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라는 이 작은 행성 위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연과 스치듯 지나갈까.
2024년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3일 간의 짧지만, 강렬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휘슬러 마을, 설국의 겨울 여행이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마음속 깊이 남아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키 리조트인 이곳은 숨 막히는 설경과 함께 각기 다른 나라에서 관광하러 온 낯선 이들이 우정을 쌓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낯선 이들과 짧은 동행이 뜻밖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금요일부터 소담스럽게 내리던 함박눈이 밤새 20여 센티가 넘게 쌓이고 다음 날은 더 큰 눈송이가 펄펄 휘날리며 우리의 얼굴을 때렸다.
오랜만의 휘슬러 겨울 여행의 꽃인 탐스러운 함박눈을 뽀드득뽀드득 즈려 밟는 기분이란... 중년의 여자 셋은 아침 식사 후, 넘치는 에너지를 분출하며 하이킹을 즐겼다. 눈 덮인 로스트 레이크 ( Lost Lake )의 빙판이 된 호수를 감상하고, 눈이 푹푹 빠지는 크로스컨트리 스키 트레일을 걸었다. 인적이 끊긴 골프장의 적막함에 취해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뒹굴어도 보았다.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대자연이 내어준 품속을 마냥 즐겼다.
바로 그때 어디에서 왔는지 앳된 동양인 청년 두 명이 " 안녕하세요? ",라며 말을 걸었다. 로스트 레이크로 가는 길을 묻는 그들에게 우리들의 오지라퍼인 ‘하얀 눈’은 길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제각기 갈 길을 가려던 찰나 대뜸 “ 라면 먹고 갈래요? ”라고, 따뜻한 한마디를 던졌다. 순간 뜬금없는 그녀의 제안에 나는 어이가 없어 실실 웃었다. 그 말이 주는 뉘앙스가 너무 당혹스러워서...
그들도 뜻밖의 제안이라 잠시 주춤하더니 곧 우리를 따라 동행했다. 그때 우리는 한 치 앞을 몰랐다. 500 겁의 쌓인 인연으로 옷깃을 스치듯 우리가 함께한 시공간 찰나의 순간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밴쿠버에서 가져간 3개의 해물탕면 라면과 녹두 빈대떡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으며 그들이 밴쿠버에서 개최되는 AI 워크숍에 참석한 공학도들임을 알게 되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끝낸 연구원 29살 호기, 대학원생 26살의 앳된 동빈. 토요일 하루 잠시 짬을 내어 떠난 관광지 휘슬러. 고속버스를 타고 온 그들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로스트 레이크를 둘러보라, 권유하여 보냈다. 헤어지기 바로 직전 오후 1시에 폭설과 폭풍우의 여파로 산사태가 덮쳐버린 씨 투 스카이 하이웨이 ( Sea to Sky Highway )가 자정까지 폐쇄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하얀 눈’은 만일에 대비해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12월 14일 토요일 그날 오후, 우리는 상상도 못 한 고립을 경험하게 되었다.
오후 3시 30분에 접한 뉴스는 더욱 처참했다. 앞으로 적어도 24시간 동안 씨 투 스카이 하이웨이의 통행이 양방향으로 전면통제된다고 했다. ‘하얀 눈’도 다음날 일요일 아침 8시까지는 사이프러스산으로 출근해야 하기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몹시 심란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자, 동빈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속버스가 취소되고 터미널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 청년들과 함께 있다고 했다. 얼마 뒤 길이 끊기고 오갈 데 없어 오도 가도 못하는 7인의 AI 공학도 청년들을 만났다. 막막하고 불안함이 역력한 얼굴을 호텔 로비에서 맞닥뜨렸을 때 나는 솟구치는 울음을 목으로 힘겹게 삭였다.
긴의자를 움직여 모두 다 함께 둥그렇게 모여 회의했다. 각자의 처한 상황과 어떻게 할지 대책을 논의했다. 갈 길이 급한 4명의 청년은 토요일 저녁 그길로 바로 스콰미쉬로 떠났다.
그리고 우리 H호텔 도서관 아늑한 소파에 남겨진 대학원생 연구원 호기, 대학원생 동빈과 승철. 그렇게 남자 셋, 여자 셋이 머리를 맞대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갖은 인맥을 총동원해 봐도 헬리콥터 하늘길 그리고 스콰미쉬까지 배를 띄울 물길도 무심하게 열리지 않았다. 이제 내일 아침 10시, 오후 1시에 예정대로 고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확률은 덧없기만 했다.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6시간여 걸려 막힌 길을 우회하는 선택을 한 사람들의 사연도 사회관계망을 통해 시시각각 올라왔다. 폭설과 폭풍우로 길이 험해 어쩔 수 없이 다시 휘슬러로 돌아왔다고 했다. 교통사고 소식도 이어졌다. 어림잡아 6000여 명의 사람들이 이번 산사태로 휘슬러에 고립되었다고 한다. 팬 퍼시픽 호텔에서는 그곳을 찾은 약 50여 명의 조난자들을 수용하고 물과 피자, 잠자리, 담요, 베개 등을 공급했다는 훈훈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역시 캐나다, 선진국답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따뜻해졌다.
9시경 밤참으로 남자 셋을 위해 아몬드 버터를 곁들인 사과와 그릴 치즈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었다. 호기롭게 라면을 더 먹을 수 있다는 승철이는 어렵게 구한 진라면과 나의 최애 맥주, 그랜빌 아일랜드 윈터에일을 대접했다.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피어나는 웃음꽃이 말할 수 없이 화사했다.
씨 투 스카이 하이웨이가 기적처럼 언제 재개될지, 모두 다 업데이트되는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호텔 도서관 안락한 긴 소파에서 밤을 지새우려 청년들이 인사를 하고 떠났다.
마음 한구석에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무거운 눈을 감아 보지만 쉽사리 잠이 올 리 없었다. 18시간 동안 이어진 칠흑 같은 어둠 속 고립. 우리는 이대로 영원히 갇혀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오전 5시 10분경, “똑똑” 두 번의 노크 소리에 후다닥 놀라 일어나 보니 호기와 동빈의 들뜨고 기쁨으로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정말 우리의 간절한 희망이 기적처럼 이루어진 것이다. 산사태로 인해 쓰러진 그 많은 나무와 진흙더미 등을 말끔히 치우고 드디어 하이웨이가 뚫렸단다. 모닝커피를 한 잔씩 나누고 청년들을 배웅했다. 나중에 혼자서 일부러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와준 승철이도 아들 같아서 엄마의 심정으로 꼭 안아서 배웅했다.
그렇게 청년들을 고국으로 떠나보내며 마음이 뭉클했다. 떠나는 청년들을 꼭 안아주며 그 순간은 마치 가족처럼 느껴졌다.
이 짧은 인연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함께한 시간은 단순한 고립이 아닌, 인생의 소중한 순간으로 남았다. 당시의 두려움과 불안이 이제는 따뜻한 기억으로 잊히지 않을 추억이 되었다.
나는 인생의 고된 여정 속에서 스치는 이러한 작은 인연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로스트 레이크에서 시작된 이 특별한 인연은 바람처럼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갔지만, 서로의 삶에 작은 흔적을 남겼고,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맛있는 한 끼 식사를 대접하겠다던 그들과 마주하며 만날 수 있는 인연이 되기를 바란다. 인생의 금 같은 값진 경험이 앞으로 미래가 창창한 청년들의 삶에 귀한 윤활유가 되기를…
“ 라면 먹고 갈래요? ” 그 진부하지만 따뜻한 한마디로 로스트 레이크가 맺어준 소중한 인연의 방점을 찍었다. 세상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오지라퍼 ' 하얀 눈 ' , 김미영 스키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