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시 모음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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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독
문정희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 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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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를 낳은 달
문정희
나를 낳은 건 흙이나 학교가 아니었다
떠나가라 떠나가라 소리치며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달, 그녀의
깊은 주름살을 오늘은 어머니라 부른다
맨드라미 같은 붉은 벼슬의꿈과
날마다 알을 낳는 힘과
밤마다 사랑을 만드는 눈물을
그녀가 아니면 어디에서 배웠으랴
모든 생명을 온기로 품어
살아있는 대지의 체온
모든 상처를 맑게 씻어
결국은 빛나는 생명의 눈부심을
나를 낳은 달, 그녀가 아니면
어디서 보았으랴
지난 여름 매미채 하나씩 들고
도회로 떠난 아이들은
고향에 쉬이 돌아올 수 없는
거인이 되었다지만
그래서 기쁘고 쓸쓸한
나를 낳은 달
가을 창가에 홀로 핀 꽃처럼
환환 웃음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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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문정희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숨죽여 홀로 운 것도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지막처럼 고백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두려워하며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한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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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거
문정희
나하고 나뿐이다
뼛속에 유빙(遊氷)이 떠다닌다
나는 나이테 없는 식물 같은 동물
피다 증발해버린 빙하기를 사는
독거의 꽃
불가해한 선사(先史)에서 흘러온
소금 기둥이다
불꽃의 순간을 두들기는
허공의 하루살이이다
나하고 나하고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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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돌아가는 길
문정희
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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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물의 처녀
문정희
붉은 물이 흐른다
더 이상은 벌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벌린 두 다리 사이
하늘 아래 가장 깊은 문 연다
치욕 중의 치욕의 자태로
참혹한 죄인으로 죽음까지 당도한다
드디어 다산(多産) 처녀의 속살에서
소혹성 같은 한 울음이 태어난다
불덩이의 처음과 끝에서
대지모(大地母)의 살과 뼈에서
한 기적이 솟아난다
지상에 왔다가 감히 그 문을
벼락처럼 연 일이 있다
뽀얀 생명이 흐르는 부푼 젖꼭지를
언어의 입에다 쪽쪽 물려 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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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바다에 시간을 곶고
문정희
시간은 뙤약볕처럼 날카로웠다
두럽고 아슬아슬하게
맨 살 위에 장대를 꽂기도 했다
그래서 삶은 때때로 전쟁을 연상시켰다
하늘아래 허리를 구부리는 것은 굴욕이 아니다
이 빗발치듯 내려꽂히는 시간 속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로 이마를 맞대고
생명과 생명은 이어져왔다
바다가 밀려오고, 밀려나가고
또 가을이 오고, 봄이 오고
그러므로 우리가 허리를 구부려 줍는 것은
차라리 영원한 허기인지도 모른다
허기가 바다를 다시 채운다
허기가 지상에 가을을 불러온다
마치 병정들처럼
시간이 맨살 위로
장대를 들고 다가드는 시간
문득 발아래 깔리는 무수한 별들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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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석의 노래
문정희
만지지 말아요
이건 나의 슬픔이에요
오랫동안 숨죽여 울며
황금시간을 으깨 만든
이건 오직 나의 것이에요
……
나는 이미 깊은 슬픔에 길들어
이제 그 없이는
그래요
나는 보석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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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랑하는 것은
문정희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 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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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문정희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속의 눈
천년의 역사에다 댕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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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소식
문정희
오늘도 세상에 기쁜 일은 많다
어느 집에는 아기가 태어나고
누구네 꽃밭에는
간신히 실눈 뜨고 꽃도 피었다
시간이 이글거리는 창가에서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새로 사랑을 시작하고
새벽녘에 마른 번개가
잠시 쳤던 것은
밤새 고통하던 시인이
드디어 그의 새 시편에
뚝!하고 마침부호를
찍는 소리였다
오늘도 이렇게 기쁜 일은 참 많다
천길 낭떠러지
짐승들 우글거리는
이곳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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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름다운 곳
문정희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 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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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알 수 없었다
문정희
진실로 내가 위험한지 알 수 없었다
눈에는 안 보이는 매끄러운 떨림은 무엇인가
방울뱀처럼
나는 늘 내가 두려웠다
내가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군집을 벗어나
뱀처럼 자갈밭을 온몸으로 밀고 가 보아도
맹독(猛毒)으로 꽈리를 틀고
시간을 통째로 녹이며 허공을 울어 보아도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오직 빛난는 질주가 되고 싶은
아름답고 시퍼런 비늘
알 수 없었다
입술 붉은장미를 씹으며 방울 소리를 내며
빗금 찬란한 상처가 전부일 뿐이었다
진실로 내가 위험한지 알 수 없었다
눈에는 안 보이는 이 슬픔의 덜미는 무엇인가
왜 치명의 고독 속에 꿈틀거려야 싱싱한생명일까
언제나 나 홀로가 전부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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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우리들 마음속에
문정희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뜻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거치른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늘
해보다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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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유리창을 닦으며
문정희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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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별 이후
문정희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이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알 떠 넣는 일이다
옛날옛날적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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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찔레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가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만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리 늘 말을 잃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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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초여름 숲처럼
문정희
나무와 나무 사이엔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그대와 나 사이엔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신전의 두 기둥처럼 마주 보고 서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쓸쓸히 회랑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오늘 저 초여름 숲처럼
그대를 향해 나는
푸른 숨결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쑤실 가시도 없이
너무 멀어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 길을 만드는 일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푸른 강 하나 흐르게 하고
기대려 하지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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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친구
문정희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누가 몰랐으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언젠가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홀연 다가와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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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키 큰 남자를 보면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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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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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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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흐름에 대하여
문정희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고 싶다.
참으로 흐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흐름의 숨결로 키워낸 진주는
왜 슬픔처럼 영롱한 것인지
알고 싶다.
하늘은 왜 우리에게
햇살과 함께
자유를 주었는가.
우리들은 왜 흐르는가.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지 못하고
날개가 되지 못하고
왜 약속처럼 산으로 가는가.
산으로 가는가.
한 벌 죽음으로 자유와 햇살 빼앗기고
다만 혼자 제 목숨 갖고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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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흐린 날
문정희
흐린 날은 절에 가고 싶다
석연꽃 아래
북이 울리고
목어가 우는
절에 가면
나는 연등이 되리라
펄럭이는 하늘 끝에 걸리리라
무슨 새의 혼을 쓰고 태어났기에
날아도 날아도 허공이 남을까
흐린 날은
그 허공 절에 갖다 아낌없이 바치고
나는 연등이 되리라
펄럭이는 하늘 끝에
무색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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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흙
문정희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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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자스민 서명옥 작성시간 19.06.17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문정희 시인의 글
전 참 좋아합니다 -
작성자자스민 서명옥 작성시간 19.06.17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기대려 하지 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초여름 숲처럼
상큼해요 글이요 -
작성자정미화 작성시간 19.06.17 나를 낳은 달
문정희
나를 낳은 건 흙이나 학교가 아니었다
떠나가라 떠나가라 소리치며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달, 그녀의
깊은 주름살을 오늘은 어머니라 부른다
맨드라미 같은 붉은 벼슬의꿈과
날마다 알을 낳는 힘과
밤마다 사랑을 만드는 눈물을
그녀가 아니면 어디에서 배웠으랴
모든 생명을 온기로 품어
살아있는 대지의 체온
모든 상처를 맑게 씻어
결국은 빛나는 생명의 눈부심을
나를 낳은 달, 그녀가 아니면
어디서 보았으랴
지난 여름 매미채 하나씩 들고
도회로 떠난 아이들은
고향에 쉬이 돌아올 수 없는
거인이 되었다지만
그래서 기쁘고 쓸쓸한
나를 낳은 달
가을 창가에 홀로 핀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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