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 그 시를 읽고 나는 쓴다
『시와 함께』2020 · 가을호 · 004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
홍성란
그런데 나는 뜻은 깊게 감추고 표현을 공교롭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줄 모른다. 한마디 로 문학 적 재능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이유는 ‘내 마음의 이야기’를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저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홍사성, 「시인의 말」, 『시와함께』(2020년 여름호) 중에서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떻게 쓰나. 당혹스러운 질문은 유쾌하게 웃어넘기면 되지만 아이처럼 자꾸 답을 보챈다면 ‘입을 열면 그르친다開口卽錯’라고 말할 거다. 그러다간 결국 두보杜甫의 ‘위인성벽탐가구爲人性癖耽佳句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라는 고전을 인용하겠지. 남 이야기할 것 없이 나는 놀랄 만큼 유용한 혹은 즐거운 한 구절을 위해 끊임없이 ‘탐가구’하고 있는가. 내 시를 읽고 누군가 지혜를 겸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거나 잊고 있었던 일을 새롭게 떠올리며 서늘한 기쁨을 느끼게 하고 있는가.
출세出世. 누구나 세상에 잘 나왔다. 잘 났으니 할 말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멋진 시를 쓰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이 원망스럽다. 과연 나는 멋진 시를 쓰고 있는가. 혹 나는 혼자만 알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대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과 나의 거리를 좁혀야 하는 건 아닌가. 한 이야기 또 하고 한 이야기 또 하듯 엇비슷한 이야기를 라벨만 바꿔 달아 내보내는 건 아닌가. 뒤통수에 붙은 내 허물을 나는 모르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리하여 날 몰라보는 세상이 이렇게 아프다고 외롭다고 그립다고 나는 나에게 절절截截한 편지를 쓴다. 시는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걸 『시와함께』(2020년 여름호)를 보면 안다. 시는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다.
시간을 지워버린
아름다운 흔적
곳
곳
가혹한 이별도
울음 참는 회한도
받아줄
사람이 없어 더 아프고 뜨거운
그리움을 숨긴
그가 없어 더 서러운
외로움도 안아보면
그냥
가슴 먹먹한
무작정
기다림으로 눈시울 환히 붉는
-양점숙, 「표류 우체국」 전문
일본의 작은 섬, 아와시마에 있다는 표류 우체국. 그 이름처럼 정처 없이 시간을 흘러가고만 있는 우체국에는 수취인 없는 편지만 쌓이기에 집배원이 없다.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보내는 편지. “받아줄/사람이” 영영 “없”지만 내 마음 지금 이렇다고, 들어보라고 끝나지 않는 편지를 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별을 하며 살아간다. 누구에게도 배달되지 못할 편지, 수취인 없는 편지를 쓴다(「시인의 말」)’. ‘속절없이 이별한 뒤에 회한의 무게로 등허리가 저리다’는 시인도 누군가의 시처럼 ‘다시는 오지 않을 밤/보내고는/후회’하는가.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인간의 형식이 후회라는 걸. “외로움”을 “안아”본다는 시인. 누군가 말했다. 힘들고 외로울 때, 슬플 때 자기 자신을 두 팔로 감싸 안아 토닥여 주라고. 우리 그렇게 해 볼까. 「표류 우체국」. 이 먹먹하니 끝나지 않는 편지에서 여백을 둔 시적 형식이나 말음보末音步의 ‘뜨거운/서러운/먹먹한/붉는’이라는 형용사 배치는 여운을 느끼게 하는 시적 장치로 보인다.
어둠의 고린내가 코끝까지 올라오는 밤
한 가난이 표백된 채 헛웃음만 짓고 있다
눈물로 밝혀주는 별빛 어느 죽음의 환생일까
한번 잘 살아보자는 그 예쁜 말에 속아
진창길 가는 곳곳 네 선한 맘 읽어내다
기우뚱, 몸이 다 닳은 줄 까맣게 몰랐다
간절한 기도들은 하늘에 안 닿았지만,
슬픔만 묻은 체온 못 뿌리친 죄인이지만,
바닥에
쏟은 눈물과 달리
뜨겁도록 웃어도 봤다
-임성구, 「밑창」 전문
시보다 더 시적인 「시인의 말」을 본다. ‘하루종일, 아니 일생을 끌고 다닌 신발의 장례식을 엄숙히 진행하는 밤이다. 그동안 미처 알아듣지 못한 그의 항변을 찬찬히 읽어가는 밤이다. 발바닥에서 명치끝으로, 명치끝에서 목젖까지 올라오는 상처투성이의 말들을 씻어내는 중이다. 비 오는 깊은 밤의 카페인과 독한 술에서 고린내가 씹힌다 울컥! 환생하는 슬픔만 묻은 체온 한 덩어리.’
「밑창」은 신발에게 주는 헌사이기도 한데, ‘맨 밑바닥’이라는 마음의 거처로도 읽힌다. “몸이 다 닳는 줄”도 모르고 “한번 잘 살아보자”고 “선”하게 살아온 신발의 도정은 내 인생의 궤적이다. 자신에게 “속”지 않는 인생이 있을까. 그러니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 “닿”지 못하였으리. “헛웃음” 지으며 나를 떠받쳐온 신발에게 바치는 마지막 의식. 이 의식은 나에게 보내는 몸으로 쓴 편지 아닌가. “뜨겁도록 웃”는 날을 축원하며 이 아름다운 의식을 “눈물로 밝혀주는 별빛”이 있다. 신발의 장례의식을 치른다는 독보적인 시조가 있다.
걸어가는 길이 늘 순탄치만은 않아
모래바람 앞에 마음 쉬이 흔들린다
이쯤서 그냥 돌아설까
반쯤 묻힌 나를 본다
후회의 머리카락이 늘어질 때마다
나를 끌어당기는 누군가의 숨소리
겁 없이 여기까지 온
욕심들을 털어내고
꼿꼿한 몸을 낮추니 발걸음이 가볍다
아무리 불어와도 제 아무리 흔들어도
쉽사리 쓸려가지 않는
사막의 등을 보았다
-윤경희, 「고비사막」 전문
고비. 물이 없는 사막. ‘한여름 뙤약볕 아래 모진 비바람 다 견딘 고행의 시간들(「시인의 말」)’이니 삶은 고생苦生이다. 그렇게 고생이지만 나는 나에게 묻고 있으니 나의 정령精靈, 나의 목“숨”은 “그냥 돌아설” 수 없다. “욕심들을 털어내고/꼿꼿한 몸을 낮추”라고 나의 정수精髓, 나의 생기生氣는 나에게 가르쳤으리. 그렇다. “나를 끌어당기는 누군가”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정수가 나에게 가르치고 가리킨 대로 몸을 낮추면 “발걸음 가”벼워지고 누가 “흔들어도” 견고한 나의 중심이 생기지 않겠나.
고비사막의 모래 언덕은 누가 보아도 야트막하니 부드러운 능선이다. 곧추서지 않아 모난 데 없으니 “사막의 등”은 “쉽사리 쓸려가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리. 우리 인생도 그러하려니. 겸허히 듣는다. 나는 나를 끌어당기며 털어내고 낮추고 가벼워지라는 먼 모래바람 실린 노래를. 내 마음 담은 먼 모래바람의 편지를 읽는다.
오래된 노란 냄비에 구멍이 생겼는데
얘야 이런 것도 있구나
울 엄마 신이 났다
서울에 땅 한 평 없는데
만 평 부자 얼굴이네
밥 짓다 물 새던 기억 질척하게 아린 가슴
숟가락 끝에 힘주고
은박 테이프 발라준다
살다가 낭패 보던 일
꼭꼭 눌러 메운다
-김경옥, 「어머니의 콜럼버스」 전문
어머니께 배달되지 못할 편지를 쓴다. 그날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를 기억한다고. 밥솥을 부엌 아궁이 연탄불에 안쳤는데 치이 치, 소리가 난다. “물”이 “새”는 거였다. 딸이 구해온 “은박 테이프 발라” “구멍”을 “메운” 건 「시인의 말」처럼 ‘삶에서 발견한 작은 기쁨’이요 은총이다. “얘야 이런 것도 있구나”.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었을까. 어머니의 콜럼버스!
어머니, 구멍 난 솥 바닥을 은박 테이프로 메우듯이 “살다가 낭패”를 만날 때 둘러치기 한판으로 해치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가 ‘봄꽃처럼’ 환해지시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해요. 어머니, 그곳에선 구멍 난 솥 바닥 메울 일 없으시겠지요. 기억의 저장소에서 ‘우리말 사리로 환하게 건져’ 올린 시조 한 수. ‘꽃들이 피어나면 주변이 순해지듯이’ 「어머니의 콜럼버스」에는 궁핍한 연대의 생활상이 있고 순한 그리움이 있다.
한창 몸 풀던 녀석 출전시간 다가오자
“관장님, 떨립니다” 얌마, 장사 한두 번 하냐
그딴 건 몇 대 터지면 돼, 경기는 이미 시작됐어
복싱은 근성이야, 죽기살기 근성이라구
원투, 원투 원투! 다시, 원투 원투 원투!
초장에 혼을 빼버려, 악물랬지, 치켜떠
한 인연 그리움의 간절한 링사이드에서
기회마다 미적미적 아, 나는 떨고 있나
몸 한 번 던지지 못하고 … 그냥 그 입만 살아
-강문신, 「어느 링사이드」 전문
출전을 앞둔 아마추어 복서를 가르쳐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죽기살기 근성”으로 이를 “악물”고 “초장에 혼을 빼버”리라는 관장. 그 링사이드의 체험과 훈수가 시가 되었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게 아니다. 시는 손끝으로 쓰는 게 아니다. 시는 온몸으로 쓴다.
더이상 일삼아야 할 것이 없는 무사한인無事閑人은 아닐 테고, 나는 왜 인생이라는 링사이드에서 통쾌한 레프트훅 잽싸게 한번 날려보지 못하는가. 필사즉생必死卽生, 케이오패 당할 각오로 한판 붙을 용기가 없는가. “출전시간” 앞두고 “몸 풀던 녀석”에게 미안하다. “입만 살아” 다그치던 내가 “한 인연” “간절한 링사이드”에서 “떨고”만 “있”다니. 그렇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없던 일만 못한 일도 세상엔 있다는 것. 펼칠 때가 있고 접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한 삶은 곧 장대한 진리 아닌가. 그 장대한 진리를 알아 누리는 건강한 삶과 깨끗한 기쁨이 있다.
집에 가다 문득 쳐다본 밤하늘
보름달 환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당신이
그렇게 오래
지켜볼 줄 몰랐다
-홍사성, 「보름달」 전문
왜 보름달을 보면 누군가 떠오르는 것일까. 왜 보름달은 지나쳐 가다간 꼭 돌아보게 되는 것일까. 그 옛날, 멀리 사는 벗이 보내온 편지가 있었으니 봉래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서울의 백광훈白光勳(1537~1582)에게 보낸 편지다.
삼천리 밖에서
한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하게 지낸다
三千里外 心親一片雲間明月
그리운 너를 보듯 밝은 달을 오래 본다는 마음이 담긴 그윽한 편지. 이 옛사람도 달을 보며 마음에 둔 사람을 떠올린 것이다. 당신도 그런가. 나도 그렇다. 오래 사무쳐온 유정한 당신이기에 “문득 쳐다본 밤하늘/보름달”에서 꼭 그렇게 사무치는 심정으로 나를 “지켜”보는 보름달 “당신”을 보는 것 아닌가. 열네 마디 어휘로 깊은 그리움과 사모의 정을 밤하늘 보름달처럼 “환하게” 그려낸 「보름달」 가운데 은은한 기쁨이, 은은한 슬픔이 숨어 있다.
시에 어려운 말을 담아야 하는가. 시가 꼭 길어야 하는가. 「시인의 말」처럼 ‘뜻은 깊게 감추고 표현을 공교롭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야 한다는, 시가 꼭 어렵고 근사한 말을 담아야 하는 건 아니다.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은은한 정을 담을 수 있다. 시가 세세히 가르쳐주자고 길어야 할 필요도 없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없다 하듯이, 말을 덜어내면 명징한 의미가 드러난다.
시간을 넘나들며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는 양자역학의 시대에, 몇 마디 안 되는 내 시가 지혜와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서늘한 기쁨을 줄 수 있을까. 누가 내 시의 허물을 뒤적거려도 흔쾌히 고맙다 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말, 그 누구도 발설하지 않은 말로 시를 쓸 수 있을까. 말하지 않고 말한다는 절제와 함축의 미학을 시조라는 장대한 진리 위에 실천할 수 있을까. 나는 나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