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업에 대한 바람부터 적겠습니다.
독서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글을 읽을 줄 알면 독서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만, 글을 읽는 것과 독서를 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요즘들어 독서하는 시간이 소비하는 시간으로 여겨집니다. 이전부터 킬링타임용 독서를 해오던 것을 이제야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비가 아닌 생산으로 이어지는 독서를 하고 싶습니다.
2. 그늘 - 문학과 숨은신 감상
지난 학기 <시론(詩論)>이라는 우리과 수업을 들었다.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시에는 문외한이다. 엄살이 아니라 읽어본 시집이 다섯 권도 채 되지 않는 생초보 문외한이다. 수강신청을 하면서도 과연 따라갈 수 있을까, 나만 뒤쳐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었다. 뒤쳐져도 배워보자는 자세로 신청했다.
오리엔테이션과 휴강을 지나 제대로된 첫수업에 다룬 시는 윤동주의 '서시'였다. 윤동주의 시라면 책을 넘기며 길을 오가며 인터넷을 휘저어 다니며 여러 번 마주한 텍스트니까, 적어도 처음 보는 텍스트는 아니니까, 나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몇 마디쯤 할 수 있을' 그런 한국인이니까, 수업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윤동주의 시가 좋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여러 편의 시 중 하나일 뿐 어떠한 감흥이나 감동도 느낄 수 없었다. 하늘, 바람, 별, 가을, 잎새등의 나와는 거리가 먼 시어도 그렇거니와 일제강점기의 저항정신도 나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나는 '만들어진 윤동주'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시론>에서 배운 시를 읽는 방법과 이 책의 '타자와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동일화'하려는 의지'를 가진 윤동주를 통해 그의 시를 다르게 읽을 수 있었다. '본래의 윤동주'를 읽게 될 기회를 가졌다고 할까.
3. 가을 윤동주 생각 감상
방송의 첫 장면은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학의 시인 윤동주를 알리는 사람들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이어 등장한 일본 여성은방송 내내 윤동주의 발자취를 찾아다닌다. 그녀는 잠깐 등장한 연세대학교를 시작으로 도쿄, 교토, 후쿠오카 등을 다니며 윤동주를전문적인 수준의 연구를 하는 주부, 윤동주의 생가를 최초로 방문한 교수, 윤동주의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도청과 싸우는 사람들, 윤동주의 시를 읽고 분석하는 모임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방송이 이상해보였다. 방송의 대부분이 일본을 배경으로 하며 일본인의 인터뷰로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이며 모국어를 지키다 옥살이를 한 사람이며 나라 잃은 슬픔을 크기로 나타낼 수 있다면 그 크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윤동주가 아닌가. 그 윤동주를 찾아가는 방송의 대부분이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인들을 만나는 거라니. 아이러니했다.
물론 윤동주의 생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1941년 이후에 그가 일본에서 지냈기 때문이지 않느냐 할 수있다.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방송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과거 제국주의 일본은 분명 잘못을 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그런 잘못을 꼬집을 만큼 우리는 과거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군 위안부 문제며 독도 문제며 그저 문제라고만 알고 있지 않은가. '과거' 일본이 제국주의의 잘못을 저질렀다면 '현재' 우리들은 무관심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4.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ㅡ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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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과연 쉽게 씌어질 수 있을까. 결코 쉽게 시를 쓰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글이 그러하듯 시도 시인의 삶과 일치할 것이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대목을 보면 '인생을 살기 어려운데'라고 쓰지 않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듯 쓰고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남의 나라'로 유학 와 '보내주신 학비'를 받으며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다닌다고 표현한다. 그게 '쉽게 씌어진 시'처럼 쉽고 편안한 삶으로 여김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외부의 삶은 동무들은 죽고, 살기 어렵고, 고작 등불 가지곤 어둠을 '조금'밖에 내몰 수 없을 정도로 어둡다. '남의 나라'에서 바라보는 나의 나라는 어두울 뿐이며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시쓰기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자신이 부끄럽고 슬프다.
시인은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라고 적고 있다. 두 번의 '나는'을 적은 시인의 자기부정은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다. 그는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나보다. 화해와 용서의 제스처라 할 수 있는 '악수' 역시 눈물과 위안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