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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으로

麒麟같이 커다란 체구, 그리고 애정과 진실과 뜨거운 불덩이의 시인 최승렬

작성자느티나무|작성시간08.10.08|조회수34 목록 댓글 1

麒麟같이 커다란 체구, 그리고 애정과 진실과 뜨거운 불덩이의 시인 최승렬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2007년 12월 02일 (일) 14:24:12 기호일보

   
 

 

 

 

 

 

 

 

 

 

 

 

 

 

 

 

 

 

 

 

 

 

 

 

 

 

 

 

원정(園丁) 최승렬(崔承烈) 시인이 타계한 지도

어느새 4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살 만큼 살았다는 듯,

팔십이 되는 것은 지루하다는 듯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난 시인.

아니, 시인이 아니라

가슴으로 수천의 제자를 길러낸 ‘한글 선생’,

올곧은 사표(師表).

인천이 이런 시인, 이런 큰 교육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여간만한 행운이 아니다.

섬세하면서도 불의에 용맹했고,

오롯이 고독하되 진리에 불길같이 타오르던 시인,

예술가, 참 교육자를 인천은 가지고 있었다.

전주(全州) 사람 최승렬 선생이

인천으로 오게 된 것은 전혀 타의에 의해서였다.

“밖에서는 월요일 교정 조회가 시작되었다.

이 학교 안에서도 이미 소문은 나 있어

몇 사람은 알고 있었던지

나를 영락없는 이 학교에 부임하러 온 신임 교사로

인정하는 눈길들이었다.

이윽고 교장이 조례대 위에 올라섰다.

스피커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확대해서

운동장에 뿌렸다.

‘오늘 아침에 한글 선생 한 분이 오셨다. 이제 인사할 게다.’


나는 그것이 내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좀 따분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무언가 이변이 생긴 긴장감이 나를 엄습했다.

학생들의 시선이 유리창을 통해

교장실로 집중해 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윽고 교감이 면구스러운 웃음을 웃으며 교장실로 들어왔다.

교정은 갑자기 스피커 소리가 멎고

선생들도 유리창 너머로 교장실을 기웃거리고 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가 있어 이런 일을 이런 식으로 당했다면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난생 처음 내가 극도로 혼란에 빠진 것을 경험했다.

이것이 그분이 내게 한 첫 번째 일이요,

나와 관계있는 두 번째 발음이었다.”

이것이 최승렬 시인이, ‘그분’이라고 불리는

고 길영희(吉瑛羲) 교장에 의해

반강제로 제물포고등학교에 부임하게 된 연유를

털어놓은 생전의 기록이다.

1950년대 당시, 전국의 유명 교사들을

무조건 인천으로 유치해 인재를 기르려 했던

길 교장의 교육 뱃심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나와 더불어 청춘을 무작정 낭비하던 승렬은

인천으로 발길을 돌린 뒤

무척 인색하게도 청춘을 아끼고 저축하는

얄미운 서울내기가 되어 가고 있다.

고독을 애인처럼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그런 고독의 주변에서

월미도 저편에 사위어가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애정을, 끝내는 스스로까지를

무심코 쥐었다 버리는 모래알처럼 건져 보지만,

이것이 그의 위선이 아니더면

나는 승렬을 내 교우록(交友錄)의 심장부에서

무참히 붉은 줄을 그었을 것이다.

내 기나긴 인생의, 하잘것없는 여정에서

한 사람의 참되고, 참하고, 아름답고, 불길같이 타오르는

(이런 구지레한 형용이 만일 허용된다면)

승렬을 발견한 데서 느끼는 의의와 희열은

진즉 내 가슴에 간직해 보지 못한 황홀인 것을

나는 차라리 지나치게 알아서 불행하다.

麒麟같이 커다란 그의 체구는

그 성분으로 따져볼 때 애정과 진실과 뜨거운 불덩이가

그 주요소일 것이다.

지치고 허덕이면서 자학 끝에도 승렬은

다시 재처 하잘것없는 것들에 피나는 항거도 하지만

이것들은 그의 본연한 마음의 표정은 아니다.

항상 가슴에 타오르는 불길을 던져 볼 방향과 대상과 시간을

궁리하기에 그는 여념이 없는 것이다.

종려나무 그늘에 깃드는 이국 정조(異國情操)에 의지하면서

귤나무의 진한 향기와 파초 잎 사이에 명멸하는

생명의 고향인 어머니의 환상을 찾는 그는

수선, 히아신스, 아네모네를 가꾸면서

이것들의 육체 속에 자신을 묻으며

주춤 멈췄다 일어서는 고단한 인생을 가누고

응시와 성실 속에서 그의 새로워야 할 청춘을

준비하고 있는 한 사람의 원정(園丁)일 것이다.

   
 
  ▲ 시  
 

 

 

 

 

 

 

 

 

 

 

 

 

 

 

 

 

 

 

 

 

 

 

 

 

 

 

이 원정이 가꾸는 나무와 구근(球根)과 푸성귀가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듯,

그는 이것들과 더불어 그의 삭막할 뻔한 가슴 언저리에

발아와 개화를 약속하고 있기에,

언젠가 한번은 그와 더불어 우리 가슴에 타고 있는

잠잠한 불길을 태울 날을

나는 아직 손꼽아 기다려도 좋은 것이다.”

이 글은 원정 시인이 인천으로 이주한 뒤

1959년 인천에서 발간한 첫 시집 『원정(園丁)』의 앞에

신석정(辛夕汀)이 쓴 서문(序文) 전문이다.

길게 인용한 것은 시인으로서의 원정의 면목

--풋풋한 제자들과 청론(淸論) 담소를 좋아하고

꽃 기르기를 업으로 삼았던 인천 예술가,

시인 원정의 모습을 같은 시인인 석정을 통해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서문의 말미에는

“1959년 1월 22일 제물포를 다녀가면서 신석정”이라고

씌어 있다. 실제 석정과 원정은

상당한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동도동지(同途同志)의 절친한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훨씬 연배인 석정이 최승렬 시인을 찾아

인천으로 출타할 만큼

둘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정 최승렬 시인은

타협을 모르는 그 꼿꼿한 성품 때문에

인천의 문인들과는 그다지 원만한 관계를

가지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인천문협에서 활동한 것도

인천 이주 이듬해인 1958년부터 1975년 무렵까지뿐이다.

그런 사정을 반영하는 것일까.

『인천시사』의 기자(記者)는

그에 대해 지극히 간략하게,

혼자 작품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매우 쓸쓸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6·25전쟁 이후

인천에서 최초로 동인지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최병구(崔炳九) 시인이었다.

조병화(趙炳華), 이인석(李仁石), 김양수(金良洙)는

중앙 문단의 발표지들을 활용되게 되었으나,

오로지 지역 문단에서만 몰려다녀야 했던

최병구, 손설향(孫雪鄕) 등에게는

동인지 운동이라도 의존하지 않고서는

술자리로만 몰려다니는 길밖에 없었다.

 

최병구 시인의 『초원(草原)』에 이어

이정태(李鼎泰), 랑승만(浪承萬), 손재준(孫載駿)에 의한

『사파(砂坡)』 동인이 생겼고,

김영달(金泳達), 홍명희(洪明姬) 두 사람의

2인 동인 시집으로 『소택지대(沼澤地帶』가 선보이기도 했다.

 

 또 그 무렵 비교적 장년층에 속하는

연배의 산문 작가들로 구성된 『해협(海峽)』 동인들이

소설 동인지를 발간했다.

조수일(趙守逸), 김창흡(金昌洽), 심창화(沈昌化),

김창황(金昌璜), 최정삼(崔定三) 등이 바로 그 동인 멤버였다.

이밖에 홀로 활동해 온 최승렬, 이광훈(李廣薰)도

꾸준한 활동을 벌였다.”

그렇다면 원정을,

인천에서 교육자로서는 성공(?)했으되

문학에서는 다소 소외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것은 최승렬 시인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는 눈 감는 날까지

제자들이 있는 인천을

자신의 고향으로 알고 인천을 사랑했다.

누구보다도 인천의 고독을,

인천의 적막을 애틋이 사랑한 진정한 시인, 예술가였다.

 

 어느 겨울 오후라도 좋고
 찻집 창변의 사보텐이라도 좋다.

 수다스런 백화점 쇼 윈도우에
 떨어지는 성 베드로의 종.

 여운이 남긴 크낙한 여백에
 얼굴들이 부고(訃告)처럼 비애를 심어 간다.

 지붕 너머 회은색 바다가 점멸하는 동안
 어쩌라는 것인가 붉은 시그널!
 네거리는 지금 마악 황혼을 헐어 벽을 쌓고

 군중의 밀림 속 무성한 고독이
 돛 내린 범선처럼 집결한 기항지.

 먼지같이 자욱한 훤소(喧騷)가
 삼엄한 적막을 합창하는 거리거리
 경결(硬結)한 공기는 지금 지층보다 무겁다.

 이런 때 어찌 시계는 태연히 돌고 있는 것일까.
 눈이라도 펑펑 내려야겠다.

 --최승렬「경동근처(京洞近處)」전문

 

 인천에 살면서 생전 그가 걷기 좋아했던 거리

--경동 거리가 잔뜩 찌푸려 있다.

눈이라도 내려야겠다.

거구에 고보(高堡)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를

시인으로 기억하는 시민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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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느티나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0.08 '코보'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최승렬 선생님은 학창 시절 저에게 놀라운 분이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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