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모파기容貌疤記란 찾고자하는 범인의 얼굴모양을
표현한 그림과 기록입니다.
사진이 없을 때이니 눈 좋은 화공들이 수백장을 그려서 길목이나 저잣거리에 붙여서 범인을 찾았습니다.
용모容貌란얼굴을 말하는 것이고, 파기疤記라 함은 얼굴의 특징이나 흉터를 기록한 것을 말합니다.그러니까 얼굴그림容貌이 있고 옆에 파기疤記의 글자가 20여자 있습니다.
용모파기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이 정교하게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요즘으로 치면 그 사람의 특징을 강조한 [케리케쳐] 같습니다. 아마 범인을 딱 보면 “용모파기의 그 놈이다”란 것을 알았을 겁니다. 당시는 용모파기 전문 화공(당시는 환쟁이라함)이 엄청 많아서 기록에 화공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옛날 고서古書를 찾아 다닐 때 어느집이든 용모파기가 너덧장씩 있습니다. 대개 돈떼먹고 도망친놈 외거노비나 도망친 노비들의 용모파기였 추적追跡꾼들용도지요. 당주堂主의 용모파기는 없고 섬세하게 그린 초상화는 가끔 보입니다.
경기도 이천의 어느 양반가에서 백수집장의 용모파기를 봤습니다. 그집은 모든 노비들을 그려서 보관했던 겁니다. 그 양반가엔 전속 화공이 있었던 것이지요. 만석지기(1년 수확량이 만석)쯤 되면 전속 대장장이, 갓바치와 백정, 소목장,등 각분야의 기능공노비들이 있었는데 그집은 큰 부자였는지 화공도 있었던 겁니다.
언젠가 썻지만 옛 왕 일가의(왕비와 왕자) 얼굴은 일급비밀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천명이 안됐습니다. 정사를 논하는 신하나 곁에두는 내시와 무사등만 왕의 얼굴을 비교적 자세히 알았어요. (반란과 암살이 일상화 된 일본은 더해서 십수명의 가게무샤<같은 얼굴의 사람>을 두고도 진짜 영주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3백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왕의 곁에서 시중드는 내시나 무사들도 왕의 얼굴을 직시하지 못했어요. 심지어 신하들도 왕을 정면으로 直視하지 못했습니다. 눈을 내리깔고 대화했어요. 신하의 대장 격인 영의정이라도 만약 왕을 정면으로 보며 대화하면 다른 신하들이 탄핵상소를 빗발치게 올렸습니다. 그런류의 탄핵상소 초안을 십수번 보았어요.
왕이 공식적으로 궁외宮外를 행차 할 때 백성들이 부복하는 것은 왕의 얼굴을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몰래 보다가 들키면 현장에서 즉살시켯어요. 그만큼 용모파기를 그리는 화공들의 눈썰미가 뛰어나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아마 단 몇초간의 일별로 왕의 완벽한 용모파기를 그려냇을겁니다. (화공들의 일생 소원은 왕의 용모파기를 그리는 것이었어요.)
풍속화가로 유명헌 감홍도가 용모파기를 그렸던 화공출신이란 역사학자의 주장이 있는데 나는 그 주장이 일리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홍도는 대상자의 순간적인 몸짓을 잡아내어 그리는 실력은 따를자가 없을만큼 뛰어납니다. 김홍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다음에 쓰겠습니다.
민비를 시해 할 때 일본깡패들이 민비의 용모파기를 들고 있었지만 민비를 찾지 못해 십수명의 나인들을 민비로 오인해 살해합니다.
민비의 용모파기를 그린 화공이 민비의 얼굴을 못보고, 단지 일본깡패들에게 매수되어 깡패들을 인도한 궁성수비 장교 우가(이름을<범선>으로 기억함, 식물학자 우장춘의 父)의 증언으로 그렸고, 우가는 먼 발치에서 민비를 일별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궁성의 수비대나 나인들은 알림 없는 왕의 행차를 어찌 알까요? 그들이 얼굴을 아는 왕의 전속내시나 일선(최측근)의 호위무사가 나타나면 왕이 행차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행차는 알았으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그들도 용포까지는 볼 수 있으나 얼굴은 못봅니다. 그랫기에 궁성정문 수비장교 우가조차도 왕비의 얼굴을 정확히 몰랏던 겁니다.
이상 조선시대 우리 민초들이 살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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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풍걸 작성시간 19.06.12 엔젤라님이 아야했군요. 혈침봉 50번 찔러 부항으로 피 빼면 빨리 낫는데..
빼뿌아 진 것은 빼후아진 것보다는 낫고 빼금간 것은 빼뿌아진 것보다 낫고 빼부은 것은 빼금간 것보다는 낫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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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엔젤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9.06.13 네 별거 아닙니다
조금 쉬어주면 될 것 같습니다 ㅎ -
작성자풍걸 작성시간 19.06.12 잠시 거론된 우장춘박사는 우리나라를 구한 분이랍니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의 식생활야채 거의는 선진국에 구걸해야합니다. 부친이 우경국인데 민황후 시해사건당시 일본낭인들에게 협조했다가 단신 노를 저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여인 사이에 우박사를 낳지요, 우박사는 중학생 때 한국에서 건너온 자객의 칼에 부친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지만 해방과 동시 한국에 헌신하고자 귀국을 택합니다. 패전직후의 일본이지만 차라리 대마도를 대신 내주라며 난리법석이 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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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지킴이 작성시간 19.06.13 새로운 사실을 또하나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