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야도 우 떼자니야: 「마음챙김이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 2026년 4월 15일
수행자: 명상을 하며 약 20분 정도 마음챙김을 유지하고 있으면, 문득 “정말 지금 마음챙김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내가 마음챙김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사야도: 그런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마음챙김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단지 대상만 관찰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챙김 자체가 있는지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심자 수행자들에게는 먼저 대상을 아는 것을 배우라고 합니다. 대상이 알려지면, 그것을 아는 앎의 마음(knowing mind)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앎의 마음 뒤에는 명상하는 마음(meditating mind)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알게 되면, 수행자는 명상하는 마음의 편에 머물러야 합니다.
자신이 지금 마음챙김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 즉 그 앎 자체를 아는 사람은 마음챙김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알 때는 분명히 알고, 모를 때는 모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모른다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앎이 있다면, 그것은 확실하게 알려집니다.
그래서 나는 수행자들에게 늘 반복해서 명상하는 마음을 점검하라고 말합니다.
“정말 마음챙김이 있는가?”
이 질문은 마음챙김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이 마음챙김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마음챙김의 존재를 확실히 압니다. 그러나 명상하는 마음을 모르면, 늘 확신이 없게 됩니다.
오랫동안 대상만 알아차리고 있으면, 마음챙김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아는 마음까지 함께 알아야만, 마음챙김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앎 자체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마음챙김이 없을 때도 분명히 압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어떤 수행자가 식사를 하기 직전에,
“나는 마음챙김하며 식사를 해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생각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반쯤 하던 중 갑자기 마음챙김이 돌아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식사하면서 계속 마음챙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마음챙김이 방금 되돌아온 것이었구나.”
왜 그는 자신이 마음챙김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식사 전에 “마음챙김하며 먹어야지”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계속 마음챙김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챙김이 없었습니다. 식사 도중 마음챙김이 되돌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조금 전까지는 마음챙김이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수행자들에게 거듭거듭 묻습니다.
“지금 마음챙김하고 있는가, 아닌가?”
“마음챙김을 유지하고 있는가, 아닌가?”
또한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상하는 마음(meditating mind) 입니다. 대상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수행은 대상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문제는 많은 수행자들이 대상의 측면에서 마음의 측면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대상에만 머문다는 것입니다.
대상에만 머물면, 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것, 사라지는 것, 변화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마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마음에는 어떤 성질들이 존재하는지,
오온(五蘊)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옮긴이의 주
여기서 사야도 우 떼자니야가 구분하는 세 층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 대상(object)
→ 호흡, 소리, 감각, 생각 등 알아차려지는 것. - 아는 마음(knowing mind)
→ 대상을 알고 있는 앎. - 명상하는 마음(meditating mind)
→ 지금 알아차림이 있는지 없는지, 어떤 태도로 알고 있는지까지 아는 메타적 자각.
떼자니야 사야도는 수행의 핵심이 단순한 대상 관찰이 아니라, 대상을 아는 마음과 그 마음의 상태를 아는 것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수행은 단순한 집중(concentration)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정말 알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지혜로운 마음챙김으로 성숙해집니다.
Sayadaw U Tejaniya의 특징은 일반 위빠사나 스승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일반 스승들은 대상을 알아차랴라, 대상을 잊어버리지 말라면서 주의가 대상에게 향하도록 인도하는데 반해, 떼자니야 사야도는 알아차리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 라고 합니다. 이는 선종에서 말하는 회광반조 혹은 유식에서 말하는 自證分과 같습니다.
Sayadaw U Tejaniya는 현대 테라와다 불교의 가장 독창적인 명상 스승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얀마 양곤의 쉐우민(Shwe Oo Min) 수행센터에서 가르치며, 마하시 계통에서 출발했으나 독자적인 방향으로 수행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Shwe Oo Min Sayadaw에게 배웠으며, 한때는 섬유 사업을 하는 재가자로 살다가 1996년에 출가하였습니다. 또한 심한 우울증을 겪으면서 마음을 관찰하는 능력을 깊게 발전시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 일반적인 위빠사나와 떼자니야 사야도의 차이
대부분의 위빠사나 수행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습니다.
대상 → 알아차림
예를 들어,
호흡을 알아차려라.
몸의 감각을 알아차려라.
생각을 놓치지 말라.
대상을 잊어버리지 말라.
즉, 주의(attention)가 언제나 대상(object)을 향합니다.
그러나 떼자니야 사야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대상 → 대상을 아는 마음 → 그것을 아는 명상하는 마음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진정 중요한 것은 대상을 알고 있는 마음이다."
"Awareness alone is not enough."
"관찰되는 대상보다 관찰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그의 수행은 단순한 대상관찰이 아니라, 알아차림 자체를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회광반조(回光返照)와의 놀라운 유사성
중국 선종에서는 이를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부릅니다.
빛을 밖으로 비추지 말고, 그 빛이 나오는 근원으로 되돌리라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은 말합니다. 不識本心 學法無益.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법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
임제선사는 "빛을 돌이켜 스스로를 비추어라."(回光返照)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위빠사나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떼자니야 사야도는
"누가 알고 있는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알고 있는가?"
"마음챙김이 정말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수행은 놀랍게도 선종의 회광반조와 매우 가까워집니다.
3. 유식학의 자증분(自證分)과의 유사성
유식학은 인식작용을 네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상분(相分) : 대상
견분(見分) : 대상을 보는 마음
자증분(自證分) : 견분을 스스로 아는 작용
증자증분(證自證分) : 자증분까지 아는 작용
보통의 위빠사나는 상분 → 견분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떼자니야 사야도가 강조하는 "마음챙김이 있는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견분을 다시 비추는 자증분(自證分)에 상당히 가까운 구조를 가집니다.
그의 수행은 테라와다의 언어로 표현되지만, 현상학적으로는 유식의 자기증명적 의식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떼자니야 사야도의 "대상보다 관찰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물론 그는 철저히 테라와다의 언어를 사용하며 형이상학적 본성론을 말하지는 않지만, 실제 수행의 구조는 상당히 비슷합니다.
4. 왜 그는 '편안하라(Relax)'를 강조하는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긴장된 마음은 지혜를 낳지 못한다."
"억지로 집중하지 마라."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려라."
"호기심을 가져라." "지혜가 일하게 하라."
많은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계속 집중해야 한다!"
라는 욕망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오히려 탐욕과 긴장을 키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Relax and Be Aware를 강조합니다.
이 점은 간화선의 "무심(無心)", 대원만의 "노력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알아차림"과도 상통합니다.
5. 떼자니야 사야도의 수행은 '대상 중심'에서 '마음 중심'으로의 전환이다
초기불교의 언어로 표현하면
대상 중심 색·수·상·행·식의 현상을 관찰한다.
↓
마음 중심
지금 탐욕이 있는가?
성냄이 있는가?
망상이 있는가?
알아차림이 있는가?
지혜가 있는가?
↓
알아차림 자체
"지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
명상하는 마음
(meditating mind)으로 머문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가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탐구하는 수행이라면,
떼자니야 사야도의 수행은
"무엇이 그것을 알고 있는가?"를 탐구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선종의 회광반조(回光返照),, 유식학의 자증분(自證分),등과 대화할 수 있는,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불교 명상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마하시 계통에서 출발하여 선종과 대원만에 가까운 방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간 테라와다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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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대산 작성시간 26.06.15 수행에 도움이 되는 훌륭하신 글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 하나의 의문이 있습니다.
저는 사념처 수행 중 마음관찰(심념처)에 더 관심이 가서 쉐우민에 다녀오신 스님이나 법사님 글을 자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스님 글 중 3. 유식학의 자증분(自證分)과의 유사성/ ~~``자증분(自證分)에 상당히 가까운 구조를 가집니다.
에 대해서 의견을 달리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견분,상분, 자증분, 증자증분은 이 네 가지가 따로따로 시간차를 두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식체(識體)가 작용할 때 드러나는 네 측면으로 봅니다. 즉 사분은 순차적 작용이 아니라 동일 찰나 인식의 구조적 분석으로 봅니다.
쉐우민에서 오랜세월 수행하신 묘원법사님 법문에 보면 우떼자니아 사야도의 스승인 우꼬살라 사야도로부터 위에서 말씀하신
1차 (전) 알아차림에 대한 2차(후) 알아차림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ㅣ
거기에서는 1차 알아차림을 noting mind , 2차 알아차림을 watching mind 로 표현합니다.
묘원법사님이 이 2차 알아차림에 대하여 이해도 되지않고 실수행이 안되어 우꼬살라 사야도께 여쭈어보니
더이상 글이안적혀 아래글 -
답댓글 작성자오대산 작성시간 26.06.16 "마음을 새로 내라" 고 하셨다고 합니다.
즉 , 자증분은 동시적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2차 알아차림은 후찰나에 일어나는 마음 작용이기에 자증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중관학파에서는 자증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칼이 칼을 못자르고
손가락이 손가락을 지시하지 못한다는 비유로 설명하듯이.
묘원법사님 외에도 쉐우민센터에서 공부하고 오신 스님들의 법문에서도 쉐우민의 마음관찰(심념처)에 대한
내용은 묘원법사님 설명과 같습니다. -
작성자Wondam:원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6 오대산 님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자증분'이란 개념을 도입한 것은 이해가 쉽게 되도록 기존에 통용되던 교리를 가져와 '설명적 도구'로 쓴데 불과합니다. 테자니야 사야도의 '알아차림을 알아차린다'는 말은 때마다 계속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알아차림에 의심이 들거나, 흐리멍덩하거나, 하는둥마는둥 할 때, 자기의 알아차림의 태도를 다시 한번 알아차려 보라는 것입니다. 실용적 조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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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오대산 작성시간 26.06.16 내내 강건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