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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일반]라캉은 왜 실존주의와 다른가

작성자다리우스|작성시간04.08.30|조회수322 목록 댓글 9
 

무본/무주(왜 라캉인가)


나는 허깨비요 所幻人, 물위의 달이요 水中月, 거울 속의 이미지 鏡中像 이다. 유마 힐의 말이다. 특히 거울 속의 이미지라는 말은 라캉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고, 그가 거울 단계에서 강조한 것은 역시 자아는 거울 이미지라는 것. 그러나 같은 거울 이미지이지만 불교적 문맥에서 경중상鏡中像은 무주즉무본 無住卽無本을 기본으로 하고, 라캉의 경우에는 정신분석을 기본으로 한다. 전자에 의하면 내가 하나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내가 언제나 흘러가고 변하고, 따라서 지금 여기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고 환상이다. 후자의 경우에도 나는 거울 이미지, 곧 나라고 믿는 실체로 오인된 실체이고 환상이다.

불교에서도 환상이고 라캉의 경우에도 환상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인가? 언제나 차이가 중요하고, 이글에서 나는 이 차이를 해명하고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차이를 너머 공유하는 공간을 찾아보기로 한다. 나는 지금 여기 이 방에 앉아 이 글을 쓰지만 지금은 언제이고 이글을 쓰는 나는 지금 어디 있는가? 이런 문제는 ‘말하는 나/ 말속의 나’라는 글에서 해명한 바 있고, 지금(만약 지금이 존재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글을 쓰는 나, 자아가 허깨비라는 것, 경중상이라는 것, 거울 이미지라는 것, 물로 이런 인식은 무주즉무본 개념을 토대로 하고 그런 점에서 실존 개념도 비슷하지만 따지고 보면 다르다. 실존 역시 무본, 뿌리 없음, 근거 없음을 동기로 한다. 그러나 이런 무본 개념이 무주와 닿는 게 아니라 실존, 그러니까 과정이 아니라 실체로서의 자아를 강조하고, 이 자아는 자아를 신뢰하는 그런 자아이다.

다시 정효구 교수의 비판이 생각난다. 그는 나의 시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 이승훈은 한편으로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허무감과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따라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시가 인생이고 인생이 시라면 시즉생이요 생즉시라면 이런 지적은 바로 내 생, 내 인생, 내가 살아온/ 살아가는 이 알 수 없는 삶의 양식이기도 하고, 스타일이기도 하고, 내 삶의 내면일수도 있다. 내가 시론에서 강조한 ‘나는 없다’는 말은 당시만 하더라도 데리다의 차연 개념,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개념에 힘입은 바 크고, 그러나 이런 개념이 개념으로만 머물고, 말하자면 머리로만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내가 자아 없음, 자아 소멸, 무아에 대한 시론을 쓰면서도 계속 시속에서, 혹은 시 밖에서 불안과 허무감에 시달린 것은 이런 자아 없음을 실천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고 또 하나는 나를 오랫동안 지배한 이른바 실존 개념이 문제였고, 지금도 문제이다.

실존은 무본을 토대로 하지만 무주를 모른다. 말하자면 실존은 무본을 토대로 하지만 무주, 곧 허깨비가 아니라 자아를 신뢰하고, 그런 점에서 실체로서의 자아를 강조한다. 그러나 유마힐은, 아니 불교에선 무주즉 무본이다. 그동안 나를 괴롭힌 것은 경국 무주/무본의 대립이고 이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이 무본을 라캉의 거울 이미지와 관련시킨다. 그렇다면 무주는? 거울 이미지가 허상이고 환상이고 허깨비라면 결국 거울 이미지도 무주이다. 이글을 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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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mara | 작성시간 04.08.31 뭐 그렇게 무시하지도 않던데요. 유마힐을 아신다면 그 바다의 깊이 있는 물결을 노니실 줄도 아실 것 같은데요. 저도 깊이는 자맥질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호흡이 길지 못하고 저를 너무 믿는 경향이 있어 이거면 다 안다 뭐 그런 짓도 합니다. 자크라깡의 실제계적인 사유는 결국 노자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 작성자mara | 작성시간 04.08.31 합니다. 저와 함께 시작하시지요. 내일은 왕필의 노자 주해서를 빌려다 볼 생각입니다. 그가 그 해안으로 이끌어 줄 것을 믿어보랴려합니다. 다리우스님.
  • 작성자다리우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8.31 좋습니다. 어차피 한번은 건너야 할 바다였으니...도와주신다니. 가보죠. 왕필을 참조하겠습니다. 라깡이나 해체주의, 하이덱거가 녹아있는 바다란 대체 무엇일까.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mara님!
  • 작성자다리우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8.31 바다저편에서 난 노자의 얼굴을 보려한다. 노자, 그는 누구인가? 동서양이 이렇게 만나면 세계는 어찌 되는 건가? 해체주의의 끝에서 난 무얼 보게될까. 그 피안에서 철학은 어떤 종지부를 찍게되는 걸까.서양의 각진 사유들이여~
  • 작성자다리우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9.01 노장을 다녀온다면 난 또 <시키지 않은 보고서>를 써야 할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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