습니다. 이들은 PCE를 불신했지만, 그렇다고 PCE와 영원히 등을 돌린 채 혁명을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르그리트 드술리는 UGT와 CNT의 공동 초청, 그리고 CGT-CGTU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녀에게 이 회의는 정당 이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같은 거리에서 서로 다른 깃발을 들고 충돌하지 않게 만드는 문제였습니다. 특히 CNT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FAI는 CNT가 정당과 협력하려 할 때마다 배신을 말했고, 생디칼리스트당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문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회의 초반, PCE의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혁명적 사회주의 계열의 단일한 당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코민테른 21개항 조건에 따라, 국제공산주의의 정식 지부인 PCE 중심의 통합”을 말하는 순간 회의장은 곧바로 술렁였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왜 우리가 동지들 밑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소란이 커지자 레옹은 톨리아티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코민테른과 PCE가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말하기보다, 받아들일 수 없는 선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낫다고 제안했습니다. 톨리아티는 잠시 생각한 뒤 회의장 전체를 향해 코민테른의 금지선을 제시했습니다. 통일당은 부르주아 공화주의와의 혼합물이 될 수 없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원칙을 부정할 수 없으며, 국제공산주의의 공동전선과 소련 방어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영구적 공개분파는 허용될 수 없으나, 토론 뒤 결정된 행동에는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톨리아티는 마지막으로 루이앙리를 바라보며 질문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이제 문제는 “누가 누구 밑으로 들어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원칙 없이는 단일당이 단일당일 수 없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루이앙리는 속으로 톨리아티를 욕했지만, 회의가 터지는 것은 막아야 했습니다. 그는 즉석에서 최소한의 회의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상대 정파를 근거 없이 비난하지 말 것, 통일당 또는 정파 간 동맹 문제는 PCE·BOC·ICE 세 혁명정파의 만장일치 없이 의결하지 말 것, 발언권을 얻고 나서 발언할 것. 이 조치로 회의장은 완전히 진정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협상장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BOC와 ICE가 공동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골드스테인은 모든 정파가 자체 해소 절차를 거친 뒤 신설 통합당에 참여해야 하며, 어느 한 조직이 다른 조직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새 당의 명칭, 중앙위원회, 강령, 기관지는 모두 창립대회에서 결정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당내 자유토론과 경향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닌은 여기에 덧붙여, 통일당은 모스크바의 전보를 받는 기관이 아니라 스페인 혁명의 정당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소련 방어와 국제 반파시즘 공동행동은 인정할 수 있지만, 스페인 정세 판단은 스페인 노동자와 농민의 현실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별도의 축에서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먼저 UGT의 입장을 파악했습니다. UGT 좌파 간부 아마로 델 로살은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UGT는 반파시스트 통일행동을 원하지만, 새 혁명정당이 UGT나 CNT를 지휘하는 구조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스페인에서 노조는 단순한 임금투쟁 조직이 아니라 거리의 질서, 노동현장의 방어선, 공화국이 무너진 뒤에도 남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입니다. UGT가 어느 새 당의 지휘를 받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CNT는 회의장을 떠날 것이고 UGT 내부도 카바예로파, 프리에토파, 온건 노조간부들로 갈라질 것이었습니다.

CNT 측에서는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이 입장을 밝혔습니다. CNT는 파시스트와 싸우는 공동행동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행동이 어느 정당의 지휘 아래 놓인다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공동행동을 원한다면 지역별 노동자위원회로 하되, UGT와 CNT가 의결권을 가지고 정당은 간사와 제안권만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CNT 전체를 정면으로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카탈루냐에서는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1934년 10월 사건 뒤 콤파니스의 자치정부는 무너졌고, 중앙정부의 어용 헤네랄리타트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콤파니스의 이름을 잇는 지하 자치정부, 즉 정통 헤네랄리타트를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ERC, USC, PCP 등 카탈루냐 좌파정당의 감독 아래 UGT와 CNT가 공동 운영하는 노동자 방위기구를 만들고, 무기는 책임 있는 등록 단위에만 지급한다는 방안이 제시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객관적 기준이었지만, 실제로는 FAI와 CNT 급진파를 제도 밖으로 밀어내는 장치였습니다.

UGT는 이 안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온건파에게만 무기를 준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공식 문구는 “책임 있는 공동방위기구에 등록된 단위에만 무기를 배정한다”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실상 같은 말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말이었습니다.

한편 레옹은 공산당 측 협상전략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바라면서 코민테른의 노선을 선택적으로만 따르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주장했고, 강령의 주요 사항은 창립대회 전에 예비협약으로 정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또한 통합당은 스페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은 폭탄이었습니다. 닌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것이 통합 제안인지 항복 요구인지 되물었습니다. PCE가 지난 수년간 종파주의로 약해졌는데, 왜 더 큰 조직들이 더 작은 PCE에 흡수되어야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레옹의 목적은 처음부터 모든 조건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골드스테인은 이 의도를 읽고, 세 번째 조건은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UGT와 CNT를 강제로 통합당의 지휘 아래 둘 물리적 수단도 없고 정치적 명분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에는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통합당은 코민테른에 종속된 당은 아니되,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한 축으로 기능할 수 있었고, 창당 전 예비협약을 통해 최소 강령을 정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 순간 톨리아티가 움직였습니다. 그는 골드스테인이 말한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통일된 노동자 정당”이라는 표현을 받아, 칠판에 새 당의 가칭을 적었습니다.

Partido Obrero de Unificación Marxista.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

이어 톨리아티는 진짜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POUM은 모든 정파가 자체 해소과정을 거쳐 신설창당하는 통일당이 될 것. 다만 POUM 내부에는 공산주의 경향이 공식적으로 인정될 것. 이 경향은 반당적 영구분파가 아니라 당내 공식 경향으로, 중앙위원회와 정치국 지분 4할을 가질 것. POUM은 스페인의 유일하고 단일한 노동자 혁명정당으로서 일국일당 원칙을 만족할 것. 그리고 POUM은 소련을 방위하되, 세부 방식은 스페인과 지역 정세를 고려할 것.

루이앙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톨리아티는 PCE가 스페인 혁명좌파를 영도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으로서 21개항을 정면으로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PCE를 새 당 안의 공산주의 경향으로 재배치하고, 코민테른의 명분과 스페인 현실 사이를 법기술적으로 이어붙였습니다. 그것은 혁명가의 선언이라기보다, 코민테른의 변호사가 만든 정교한 우회로였습니다.

그 결과 이베리아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 약칭 POUM-I가 창당되었습니다. 편의상 모두가 POUM이라 부르게 될 이 당에는 PCE, BOC, ICE, PCP 등이 참여했습니다. 카탈루냐 사회주의 공화국을 주장하던 PCP는 카탈루냐 자치주의 경향으로 소수 지분을 인정받았습니다. 레옹은 이 타협에 찜찜함을 느꼈지만, 실질적 헤게모니는 공산주의 경향이 가져갈 가능성이 컸습니다. 코민테른의 지원은 결국 그들을 통해 들어올 것이고, 당 노선의 해석권 역시 최대 지분을 가진 그들에게 쏠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골드스테인, 마우린, 닌도 그 점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혁명에 주도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그 주도세력이 당내 다양성을 짓밟지 못하게 할 최소한의 안전장치였습니다. 골드스테인이 1917년부터 1921년까지 꿈꾸었으나 크론시타트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던 계획이, 바르셀로나에서 기묘한 형태로 결실을 본 셈이었습니다.

동시에 카탈루냐에서는 또 하나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콤파니스가 감옥에 있는 동안, 호세프 타라델라스는 정통 자치정부, Generalitat legítima를 선언했습니다. 이 정통 자치정부는 ERC, USC, POUM-C, 생디칼리스트당 등으로 임시집행부를 구성하고, 이들이 집단적으로 감독하는 카탈루냐 노동자 방위위원회, CDOC를 설치했습니다. CDOC는 무기 장부, 선출 책임자 등록, 통합지휘부의 지도를 조건으로 무기 지급을 관리했습니다. 조건을 따르지 않는 단위에는 무기가 가지 않았습니다. FAI와 CNT 급진파는 자연스럽게 배제되었습니다.

FAI 계열 단위들은 격렬히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부 총질을 시도하려는 순간, 자신들에게 충분한 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은 여기저기서 진압되거나 고립되었습니다. 그 결과 CNT는 훨씬 온건해졌습니다. CNT가 노조 독립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제 그 독립성은 FAI식 무책임한 직접행동이 아니라, UGT와 병렬로 서는 공동방위의 언어로 표현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뜻밖의 수혜자는 라르고 카바예로였습니다. 그는 본래 아스투리아스와 카탈루냐의 패배 책임을 피해가며 좌익 분열을 비판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POUM이 창당되고, UGT와 CNT 온건파가 공동방위 논의에 들어왔으며, FAI는 고립되었습니다. 카바예로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가 실제 권력 장악으로 이어진 것처럼, 그가 “좌익은 단결하라”고 외치자 정말로 좌익이 단결한 것입니다.

이제 프리에토와 베스테이로는 카바예로의 당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네그린 역시 상황을 관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바예로는 더 이상 말만 앞서는 급진파가 아니라, 뜻하지 않게 현실이 따라붙은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공화좌파의 반응은 복잡했습니다. 마르셀리노 도밍고의 급진사회공화당 계열은 이 흐름을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공화국이 살아남으려면 더 강한 사회개혁과 노동자 동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누엘 아사냐의 공화행동 계열은 PSOE의 좌경화와 POUM의 성장을 우려했습니다.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 등 갈리시아 자치주의자들은 조금 더 지켜보자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의외로 바스크민족당 PNV는 이 변화에 꽤 긍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POUM과 PSOE의 성장은 불안했지만, CNT 급진파가 억제되고 UGT가 카탈루냐 정통 자치정부를 옹호한다는 점은 중요한 신호였습니다. PNV는 좌파와 이념적으로 가까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중앙집권 우파와 군부보다, 질서 있는 좌파와 협상하는 쪽이 바스크 자치권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스페인 인민전선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좌파정치의 축은 실제 역사보다 훨씬 왼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공화좌파는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지만, 1935년 내내 우파정부에 대한 비판을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면서 주변화되었습니다.

아사냐, 도밍고, 키로가는 레루스의 변절과 부패, 알칼라사모라의 카이사르주의, 힐로블레스의 가톨릭 권위주의, 군부의 반공화주의를 법적·제도적 언어로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지루하고 현학적으로 들렸습니다. 반면 카바예로는 노동자 방위, 정치범 즉각 석방, 레케테를 비롯한 우익 무장조직의 즉시 해산, 지역자치 즉시 복구, 군부 숙청을 말했습니다. PSOE의 절대적 지지와 POUM의 비판적 지지를 동시에 받는 그의 언어는 훨씬 직접적이었습니다.

우파 역시 그만큼 더 편집증적으로 반응했습니다. CEDA는 아직 합법적 우익정당이었지만, 당내 강경파와 청년대중행동 JAP는 카를리스트 레케테, 팔랑헤 조직과 지역별로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공화파 노동자와 정치인을 공격했고, 거리의 폭력은 점점 일상이 되었습니다.

1935년의 스페인은 아직 전면 내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듯, 천천히 옷이 젖듯, 저강도 내전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 공화국의 ‘신민’

1935년 3월 30일, 피에트리 내각은 알제리에서의 반국민적 시위와 프랑스 주권에 반하는 선동을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레니에 법령을 공포했습니다. 법령은 알제리 안에서 프랑스의 주권과 공화국의 권위를 훼손하는 시위, 집회, 연설, 행진, 구호, 노래, 인쇄물, 기타 선전행위를 공공질서 침해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알제리 통치권을 부정하거나, 그 영토적 완전성을 의심하게 하거나, 주민들을 프랑스에 대한 충성의 의무에서 이탈하도록 선동하는 행위도 처벌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겉으로는 치안법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문구는 지나치게 넓었습니다. 폭력과 무장선동을 막는다는 명분은 알제리에서 너무 쉽게 시민권 청원, 아랍어 교육 요구, 행정처분 비판, 경찰권 남용 항의까지 삼킬 수 있었습니다. 알제리는 프랑스라고 불렸지만, 그 땅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무슬림 주민들은 프랑스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금을 내고, 군복무를 하고, 행정명령에 복종했지만, 프랑스 정치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공화국은 그들에게 의무를 요구하면서도, 그들이 시민처럼 말하려 할 때 그 말을 치안문제로 바꾸려 하고 있었습니다.

4월 2일 저녁, 파리 9구 《마리안》 편집실 뒤편 회의실에서 마르셀 포쿠아는 관보와 알제리 무슬림 선출직 대표들의 탄원서를 펼쳐놓고 법령을 검토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SFIO 소속 법률가이자 경제학자인 앙드레 필립도 함께했습니다. 마르셀은 법령의 핵심 취약점이 “프랑스 주권에 반하는 선동”이라는 문구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문구는 총을 든 자와 탄원서를 든 자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시민권을 요구하는 말, 아랍어 학교를 요구하는 말, 경찰의 자의적 처분을 비판하는 말까지도 총독부나 경찰의 손에서는 반프랑스 선동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필립은 이 문제를 법률가의 언어로 정리했습니다. 구성요건은 불명확했고, 행정권은 개인의 의도를 임의로 추정할 수 있었으며, 정치적 자유는 경찰과 총독부의 관할로 넘어갈 위험이 있었습니다. 필립은 이 법령이 폭력을 처벌한다기보다 알제리인의 마음속에 반역의 뜻이 있다고 추정하고, 그 추정된 의도를 처벌하려 한다고 보았습니다.

마르셀은 처음에는 철회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필립은 즉각 철회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이 법령은 중도우파 정부의 법령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급진당 원로들과 중도파가 묵인한 질서의 언어이기도 했습니다. 정면으로 공격하면 상원 내 급진공화파와 급진당 주류를 불필요하게 결집시킬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마르셀은 철회 요구 대신, 정부가 스스로 법령의 적용범위를 명확히 하게 만드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법령이 정말 폭력과 무장선동을 겨냥한 것이라면, 시민권 청원, 교육 요구, 행정처분 비판은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명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르셀은 앙드레 필립과 함께 “폭력 선동과 시민권 청원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논지의 비판문을 작성했습니다. 그것은 격렬한 고발문이 아니라, 급진당 중도파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적·정치적 논설문이었습니다. 이 글은 곧 달라디에파 급진사회당 의원 마르크 뤼카르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뤼카르는 사회주의자들의 도덕적 고발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정부가 폭력 아닌 것을 폭력 아닌 것으로 명시해야 한다는 논지에는 동의했습니다. 그는 하원 질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음 날 하원 질의는 곧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뤼카르는 내무장관에게 시민권 청원이나 아랍어 교육 요구가 레니에 법령의 적용대상이 될 수 있는지 물었지만, 장관은 가정적 상황에는 답할 수 없다고 회피했습니다. 뤼카르가 현지에서 실제로 벌어질 문제라고 지적하자, 급진당 원로와 우파 의원들이 장관을 두둔하며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정부는 끝내 법령의 범위를 명확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르셀은 적어도 하나의 문장을 정치권에 남겼습니다. 정부가 폭력 선동과 시민권 청원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질서가 아니라 침묵을 원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마르셀은 이어 파리 체류 알제리 무슬림 대표와 지식인들을 비공개로 만났습니다. 울레마 협회 주변의 온건 개혁파 인사인 셰이크 압델라티프 벤누르가 그 중 대표였습니다. 벤누르는 카이로에서 유학한 아랍어 교사이자 개혁파 무슬림이었습니다. 마르셀은 처음에는 그를 샤리아법에만 경도되어 프랑스 공화주의 시민권의 원칙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종교 보수파로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벤누르의 프랑스어는 유려했고, 그의 논리는 뜻밖에도 정교했습니다.

벤누르는 시민권이 학교에서 아랍어를 지우고, 가정에서 무슬림 개인법을 부끄럽게 만들며, 모스크의 언어를 경찰의 의심 아래 두는 것이라면, 그것은 평등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된 더 세련된 침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프로테스탄트가 자기 신앙을 버리지 않고도 프랑스 시민으로 인정받았는데, 왜 무슬림만 자기 자신을 덜어내야 시민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시민권을 특권으로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민권이 종교와 언어의 포기각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르셀은 그제야 시민권 문제가 단순히 프랑스 법 앞의 평등 문제로만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알제리 무슬림에게 시민권은 권리의 문이면서 동시에 정체성 포기각서가 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은 곧 또 다른 딜레마를 열었습니다. 프랑스 공화주의 전통은 법 앞의 단일한 시민을 전제했습니다. 개인법과 언어, 종교적 공동체를 유지한 채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발상은 프랑스 혁명이 폐지했다고 믿었던 신분적 예외를 다시 불러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면 알제리 무슬림은 시민권의 문 앞에서 계속 자기 자신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미셸 부스케는 같은 시각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와 장 제를 만났습니다. 미셸은 의회민주주의 공화국이라면 법령도 의회의 투표를 통해 적용되는 것이 원칙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알제리는 바로 그 원칙이 흐려지는 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 1834년 루이필리프 국왕의 오르드낭스 이후 알제리는 본토와 같은 방식으로 일반 법률 아래 편입된 것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프랑스령이라는 특수한 행정공간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총독부와 정부는 알제리의 행정, 치안, 원주민 통치에 관해 매우 넓은 명령권을 행사해 왔습니다. 문제는 불법이라서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합법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미셸은 이 법령이 단순한 알제리 문제를 넘어 공화국의 행정관행을 오염시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늘 알제리인의 청원이 프랑스 주권에 대한 공격으로 분류된다면, 내일은 노동자의 처우개선 요구가, 모레는 지식인의 비판이, 그다음은 정부를 비판하는 의원의 연설이 같은 논리 아래 놓일 수 있었습니다. 공화국의 자유가 상황에 따라 행정부에 의해 유예될 수 있다는 선례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문제가 추상적 법치 논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법령은 무엇보다 알제리 무슬림에게 직접적인 탄압이 될 것이었습니다.

미셸은 망데스 프랑스, 장 제와 함께 알제리인 대표들을 만났습니다. 한 명은 콩스탕틴 출신 변호사이자 선출직 엘리트인 압델카미드 벤하미드였고, 다른 한 명은 오랑 출신 전직 부사관 무스타파 라흐마니였습니다. 벤하미드는 프랑스식 정장과 파리 상류층에 가까운 태도를 갖춘 인물이었고, 무스타파는 리프 전쟁에 참전한 전직 부사관으로 더 거칠고 현장의 감각이 짙었습니다.

미셸은 자유, 평등, 우애가 시민의 출생지나 혈통, 언어에 따라 선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벤하미드는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는 프랑스가 알제리 무슬림에게 가르친 것이 바로 그 원칙이었으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프랑스가 이미 요구한 의무와 같은 무게의 권리라고 답했습니다. 반면 무스타파는 자유와 평등 같은 말이 오랑의 무슬림 농민과 노동자에게는 너무 멀리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 말을 어느 창구에, 어느 언어로 내면 되는지 묻는다는 것입니다. 경찰서 유치장, 혼합코뮌 행정관 앞, 카이드 앞에서는 공화국의 단어들이 멈추었습니다.

미셸은 이들의 말을 들으며, 알제리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프랑스라고 부르려면 알제리 무슬림에게 권리를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권리를 주는 방식이 곧 프랑스인이 되는 방식의 강제라면, 그것은 또 다른 동화주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미셸은 알제리인들이 탄원서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파리를 움직이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장 제는 더 넓은 대표단의 항의방문을 제안했습니다. 반면 망데스 프랑스는 의원들이 직접 알제리로 가서 현지 실상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셸은 망데스 프랑스의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우파를 포함시키면 유럽계 정착민들의 원성만 듣고 돌아올 위험이 크고, 공산당원을 넣으면 시찰단 자체가 선전단으로 보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시찰단은 급진당 좌파와 중도파, SFIO 의원 등 약 10명 안팎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알제에 도착한 의원단은 총독 쥘 카르드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카르드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정착민 출신이자, 여러 식민지를 거친 식민행정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교양 있고 정중한 관료였습니다. 그는 총독부 고위공무원, 각 데파르트망 프레페, 경찰행정 관계자들을 불러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방 안은 전부 유럽인이었습니다.

카르드는 레니에 법령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탄압법이 아니라 알제리 행정을 위한 방어수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선전, 아민 알후세이니와 이집트 극단주의자, 와하비스트 선전이 알제리 무슬림에게 영향을 미치면 늦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알제리에서 한 장의 전단은 파리의 한 장의 전단과 같지 않으며, 말은 부족과 시장과 카페와 항구를 지나 곧 치안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셸은 카르드의 설명을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방 안에 유럽인 관계자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무슬림 주민 대표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카르드는 알제리 무슬림이 모두 아랍인은 아니며 카빌인과 베르베르인도 있다고 정중히 교정한 뒤, 총독부가 대표 간담회를 마련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셸은 총독부가 선별한 온건 대표들만 만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결국 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직접 현장을 보러 나갔습니다. 현지 음식이 맞지 않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일정을 빠져나갔고, 정착민 농장주처럼 보이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는 유쾌하고 시끄러운 베르베르인 통역 가이드를 데리고 알제 교외의 한 혼합코뮌으로 향했습니다.

마을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먼저 몰려왔고, 어른들은 낯선 유럽인이 베르베르인 통역과 함께 온 것을 불길하게 여겼습니다. 추가 세금, 경찰조사, 토지측량 같은 단어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드의 사람이 찾아왔고, 미셸은 거의 초대인지 소환인지 모를 방식으로 카이드 압델말리크 벤라흐센의 집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압델말리크는 혼합코뮌 행정관의 현지인 보좌관이자, 주민과 프랑스 행정 사이를 잇는 중간자였습니다. 그는 미셸이 파리에서 온 사람임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미셸이 듣고 싶은 말은 아마 총독부가 임명한 행정관과 카이드가 무슬림 주민을 탄압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 역시 행정관이 세금을 요구하면 그 세금을 마을 안에서 나누어야 하고, 경찰이 이름을 요구하면 이름을 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거부하면 다른 카이드가 올 것이며, 그가 더 나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압델말리크는 이 땅이 오래전부터 비슷한 구조를 반복해 왔고, 100년 전 튀르크인 술탄이 프랑스 국왕, 황제, 대통령, 총리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프랑스 지배만을 변명하는 것도 아니고, 프랑스 지배만을 고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식민지 행정이 기존의 지역 권력관계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프랑스식 명령체계 안에 재배치했다는 말이었습니다.

미셸은 주민들이 지금 상황에 만족하는지, 종교와 언어를 버리지 않아도 시민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대표를 직접 뽑을 수 있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를 물었습니다. 압델말리크는 제 앞에서는 모두 만족한다고 말하겠지만, 집에서 따로 묻는다면 세금, 징병, 읽을 수 없는 서류, 멀리 있는 행정관,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카이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프랑스 법에 대해 말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신앙과 언어를 버리지 않아도 시민이 될 수 있다면 도시의 젊은이, 참전용사, 군 복무 경험자들은 환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농촌은 훨씬 천천히 움직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주민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추상적 시민권보다 벌금이나 구금에 대해 항의할 통로, 세금과 토지, 징병, 경찰조사 문서의 현지어 번역, 그리고 행정처분에 이의를 제기할 절차였습니다. 프랑스어 서류는 곧 권력이었고, 주민들은 자신이 무엇에 서명하는지, 얼마를 왜 내는지, 땅 경계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압델말리크는 파리에서 열의 있는 사람들을 보내 몇 달에서 몇 년 동안 실제 농촌을 보고 듣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총독부와 프레페, 수프레페, 행정관, 카이드를 거쳐 내려오는 보고만으로는 주민의 실상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알제리 농촌의 구조를 보여주는 보고서였습니다. 미셸은 단순 행정권자를 보내면 그 역시 현지 유력자와 행정망에 포섭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지사회에 대한 관찰과 기록에 관심이 있는 학자를 보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는 얼마 전 만난 젊은 좌파 인류학자 자크 수스텔을 떠올렸습니다.

시찰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뒤에도, 레니에 법령은 결국 별도의 개정 없이 시행되었습니다. SFIO와 급진당 좌파는 형사처벌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지만, 이 뜨거운 감자를 맨손으로 쥐려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달라디에와 급진당 중도파는 “우려는 표명했다”는 기록만 남기는 선에서 물러났고, 법령은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급진당을 즉시 터뜨리고 상원 내 급진공화파와 하원의 좌파연합 사이를 복구불능으로 만드는 일은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법령은 알제리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알제리 문제는 완전히 묻히지 않았습니다. 장 제는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와 함께 알제리 무슬림에 대한 기초교육과 시민교육을 강화하는 법안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ENA와 울레마 협회는 이를 동화주의적 식민제국주의 발상이라고 비난했지만, 장 제와 망데스 프랑스는 동화주의가 아니라 시민적 융합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알제리의 많은 이들에게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자크 수스텔과 그 동료들이 향후 알제리에 파견될 길도 열렸습니다. 수스텔은 알제리인 시민권 문제를 단순한 법적 상태가 아니라 프랑스 시민성의 확산과 국민적 복지 증진의 문제로 접근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는 참정권과 시민권을 분리하는 방안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지방정치 참여는 넓히되, 프랑스 시민권과 개인법 지위의 분리는 가능한 좁게 인정한다는 발상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혼합코뮌마다 농촌행정지원소를 설치하여 조세, 치안, 보건, 교육, 농업, 민원, 행정감찰에 이르는 공화국의 도움의 손을 뻗치는 방안을 구상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도움의 손은 언제나 감시의 눈이기도 했습니다. 이 발상은 선의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끝은 결국 동화주의적 논리에 맞닿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레니에 법령 논쟁은 알제리의 법적 통치 근거에 대한 질문을 남겼습니다. 브르타뉴, 가스코뉴, 바스크, 피카르디가 왜 프랑스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별도의 오르드낭스가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곳은 왕국과 혁명과 법률을 거쳐 프랑스가 되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알제리는 프랑스라고 불리면서도 여전히 1834년 정복 직후의 오르드낭스와 총독부의 명령체계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정말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다면, “알제리는 프랑스이다”라는 말 역시 법적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조용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알제리 문제는 결국 프랑스 공화국이 100년 전에 저지른 억지의 후폭풍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문화적으로 본토와 전혀 다른 사회를 정복한 뒤, 그것을 본토와 일체인 공간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제 와서 그 결정을 없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많은 유럽계 정착민이 그곳에서 실제 삶을 영위했고, 너무 많은 행정과 법률과 경제적 조치가 쌓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알제리 무슬림을 영원히 신민으로 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진보파가 택하려는 길은 더욱 모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알제리 무슬림에게 공화국의 학교와 행정, 복지와 참정권을 제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곧 강제 시민화가 될 위험을 품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도로와 학교, 병원과 지방의회를 세웠다고 일본 지배가 정당화되지 않듯, 알제리에 학교와 병원, 행정지원소와 지방참정권을 제공한다고 프랑스 지배가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습니다. 알제리를 프랑스라고 부르려면 알제리인을 시민으로 만들어야 했고, 알제리인을 시민으로 만들려면 이슬람, 아랍어, 개인법, 가족과 공동체의 질서가 프랑스 공화주의와 충돌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공화국의 보편주의는 모든 사람을 같은 법 앞에 세우려 했고, 알제리 무슬림의 현실은 그들이 자기 언어와 신앙, 가족법을 버리지 않고도 권리를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과 급진공화주의자들은 레니에 법령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를 더 이상 단순한 치안문제로만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변경이자 공화국의 균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균열을 메우려는 모든 시도는, 앞으로도 공화국의 이름으로 또 다른 강제를 낳을 가능성을 품고 있었습니다.




7. 헤어질 결심?

1935년 5월 13일, 늦은 점심을 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에 급진당 좌파 모임이 열렸습니다. 긴 탁자 위에는 막 끝난 지방선거 결과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붉은 연필로 표시된 선거구들은 승리의 표식이라기보다는 경고처럼 보였습니다. 곳곳에서 급진당 후보들은 거리 우익, 참전군인 리그, 농민 선동가, 가톨릭 국민우파 후보에게 밀렸고, 2차투표에서야 사회주의자들의 사퇴와 지지 덕분에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특히 루아르에셰르 선거구 하원의원 보궐선거가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곳은 상원의원으로 옮겨간 당 원로 카미유 쇼탕의 영지나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쇼탕이 지역구를 물려준 에밀 로랑은 1차투표에서 농민운동 극우 앙리 도르제르에게 참패했고, 결국 3등이었던 SFIO 후보가 양보해줘서야 간신히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공화국이 이겼다”고 말했지만, 방 안의 젊은 급진파들은 그렇게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이 결과지는 급진당이 더 이상 혼자 공화국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증거였습니다. 우파와 애매하게 손잡은 지역은 흔들렸고, 좌파와 손잡은 지역은 버텼습니다.

긴 탁자 위에는 선거 결과지뿐 아니라 기사 스크랩들도 놓여 있었습니다. 스트레사에서 프랑스·영국·이탈리아 3국 수상이 로카르노 조약의 유효성을 재확인했으나 아비시니아 문제에는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는 기사, 그리고 2년 징병 연장안이 급진당 의원들에게 충분히 회람되지도 않은 채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급진당 우파 원로들과 상원의 자칭 급진공화파들이 찬성하거나 묵인한 정책의 결과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피에르 코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당이 공식적으로 참여 중인 내각에서조차 급진당 의원들이 중요 정책을 사전에 설명받지 못했고, 표결에서 반대하면 다음 선거에서 배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대로는 급진당에 미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가 이미 보여주었듯, 우파와 함께하면 죽고 선명성을 강조하면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코트는 이참에 갈라서자고 주장했습니다.

상근 정치인이 되자마자 당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된 장 뒤퐁은 머리를 긁적이고 싶은 마음을 참았습니다. 그는 농담 섞인 투로, 온건한 어르신들이 젊은 좌파들이 반대할 것을 예상했다면 그만큼 주의력이 깊은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거리에서 들은 소문들을 꺼냈습니다. 장이 상가, 인쇄소, 카페, 신문판매대, 술집에서 들은 말들은 거칠지만 일관적이었습니다.

급진당은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성직자와 왕당파, 반드레퓌스파에 맞서 공화국을 지키는 당이었지만, 이제는 자기 의석을 지키느라 바쁜 당이라는 평판이 퍼져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급진당 후보가 사회주의자의 목발을 짚고 당선된다고 조롱했습니다. 참전군인회 주변에서는 급진당이 아직도 드레퓌스 사건을 어제 일처럼 말하며 늙은 공화국의 기억 속에 갇혀 있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미셸 부스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이제 유권자들에게 어정쩡한 중도보다 선명한 태도가 더 잘 먹히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파 쪽 이야기이긴 하지만, 독일에서도 중앙당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나치가 치고 올라온 선례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어 급진당 청년조직, 지방당, 당 실무라인의 분위기를 살폈습니다.

청년조직은 가장 선명했습니다. 이대로라면 급진당은 우파의 보조바퀴로 전락하거나 사회주의자들에게 짓눌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지방당의 호소는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유권자들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했고, 익숙한 얼굴을 찍어달라거나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극우를 막아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실제 표로 돌아온 것은 사회주의자 후보가 2차투표에서 급진당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다음이었습니다.

반면 지방의 선거기계, 즉 표를 실제로 가져오는 당 실무자들의 반응은 더 냉정했습니다. 원로들이 당을 목졸라 죽이고 있는 것은 맞지만, 청년 투르크들은 당을 칼로 찔러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이 갈라지면 후보가 둘로 쪼개지고, 지역 엘리트와 신문사와 후원자들이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관계망이 무너진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장은 결국 실적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주머니에 돈이 돌지 않고, 전등을 켤지 옆집 알베르가 만든 초로 며칠 버틸지를 계산하는 현실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급진당은 여전히 실권을 장악한 당이니, 다른 당들이 희망만 줄 때 실제 성과로 민중을 돌아오게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미셸은 다르게 보았습니다. 지속적 이념대립에 노출된 유권자들은 더 이상 타협과 토론보다 선명한 구호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도르제르가 보궐선거에서 인기몰이를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피에르 코트는 의외로 침착했습니다. 그는 장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래서 급진당이 무슨 실적을 냈느냐고 물었습니다. 급진당은 내각에 들어가 있고 장관도 있고 위원회도 있으며 시장과 상원의원도 있지만, 레니에 법령에는 입을 다물었고, 징병 연장안은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끌려갔으며, 스트레사에서는 무솔리니에게 아비시니아의 문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고, 지방선거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의 양보 없이는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코트는 자신이 전위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후위대 노릇을 그만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상원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상원 의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민주좌파-급진공화연맹, 즉 GDPRR이 앞으로 급진당 좌파가 제출하는 법안들을 계속 막을 것이라는 분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내 좌파는 다음 선거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의정활동을 함으로써 당내 분란을 일으키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장 뒤퐁은 상원을 직접 찾아가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해봤어?”라는 말을 나폴레옹의 명언처럼 뻔뻔하게 인용하며, 당장 팔을 잘라버릴 수는 없으니 다친 팔이 어느 쪽인지 확인해보자고 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뤽상부르 궁전으로 직접 가보자는 말에 동의했습니다. 장 제도 상원에서 얼마나 우호세력을 끌어올 수 있는지 계산한 뒤 전략을 짜자고 정리했습니다.

다음 날, 뤽상부르 궁전은 아침 햇빛 아래에서도 늙어 보였습니다. 회랑의 대리석은 광택이 빠져 있었고, 벽의 금빛 액자 안에는 오래전에 죽은 공화국의 얼굴들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상원의원들은 궁전의 일부처럼 움직였습니다. 검은 외투, 은빛 머리, 느린 걸음, 낮은 헛기침, 그리고 모든 새로운 제안 앞에서 자동으로 떠오르는 “신중해야 하네”라는 표정이 있었습니다.

늙은 상원의원 피에르에티엔 시몽 아시에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급진당이 공화국의 중심을 지키는 당이라고 했습니다. 왼쪽의 사회주의자들과 오른쪽의 가톨릭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삼색기의 붉은색과 푸른색이 직접 부딪히지 못하게 하는 흰 바탕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장 뒤퐁은 속으로 그 흰색 위에 별이나 낫과 망치, 두체의 얼굴을 그리기 딱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삼켰습니다. 대신 흰색은 색의 부재만이 아니라 모든 빛이 모였을 때 드러나는 색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급진당은 색의 삼원색만 볼 것이 아니라, 이제는 빛의 삼원색도 보아야 한다는 비유였습니다.

미셸도 예의를 갖춰 말했습니다. 급진당이 드레퓌스 사건과 대전쟁 같은 위기에서 공화국의 균형추 역할을 해온 것은 맞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이 더 이상 잘 먹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시에 의원은 그 비유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무례하다고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이 어떤 빛으로 흰색을 채워나갈지 지켜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카미유 쇼탕이 허겁지겁 들어왔습니다. 그는 불만이 있으면 당내 소관위원회에 문서를 올려야지, 이렇게 상원에 직접 쳐들어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호통쳤습니다. 아시에는 쇼탕의 호들갑을 손짓으로 막으며 젊은 정치인들이 말하게 두었습니다. 하지만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습니다. 상원은 공화국의 균형추이며, 젊은이들이 당을 박차고 나가든 내부에서 울분을 참고 있든, 상원은 의정활동으로 판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장 뒤퐁은 이를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는 비공식 당보를 만들어 상·하원 급진당 의원들에게 격주로 현실 상황과 정책 논의를 회람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좌파 의견만이 아니라 우파 의견도 담아 급진당 내부의 대화 공간을 복원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아시에는 이를 당내 소장파의 비공식 당보로 이해했습니다. 장은 급진당이야말로 공화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당이고, 좌우 의견의 대화가 사라진 것 자체가 공화정치의 위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피에르 코트는 반발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좌우파의 허울좋은 대화와 단합이 아니라, 시들해진 당조직에 확고한 정책을 불어넣어줄 왼쪽의 강한 화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도 설득을 하려면 선명한 창구가 필요하며, 좌파 의견과 우파 의견을 번갈아 싣는 식으로는 결국 예전과 똑같아진다고 보았습니다.

장은 코트의 완강함을 보며 그의 심중을 짐작했습니다. 코트와 망데스 프랑스는 사실 상원을 설득하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상원의 답답함을 모두에게 확인시키는 것이 1차 목표였고, 동조할 상원의원을 찾는 것이 2차 목표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충분히 대화하려는 척을 해서 나중에 분당할 때 달라디에 같은 중도파를 함께 데려가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이미 급진당 자체에 등을 돌린 상태였습니다.

장은 자신이 이용당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골목의 목소리와 도르제르의 돌풍, 급진당의 평판 악화, 우익 리그의 확산을 조합해 즉석에서 아시에 의원을 설득하는 글과 논지를 만들었습니다.

아시에 의원은 장의 말과 글에서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나라가 둘로 갈라졌던 기억, 발데크루소의 공화국 수호내각에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랑이 입각해 반공화주의자들을 막아냈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공화국의 적이 목전에 닥쳤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는 쇼탕을 바라보며 왜 이런 정보를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시에는 장을 “행동하는 공화주의자”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곧 그의 본심도 드러났습니다. 급진당은 중산층의 당이며, 중산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공화국이 자신들에게 준 것을 빼앗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왕당파, 교권주의자, 친독 파시스트에 맞서기 위해 사회주의자나 때로는 공산주의자와도 손잡아야 하지만, 그 연합전선이 지나치게 붉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화국의 적을 물리친 뒤에는 다시 정상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코트는 마침내 장이 다른 진영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다음에는 반대편에서 보자고 했고, 장은 “같은 당 내에서 말이지요”라고 답했습니다.

한편 미셸은 상원 내 진보적 급진파를 찾아 움직였습니다. 그는 쥐스탱 고다르와 모리스 비올레트 상원의원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청년 투르크처럼 전투적이지는 않았지만, 상원 급진공화파 중에서는 진보적이었고, 달라디에의 후원자들이었습니다. 비올레트는 알제리까지 찾아가 고생한 미셸을 호의적으로 맞았습니다. 고다르는 내년 총선이면 미셸이 어느 선거구로 나가도 의원직은 거의 보장된 것 아니냐며 농담을 던졌습니다.

미셸은 최근 반공화국파의 기세와 지방선거 결과를 설명하며, 선명한 좌파들이 당 안에서 더는 비전을 관철할 수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비올레트는 분당을 하더라도 독자적으로 나서서는 안 되며, 달라디에를 비롯한 중도파 일부를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려면 지금 당을 찢지 말고, 당 안에 또 다른 당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 안의 당이 당 전체에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후 장 뒤퐁은 당보 첫 호의 헤드커버로 권위 있는 경제학 교수들을 초빙하기로 했습니다. 급진당은 명사들의 정당이었고, 쇼탕·에리오·사로 같은 원로들도 이를 도왔습니다. 장은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 젊은 경제개혁가들, 즉 X-Crise 인물들과 연결되었습니다. 장 쿠트로는 서문에 “프랑스는 자기 경제를 모른다”고 썼습니다. 이어 경제통계와 경기조사 전문기관 설치, 산업별 생산·고용·임금·실업·신용·가격·수출입·자본유출 통합관리, 전문가위원회 설치, 방크 드 프랑스 개혁, 공공사업과 농업으로의 신용 유도, 도로·학교·수도·전기·주택·공장 현대화 투자, 작업장 환경 개선과 사회보험 확충 같은 내용이 이어졌습니다.

장은 시장경제를 신뢰한다는 젊은 경제학자들이 이렇게까지 국가조정적 처방을 내놓는 것을 보고 당황했습니다. 에리오는 긴축과 프랑화 방어를 중시했기 때문에 기함했고, 쇼탕도 당내 갈등을 봉합하기는커녕 새 전선을 만드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조제프 카요는 프랑화 가치가 신앙은 아니며 재정개혁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장을 두둔했습니다. 알베르 사로 역시 프랑화 문제는 조심해야 하지만 국가생산성 제고와 공공사업에는 열려 있다고 했습니다.

카요와 사로가 공화국 경제의 조직화라는 논리로 기술관료적 자본주의 혁신을 두둔하자, CRR은 자연스럽게 더 좌측으로 이동했습니다. CGT의 플라니슴, 노동자 대표성 강화, 소농 및 농업노동자 보호 같은 말이 CRR 문건에 더 자주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카요와 사로의 기술관료적 조직경제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CRR은 더 명확한 사회개혁 언어를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셸은 급진당 지방당, 실무라인, 자금줄, 지식인 라인, 언론사를 좌파 쪽으로 끌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원과 당 중앙 안에서 좌파 의원들을 묶는 데 성공했습니다.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가스통 베르제리, 장 제, 피에르 코트 등 좌파 의원들은 공화국 쇄신위원회, Comité de rénovation républicaine, CRR를 만들었습니다. 달라디에는 당내 비공식 연구조직에 별도 입장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중도파가 개별적으로 CRR에 가입해도 막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지방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공립학교 교사, 공업도시 시장, 변호사, 공무원층은 CRR을 환영했지만, 상공업계 후원자, 농촌 명사, 지역신문 사주와 광고주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급진당은 분리되지 않았고, 코트도 즉시분당론을 접고 CRR의 얼굴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미셸은 급진당 안에 두 번째 급진당의 의회적 골격을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골격에 붙을 지방의 살과 피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급진당은 아직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부에는 이미 세 개의 급진당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는 아시에와 쇼탕이 대표하는 원로적 균형파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코트, 망데스 프랑스, 미셸의 공화국 쇄신위원회였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장 뒤퐁과 카요·사로가 연결한 공화국 경제조직화 노선이었습니다. 당은 하나였지만, 그 안에는 이미 서로 다른 미래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8. 일요일 전선

1935년 여름, 프랑수아 드 라로크의 불십자단은 더 이상 전형적인 거리 우익 리그로만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바르투 총리 암살사건 이후 라로크와 그 주변 인물들은 더 합법적이고, 더 친절하고, 더 일상적인 방식으로 프랑스 사회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거리에서 시위하고 제복을 과시하던 조직으로서의 불십자단은 거의 해산되어갔고, 대신 프랑스 직능사회연합(USPF)이 언론 곳곳에서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USPF는 마치 노동조합처럼 노동자들을 끌어모았지만, 자신들을 노동조합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CGT나 기독교노총 CFTC 조합원들에게 탈퇴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노동자, 기술자, 소상공인, 참전군인, 청년, 여성을 하나로 묶는 국민적 사회봉사 조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CGT와 CGTU의 현장조직가들이 보기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USPF는 파업도, 단체협약도, 계급투쟁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사용자에 맞서 노동자 권익을 지키는 단체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노동자 축구대회, 가족 소풍, 미사 뒤 식사, 영화상영, 직업강좌, 청년체육, 여성 사회사업, 참전군인 강연, 노동자 고충상담을 제공했습니다.

“노동조합은 분노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생활을 돕습니다.”

“계급투쟁이 아니라 직능의 화해를.”

“좋은 노동, 좋은 가족, 좋은 프랑스.”

이런 문구는 공장 앞 전단보다 더 부드러웠고, 그래서 더 짜증났습니다. USPF는 CFTC가 완전히 붙잡지 못한 기독교계 노동자, 비조직 청년노동자, 파업에는 나오지만 조합회의에는 지친 노동자, 가족의 불안을 달래고 싶은 여성과 아내들에게 접근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악시옹 프랑세즈가 라로크를 배신자로 취급했습니다. 악시옹 프랑세즈에게 프랑스 사회의 문제는 미시적인 사회사업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공화국, 의회주의, 정당정치, 프리메이슨, 유대인, 반왕정적 혁명의 국가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샤를 모라스의 구호는 “정치가 먼저다, Politique d’abord!”였습니다. 라로크는 이에 대해 쿠데타나 왕정복고 같은 추상적인 논의보다, 당장 프랑스 가족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나씩 해나가며 국민적 질서를 재조직해야 한다고 응수했습니다. 그의 구호는 “사람이 먼저다, L’homme d’abord!”였습니다.

그 무렵 CGT와 CGTU의 통합도 점점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회의는 점점 뜨겁지 않아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서로를 수정주의자라거나 분파주의자라고 몰아붙였을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표를 들여다보며 회비 배분, 지부 관할, 국제연계 명칭, 규약 조항 같은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성숙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혁명의 열기가 식어버렸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좌파 진영은 자신들이 마침내 하나의 조직으로 수렴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CGT 파리 7구 조직에서 보낸 비공개 메모 한 부가 회의에 도착했습니다.

「우익 조직의 선거외 활동과 노동자 생활세계 침투에 관한 비공개 메모」

첫 장에는 붉은 연필 밑줄이 여러 겹 그어져 있었습니다. 라로크계 조직은 더 이상 거리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집회와 행진만으로 세력을 넓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축구대회, 가족 소풍, 미사 뒤 식사, 직업강좌, 참전군인 식당, 여성 사회사업, 노동자 고충상담소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실업자 자녀를 위한 무료급식이 운영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퇴역군인 단체가 노동자 가족을 대상으로 여름 야영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우익 성향 후원자들이 운영하는 직업소개소가 실직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연결해주고 있었습니다. 정치 구호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도움, 공동체, 질서, 가족 같은 단어가 반복되었습니다.

메모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노동자는 하루 여덟 시간을 공장에서 보낸다. 그러나 나머지 시간은 공장에서 보내지 않는다. 우리가 조직한 것은 노동시간이지만, 그들은 생활시간을 조직하고 있다.”

회의실 안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CGTU 쪽에서 참석한 젊은 금속노동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공장의 견습공 셋 정도가 그 직능연합인지 뭔지 하는 곳의 축구대회에 갔다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파시스트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공을 차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말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옆자리의 불독같이 생긴 CGT 소속 발전소 노동자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런 순진한 아이들을 꾀어내기 때문에 파시스트의 기만을 폭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라로크도 결국 악시옹 프랑세즈와 다를 바 없으며, 나라를 극우 깡패와 악덕 기업주들의 나라로 만들려는 자들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클레르퐁은 단순한 해법을 제안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도 생활전선을 조직하여 라로크와 싸우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 드술리는 생각 없이, 그러나 모두의 위선을 찌르는 말을 던졌습니다. 밥 주고 간식 주고 대회도 열어주는 곳을 찾아가는 것은 무산자들에게 당연한 일이고, 정권도 못 잡았으니 부르주아 후원받는 녀석들에게 이기기는 어렵겠다는 말이었습니다.

PUP 당원들은 주말학교, 공청회, 영화상영회, 급식소 설치에는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PCF나 SFIO, 심지어 PUP 자신들마저도 지원은 할 수 있으나 주도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CGT 중앙도 필요 이상으로 모든 것을 조직해서는 안 되며, 주체는 어디까지나 노동자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장 조합원 총회가 선출한, 언제든 소환 가능한 대표들이 모든 것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이앙리는 이 말에 적극 동의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실행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았고, 조르주 르프랑과 에밀리 르프랑 부부와 연결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CGT의 노동자 교육 담당자였고, 반강제적 동원보다 교육과 자발적 참여의 언어에 강했습니다. 다만 현장 투사라기보다는 이론과 교양에 강한 인선이었습니다.

르프랑 부부에게서는 곧 “노동자 통제”, “노동자 민주주의”, “노동자 자체 운영위원회”, “회계와 후원 내역의 투명성”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루이앙리는 그 말에서 묘한 냄새를 맡았습니다. 노동자들이 위원회를 만들고, 생활세계를 조직하고, 의사결정을 하며, 언젠가 사회주의 세상이 오면 공장도 노동자들이 직접 관리한다는 발상. 아직 “자주관리”라는 말은 없었지만, 훗날 그렇게 불릴 씨앗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CGT 중앙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조르주 뷔송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사회주의 운동이 생활전선을 모른다는 말은 부당하다고 했습니다. 노동거래소에는 이미 강좌가 있었고, 문맹퇴치, 회계, 법률상담, 노동법 해설도 있었습니다. FSGT는 노동자 체육을 조직했고, 협동조합, 조합 도서관, 영화상영회, 합창단, 파업기금, 실업자 지원, 산재상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라로크를 따라 하듯 급하게 가족소풍, 축구대회, 영화표를 벌이면 좌파판 도폴라보로를 만든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노동조합의 본령은 임금, 노동시간, 단체협약, 산재, 실업, 노동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르네 벨랭도 비슷하게 말했습니다. 기존 사업을 다 제쳐두고 생활세계 조직에 전념하면 노동조합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자체가 모호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임금 인상인지, 근로환경 개선인지, 해고 반대인지, 교대근무 축소인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느낀다고 곧바로 발작적으로 움직이면 저들의 의도에 빨려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클레르퐁은 정당과 노동조합이 이인삼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현실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노동조합이 하기 어려운 영역은 정당이 보완하여 라로크에 맞서 사회주의 운동의 생활전선을 충실하게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벨랭은 거의 의자에서 튀어나갈 듯 반응했습니다. 정당이 노동자의 생활을 조직하겠다는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라로크가 노동자를 프랑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노조에서 떼어내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우리는 노동자를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의 생활전선에 묶어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라로크의 가족도 아니고 정당의 병사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팔뚝을 걷어올리며 “우리는 정당의 기계가 아니다”라고 동조했습니다.

클레르퐁은 잠시 자리를 피한 뒤 PCF 당중앙에 연락했습니다. 당중앙은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지침을 거의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파시즘에 맞선 공동전선을 충실히 이행하되, 최소강령적 소극성에 천착하는 조직간부의 불능성을 폭로하고 비판하여 기층과 연대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해석하자면 벨랭 같은 자를 강하게 비판하라는 말이었습니다.

클레르퐁은 회의장으로 돌아와 각 정파의 입장을 물었습니다. 벨랭은 생활의 조직화는 좋지만 주체는 노동조합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동거래소, 조합지부, 협동조합, 교육강습소로 맞서야 하지만, 생활조직은 임금, 해고, 산재, 노동시간, 위생, 단체협약 투쟁을 돕는 조직이어야지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CGTU 측 브누아 프라숑은 공장별, 지구별로 즉시 반파시스트 노동자 생활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체육, 강좌, 상담, 실업자 지원, 가족모임을 만들고, 그 모든 곳에서 라로크의 계급화해 거짓말을 폭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클레르퐁은 결국 당중앙의 지침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벨랭을 향해, CGT의 태도는 결국 고용주에게 더 나은 조건을 받아내면 그만이라는 것 아니냐고 공격했습니다. PCF, CGT, CGTU, SFIO, PUP 모두가 사회주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이며, 목적은 노동자를 계급화하고 사회주의적 의식을 고취하여 궁극적으로 프랑스를 사회주의적으로 변혁시키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혁명이라는 말 대신 변혁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벨랭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클레르퐁 동지. 이제 분명해졌군요. 공산당은 조합원들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목적을 위해 추수하려는 당이라는 걸 이제 모든 조합원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CGT 조합원들은 PCF 노선에 편승한 CGTU를 더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PUP와 르프랑 부부의 노동자 민주주의 노선은 더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한편 클레르퐁은 PUP의 시도에 맞서 PCF 지역조직을 중심으로 지역주민 대상 생활전선을 조직해보기로 했습니다. 노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CGTU를 경유하지 않고, 순수하게 당 사업으로 추진했습니다. PCF는 1935년 5월 지방선거 이후 당세를 상당히 회복한 상태였고, 파리 근교 붉은 벨트, 특히 도리오의 생드니 같은 곳에서 지방조직이 강했습니다. 공산당은 무료급식, 영화상영, 야학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구호는 “빈곤에 맞선다! 파시즘에 맞선다!”였습니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자크 도리오의 권한을 상당히 강화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라로크의 본질을 더 캐기 위해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라로크와 그 조직은 기본적으로 좌파와 우파를 포함한 모든 정당조직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에게 기성 정치권은 낡고 부패하고 무능한 중개기관이며, 프랑스 국민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리의 행동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자는 주장에도 회의적이었습니다. 사회를 재조직하고 장악하기 전에 상층권력을 장악해봤자, 그들이 혐오하는 기성정치권 그 자체가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USPF는 단순한 위장노조가 아니라, 라로크가 꿈꾸는 정치질서의 모형이었습니다. 노조도 아니고 정당도 아닌 직능사회조직, 보수적이고 가족적이며 온정적인 국민공동체를 정치가 아닌 사회로 조직하는 방법론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이것이 반동이 아니라 반혁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USPF를 따라가는 것은 결국 똑같이 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USPF의 중도·우익 혐오를 딱히 부풀리지 않고 퍼뜨려 노동환경 개선에 현 내각이 나서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 결과 즉시 생활전선을 공격적으로 확장하자는 CGTU의 의견은 약간 주춤했습니다. 파시스트를 닮는다는 프레임이 걸리자 단순 복제론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CGT 중앙의 관료주의도 힘이 빠졌습니다. USPF가 단순히 보수적 조직이 아니라 대항혁명적 생활조직이라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틈에서 PUP와 르프랑 부부의 노동자 교양 중심 의견이 강해졌습니다.

정부 쪽에서도 반응이 왔습니다. 노동장관 아드리앵 마르케는 USPF 문제를 상당히 불편하게 보았습니다. 마르케에게 USPF는 급진적 CGT에 대한 견제 수단이라기보다, 국가의 노동 통제를 어렵게 만드는 사적 직능조직이었습니다. 그때 마르셀 포쿠아가 회의 결과를 정리하며 세 가지 원칙을 제안했습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대표하고 노동자의 권리 수호에 집중한다. 생활조직은 현장 노동자의 자치적 운영을 토대로 운영한다. 정당과 국가는 상기 둘에 대한 지원만 제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노동부로부터 국가노동기금 창설안에 대한 주요 이해관계자 의견조회가 도착했습니다. 마르케는 국가노동기금을 조성해 노동감독관을 대폭 증원하고, 사업주들에게 작업장 위생·안전·휴게시설 개선 보조금을 지급하며, 직업별·지역별 노사조정과 중재를 추진하겠다고 했습니다.

마르셀은 곧바로 이 계획의 위험을 파악했습니다. 이 마르케 계획은 어설프게 집행되어 부작용을 내는 것보다, 정말로 철두철미하게 잘 집행되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노동감독관을 엄청나게 증원하여 노동부가 작업장 감독권을 실제로 행사하고, 사업주들에게 작업환경 개선 보조금을 지급한 뒤 제대로 집행하지 않으면 징벌적 배상금을 물리고, 노사조정을 제대로 해낸다면 노동자의 생활은 개선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조의 필요성 자체가 낮아질 수 있었습니다. 노동부가 알아서 다 해준다면, 노동자들이 왜 자기 자신을 조직해야 하겠습니까?

마르셀은 회의장에 빠르게 이 분석을 공유하며 말했습니다.

“노동자는 라로크의 가족도, 정당의 병사도 아니지만, 국가의 개는 될 수 있는가?”

벨랭은 이 표현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노동감독관을 증원하고, 작업장 위생을 개선하고, 사업주의 불법을 처벌하는 것이 어떻게 노동자를 국가의 개로 만드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노동부가 감독권을 실제로 행사한다면, 그것은 노동조합의 패배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수십 년 동안 요구해온 것의 성과라고 보았습니다. 노동자가 세면대 하나 얻으려고 매번 파업해야 하느냐, 산재기록을 보려고 할 때마다 공장문 앞에서 싸워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CGTU 쪽은 벨랭을 거의 미친 사람 바라보듯 했습니다. 감독관을 임명하는 것은 노동부이고, 노동부 장관은 마르케라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사용자를 처벌하겠다고 하다가, 어느 순간 파업을 산업질서 교란으로 부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루이앙리는 벨랭을 노려보다가 말했습니다. 자신은 파시스트나 국가가 차린 사육장에 들어가 길러지느니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마르셀은 벨랭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노동권의 최소를 위해 매번 파업해야 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의무를 방기한 것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가 법을 집행해도 되느냐가 아니라, 국가가 어디까지 노동자를 대신해도 되는가였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국가와 노동자를 대표하는 국가는 같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감독관의 권한이 늘어난다면 노동자 대표의 권한도 함께 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벨랭은 마르셀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SFIO가 여당이 되고 블룸이 각료회의 의장이 되며, 마르셀 본인이 노동장관이나 차관이 되어 노동자 권익을 위한 정책을 내놓는다면, 그것도 국가의 개를 양성하는 음모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마르셀은 누구든 노동자에게 정부가 알아서 모든 것을 할 테니 스스로 조직을 결성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면 같은 잘못이라고 답했습니다. 사회주의 정부라고 노동자의 무한한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도 했습니다.

벨랭은 다시 반박했습니다. 마르케의 기금조성안 어디에도 노조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노동조합이 국가에 의한 노동권 보호의 파트너로 참여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마르셀이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 아니냐고 몰아붙였습니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습니다.

그때 마르그리트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마르케의 제안을 거부하면, 진짜 가난한 노동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제안을 거부했을 경우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단기간에 나아질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내년 총선에서 좌파 정부가 들어선다면 더 나은 제도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직 가능성일 뿐 확정된 일정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당장 마르케 노동부가 제안하는 것은 달콤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CGT와 CGTU가 마르케의 제안을 거부하면 CFTC가 이를 거의 신봉하게 될 것이고, 비조직 노동자들은 CFTC나 심지어 USPF 쪽으로 붙을 수 있었습니다. 마르케의 조치는 실질적 정치 효능감을 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답은 단순한 수용이나 거부가 아니었습니다.

“왜 받을지 말지만 고민하나요? 마르케의 제안을 수정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CGT 조직간부이자 계획경제 전문가인 로베르 라코스트가 즉시 반응했습니다. 의견조회 형태로 온 것이니, 수정안을 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라코스트는 논의를 정리했습니다. 이 회의는 노동자의 생활이 극우주의자, 더 정확히는 반혁명주의자에게 잠식당하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체는 노동자들과, 그 노동자들이 자기 권익을 지키기 위해 만든 노동조합이어야 했습니다.

라코스트는 PCF가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혁명의 병사로 보려 하고, SFIO는 노동자 생활 개선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노동조합을 멸종시킬 것이라고 단정하면서도 정작 노동조합 측 의견은 가볍게 다루는 듯 보인다고 비판했습니다. 마르셀은 불필요하게 날을 세운 점을 사과했습니다. 그는 노동조합이 현장에서 필요한 권한과 안전장치를 정해주면, SFIO가 그것을 노동조합을 대신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요구를 법률로 옮기고 제정당을 설득하며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벨랭은 더 싸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악수를 받아들였습니다.

라코스트는 마르케 계획을 작업장 위생·보건·환경 보전법안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작업장의 위생, 안전, 보건, 환경조건이 법률에 명시되어야 하고, 감독관은 위반사례를 효과적으로 적발할 수 있을 만큼 증원되어야 하며, 노동자가 자유롭게 고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강제조정제도는 우파 정부가 주도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제외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레옹은 공산당과 CGTU 입장에서 이 법안을 어떻게 볼지 따졌습니다. 이 법안을 대승적으로 지지하면 공산당은 모스크바 지령을 받는 외국산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상당히 희석시킬 수 있었습니다. 공산당이 프랑스 노동자의 생활과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다른 좌파 정당 및 노조와 협력한다는 이미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5월 지방선거 이후 회복된 공산당 지역조직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계급투쟁보다 국가와 노동의 협력, 즉 계급협조에 가까워 보일 위험도 있었습니다. 공산당은 법안을 보이콧할 수 없었지만, 이것이 종점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을 무르익게 하는 시작점이라고 선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클레르퐁은 뤼마니테를 통해 공산당의 대승적 지지와 공산당 생활전선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논지는 분명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을 무르익게 만들기 위한 준비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공산당은 가장 앞장서서 싸울 것이고 다른 좌익정파 및 노조와 적극 협력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공산당은 프랑스 노동자들의 정당”이라는 마케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효과는 좋았습니다. 1935년 5월 지방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거둔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모스크바 하수인이라는 이미지에서 조금씩 벗어나 선명한 좌익정당, 진정한 노동자 정당, 인민의 희망이라는 이미지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묘한 변화도 생겼습니다. 당중앙에서 밀려났으나 권위가 여전히 강한 자크 도리오가 이 “프랑스 노동자주의”, “애국공산주의”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총서기는 여전히 모리스 토레즈였지만, 도리오는 정신적 총서기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공산당은 점점 프랑스 노동자의 이익을 다른 좌파정당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장하는 당이 되어갔습니다. 군수공업의 확충은 노동자들의 일할 기회를 늘리니 찬성할 수 있었고, 선명한 반독 노선은 프랑스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앞당기니 당연히 찬성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 문제 역시 이전의 반제국주의 논법에서 벗어나, 프랑스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해석될 조짐이 보였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마지막으로 조합원들을 단속했습니다. 지식인 동지들이 노동자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없이 고고하게 굶어 죽기를 바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니, 결국 노동자들의 살 길은 노동자들이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헛소리가 많았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거칠었지만, 그 말은 회의의 무게중심을 다시 현장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이후 CGT/CGTU와 좌파 3당이 공동으로 만든 법안은 벨랭-포쿠아 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늘 그렇듯, 좌파가 어떤 법이든 통과시키려면 원내 급진당 대부분이 찬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법안은 하원에서 급진당 우파의 반대표결로 부결되었습니다. 피에르 코트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장 제 등 CRR 계열은 격분했습니다. 공화국 시민의 권리를 지켜줘야 할 급진당이 이제는 여성 탈의실에 칸막이를 설치하라는 법안을 반대할 정도로 치졸해졌냐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급진당 우파는 마르케 장관의 제안대로 정부 시행령으로 노동권을 보장했으면 되는 일 아니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분노한 좌파들에게 그것은 지역 상공업자들에게 후원금을 받아먹는 부패한 의원들의 헛소리로만 들렸습니다.

나름대로 톤을 조절한 법안마저 급진당의 반대로 부결되자, CGT 내부에서는 벨랭-라코스트 노선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습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CGTU와의 통합을 가속화했습니다. 몇 달 전 통과시켰던 벨랭-라코스트의 플라니즘 프로그램은 재검토 대상이 되었습니다. CGTU 총서기 가스통 몽무소는 트로츠키가 CGT의 플라니즘에 가한 비판, 즉 그것이 자본주의의 사회적 개량인지 사회주의로의 이행계획인지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을 다시 끌어왔습니다.

르프랑 부부는 명확하게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결론냈습니다. 레옹 주오 CGT 총서기도 조심스럽게 “노총은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노동조합 중심의 중도마르크스 노선으로 읽혔습니다. SFIO, PUP, PCF는 모두 반사이익을 보았습니다.

CGT와 CGTU는 1935년 8월 통합규약을 완성했습니다. 좌파 양대노총이 다시 CGT로 통합되었고, 노선도 벨랭-라코스트의 개량주의가 아닌 확고한 선명좌파 노선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노조 가입률은 오랜만에 급증했습니다. 조르주-에밀리 르프랑 부부의 노동자 교양사업은 제대로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노동자들은 우익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조합이 정말로 자신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었던 것입니다. 노총들이 서로 싸움을 멈추자, 그 의구심은 상당 부분 해결되었습니다. 향후 단체행동을 시도할 때, 이 통합은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레옹 블룸은 벨랭-포쿠아 법안이 무려 하원에서 부결되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전까지 블룸은 권력의 행사와 권력의 정복을 구분했습니다. 부르주아 공화국 안에서 사회주의 정부를 꾸릴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벨랭-포쿠아 법안 부결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환복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조차, 가톨릭 우파도 아니고 진보적 공화국 정당이라는 급진당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라면, 부르주아 공화국은 최소한의 인간적 개혁조차 불허하는 존재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블룸의 집권 논리는 바뀌었습니다.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공화국에서 집권해도 되는가?”라는 딜레마에서, 원래의 블룸은 파시즘에 맞서 공화국을 지키는 최소한의 범주 안에서 권력을 행사한다는 수비적 해석을 내놓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논리는 훨씬 적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사회주의자는 부르주아 공화국 안에서 집권해야 하며, 모든 권한을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부르주아 공화국은 가장 작은 인간적 개혁조차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민테른 제7차 대회와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의 체결은 PCF에게 애국주의의 문법을 제공했습니다. 때마침 자크 도리오와 레옹 드 클레르퐁이 파리 근교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노동자 동원활동에 나서자, 당 외곽조직은 당중앙을 압도할 만큼 비대해졌습니다. 당 노동자조직위원회를 움직이는 도리오가 당중앙을 움직이는 토레즈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토레즈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이미 한 번 출당 위기를 이겨낸 도리오는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1935년 7월 14일, 바스티유 데이에 좌파 정당들은 삼색기를 들고 단합행진을 벌였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 행진은 인민전선의 시초가 되었지만, 이 세계선에서는 이미 구성된 인민전선의 힘을 전국적으로 선보이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트로츠키는 PCF가 민족주의 정당으로 변해간다는 논평을 내놓으며 여느 때처럼 책임 없는 쾌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트로츠키는 도리오가 이끄는 의문의 괴한들에게 습격당했습니다. 그를 경호하던 표트르 표트로프가 괴한들을 역으로 두들겨패자, 이들은 오히려 트로츠키를 정부 이민당국에 신고했습니다. 이제 소련의 우방국이 된 프랑스는 트로츠키를 빨리 어디로든 추방하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트로츠키는 스페인으로 밀려났습니다. 스페인 정부는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정부는 그를 화물선에 태워 밀항시키는 방식으로 내쫓았습니다. 스페인 우파 정부가 그를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하려 하자, 바르셀로나의 노동자 방위위원회는 “우익 파시스트 경찰로부터 혁명동지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쇠파이프를 들고 경찰을 쫓아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스페인 정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한편 USPF의 침투 효과는 통합 CGT가 아니라 기독교노총 CFTC가 정통으로 얻어맞는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CFTC는 파시즘에 맞설 무기가 부족했고, 스탠스 자체가 애매했습니다. 파업은 좌파들이나 하는 것이고, 고용주와의 관계도 관리해야 하며, 기독교적 도덕에 따라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은 라로크식 언어와 지나치게 닮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라로크를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흔들렸습니다. 프랑스 여성 노동자들 중 상당수는 CGT보다 CFTC 쪽 생활세계와 가까웠고,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USPF의 여성 사회사업, 가족소풍, 급식, 아이들 영화표, 직업소개, 미사 뒤 식사에 빠르게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USPF가 말하는 여성 노동자의 권리는 자유롭고 해방된 개인으로서의 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어머니”로서의 권리와 의무였습니다. 여성 노동자는 노동권의 주체에서 가족주의적 보호의 대상으로 후퇴했습니다.

좌파는 공장 안에서 강해졌고, 라로크는 가족과 교구와 일요일의 일부를 가져갔습니다. 중도 공화국은 얇아졌고, 생활세계를 조직하지 못하는 세력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종적으로 프랑스에는 세 개의 생활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통합 CGT·PCF·SFIO·PUP·르프랑 부부가 연결된 좌파 노동자 생활전선, USPF와 CFTC 주변부·여성사회사업·기독교 노동자·참전군인회가 연결된 라로크의 국민가족 생활전선, 그리고 마르케 노동부와 노동감독관·국가노동기금이 상징하는 국가관리 생활전선이었습니다.

모두가 노동자를 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이어집니다. 노동자는 누구의 이름으로 조직되는가? 계급인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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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dnjdss | 작성시간 02:50 new 렌지파일 오.... 루이앙리에 이은 두번째 프랑코프로방스어(리오네 방언이 이쪽 주요 방언이니까요) 구사자군요....
  • 답댓글 작성자통장 | 작성시간 03:35 new 렌지파일 라스푸탱 ㄷㄷ(?)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시간 48분 전 new 렌지파일 1. PSdF-UJJ 멤버 중 라마디에 쪽은 PRRS에 합류했고, 아드리앵 마르케와 마르셀 데아는 합당 과정에서 이탈해 새로운 세력을 만들었는데 이 캐릭터는 후자에 합류한 걸까요?

    2. 이 캐릭터는 반전평화주의와 반파시즘 투쟁이라는 두 목표가 상충되는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할까요?

    3. 이 캐릭터가 해석하는 ‘플라니즘’은 “사회주의로의 이행 수단”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수정 도구”에 더 가까울까요?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시간 32분 전 new 통장 아, 그리고 장 뒤퐁은.. PRRS쪽을 선택하나요, 아니면 급진당 우파와 상원 보수파 급진당의 URI를 선택하나요? 참고로 다음 총선에서 ‘어지간하면’ 좌파연합이 집권할텐데 URI는 야당으로 남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장은 뭐.. 급진당 우파와도 친하지만 달라디에의 중도파(PRRS 내 온건우파)로 갔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으므로 선택이 어색하지는 않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통장 | 작성시간 1시간 14분 전 new E.E.샤츠슈나이더 장 뒤퐁은 이번 사태에서 재정보수주의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우익리그와의 컨택이 URI에서 있으면 입장이 정말 난처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PRRS로 갔다고 하겠습니다. 코트나 망데스 프랑스와 정말 어색한 분위기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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