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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와 시 이야기

홍성란, <시를 쓰려는 이에게-나를 돌보는 시간>(생태역사문화연구소, 2023)

작성자홍성란|작성시간23.10.10|조회수88 목록 댓글 5

시를 쓰려는 이에게

-나를 돌보는 시간

 

 

   시를 쓰겠다는 말은 시를 잘 쓰겠다는 전제를 안고 있다잘 쓰겠다는 마음이 시를 잘 쓰게 한다시를 쓰겠다는 말은 무언가 욕망하고 있다는 것욕망의 다른 이름은 결핍이다시는 결핍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표현한다그것이 잘 보이고잘 들리고 느껴지게끔 드러내는 정화淨化의 시간이 시를 쓰는 행복한 시간이다우리가 행복감에 젖어 시 쓰는 시간은 나를 지지支持하는 시간이다.

   시를 쓰려는 인생의 본질도 욕망이다우리는 늘 무언가 부족하여 갈망한다부와 명예사랑과 건강 같은 몇 가지 불가피한 세속적 욕망과 여기서 파생하는 감정을 갈망한다갈망은 기대의 다른 이름이다우리는 가끔 세속적 실질과 감정이 기대만큼 충족되는 행복한 경험을 한다그러나 더 자주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어긋난 기대가 주는 실망이거나 후회라는 감정이다기대는 얼마나 많이 우리를 저버렸나후회는 얼마나 많이 우리를 부끄럽게 했나.

   욕망과 더불어 유한한 인생의 본질은 불안이다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할까 불안하고무엇을 잃게 될까 불안하고 기대가 이뤄지지 않을까 불안하다그러니 불안을 지우고 좀 더 평온해지기 위해 기대라는 망상을 버리는 게 옳다는 것은 안다안다고 해서 아는 것을 완벽하게 실천하며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것도 안다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대가 들어앉아 있다그림자처럼 떼어낼 수 없는 막연한 기대그러니 나는 나를 가엾게 여기며 스스로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명상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마치 시행착오와도 같은 이런 경험의 시간이 쌓이며 진심 진정을 담은 지혜가 생길 수 있다행운처럼영감靈感처럼 의도하지 않은 묘수가 깃들 수 있다.

   우리가 성찰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뒤섞인 감정의 뭉치를 풀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나를 돌아보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나를 돌보는 시간이다나를 돌보는 시간을 통하여 평온해지기를 원한다우리가 평온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더 평온해지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지상의 삶에 절대 평온이 있을까우리는 다만 좀 더 평온해지기를 갈망할 뿐이다.

   큰 욕심 내지 않고 좀 더 평온해지기를 바랄 뿐이라 해도 우리는 가끔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말을 듣곤 한다그러나 시를 쓰려는 이에게 다른 목소리가 꼭 필요한 만큼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detail이 중요하다아주 근소해 보이는 차이지만 시에서 그 시어가 선택된 신중한 이유와 어떻게 조합되고 어떻게 배열되는가 하는 순서가 아주 중요하다는 말이다어떤 조사를 쓰고어미 변화를 어떻게 주고 종결어미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의미는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특별히 서정시의 경우정형시가 가지는 운율을 바탕으로 한다 해도 음량을 조절하며 리듬의 변주를 꾀할 수 있다그렇게 마음을 쓰며 진심 진정을 표현한 감각적인 한 편의 시에서 독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과 음향의 스펙트럼이 번져나게 할 수 있다.

   시를 잘 쓰겠다는 사려 깊은 마음이 시를 잘 쓸 수 있게 한다어떤 결핍에서 비롯되었거나 겸허히 나를 돌아보며 갈망을 풀어내는 시간은 행복하다시를 쓰는 시간은 나를 돌보며 내 인생을 지지하는 발효의 시간이다.

 

2023.10.13.

홍성란

 

 

 

애기메꽃

 

 

한때 세상은

날 위해 도는 줄 알았지

 

날 위해 돌돌 감아오르는 줄 알았지

 

들길에

쪼그려 앉은 분홍치마 계집애

 

 

 

 

소풍

 

 

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저만치,

 

비탈 아래 가는 버스

멀리 환한

복사꽃

 

꽃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곁에 자는 봉분 하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단비 한번 왔는갑다 활딱 벗고 뛰쳐나온 저년들 봐저년들 봐 민가에 살림 차린 개나리 왕벚꽃은 사람 닮아 왁자한데

 

노루귀 섬노루귀 어미 곁에 새끼노루귀얼레지 흰얼레지 깽깽이풀에 복수초할미꽃 노랑할미꽃 가는귀먹은 가는잎할미꽃우리 그이는 솔붓꽃 내 각시는 각시붓꽃물렀거라 왜미나리아재비 살짝 들린 처녀치마하늘에도 땅채송화 구수하니 각시둥굴레생쥐 잡아 괭이눈 도망쳐라 털괭이눈싫어도 동의나물 낯 두꺼운 윤판나물허허실실 미치광이 달큰해도 좀씀바귀모두 모아 모데미풀 한계령에 한계령풀기운 내게 물솜방망이 삼태기에 삼지구엽초바람둥이 변산바람꽃 은밀하니 조개나물봉긋한 들꽃 산꽃 두 팔 가린 저 젖망울

 

간지러봄바람 간지러 홀아비꽃대 남실댄다

 

 

 

 

 

따뜻한 슬픔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차마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애인 있어요

 

 

노래자랑에 입상하신 여든한 살 할머니가 분홍 셔츠에 흰 바지 차려입고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다소곳 환히 부르네

 

숨은 턱에 찼으나 손 모아 파르르 입술 모아 애인 있어요말 못한 애인 있다니 여든넷 어머니 그늘 겹쳐 오네 새치 뽑던 파마머리 젖가슴 뭉클 잡히던 얼굴 연하고질煙霞痼疾이여희미한 내 노래여

나도 애인 있어요춘천 어디 산비탈 가지마다 매어 두신 실오리실오리 스쳐 돈담무심頓淡無心 내려온 데 목메도록 애인 있어요 천석고황泉石膏肓이여희미한 내 노래여 골도 좋아 물 시린 집다시 못 올 흔들의자에 내가 버린 애인 있어요

 

나 날 적 궁전이었으나 내가 버린 폐가廢家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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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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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미진(강진아씨) | 작성시간 23.10.11 나도 애인 있어요..내가 버린 폐가...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궁전... 잃어버린 요람!

    단시조는 단시조대로 사설은 사설대로
    잘 발효된 시의 효소 섭취하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홍성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31 서울 양재천에도 가을이 깊었습니다. 내일은 비가 온다니 낙엽이 더 곱겠습니다. 감국 향기 은은한 강진을 그려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미진(강진아씨) | 작성시간 23.11.29 홍성란 오늘은 양재천에 보일듯말듯 첫는이 내렸어요...은밀한 축하의 반짝이들...둘이 걷는 그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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