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1장(A)

작성자레아|작성시간15.03.17|조회수276 목록 댓글 2

                                   11장(A)

 

 

 

  도리언 그레이는 몇 년 동안 그 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어쩌면 그가 그 책에서 벗어나려고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파리에서 그 책의 대형 초판본을 아홉 권이나 구입해 각각 다른 색갈로 장정했다. 자신의 다양한 기분과 때때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고 마는 듯한 천성적인 변덕스러운 성향에 맞춰 읽기 위해서였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낭만적이고 과학적인 기질이 아주 기묘하게 뒤섞인 파리의 멋진 젊은이가 도리언에게는 자신의 앞날을 예고해주는 인물로 보였다. 게다가 사실상 이 책 전체가 살아보기 전에 미리 쓰인 자기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 가지 점에서 그는 소설 속의 환상적인 주인공보다 운이 좋았다. 도리언은 파리의 젊은이가 한 때 아주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미모를 갑자기 읽게 되면서 너무 이른 나이에 알아 버린 공포, 즉 거울과 윤이 나는 금속 표면과 잔잔한 수면에 대한 다소 그로테스크한 공포를 전혀 알지 못했으며, 사실상 알아야 할 이유도 결코 없었던 것이다. 다소 과장되게 그려지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 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슬픔과 절망 때문에 도리언은 그 책의 후반부를 아주 비극적인 감성으로 읽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잔인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사실 모든 기쁨이란 것에는 모든 쾌락과 마찬가지로 잔인함이 깃들어 있었다.

 

  바질 홀 워드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의 다른 많은 사람들마저도 그토록 매혹시킨 놀라운 아름다움이 도리언 그레이게게서는 결코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에게 적대적인, 악랄할 대로 악랄할 이야기를 들은 사람조차도, 간혹 그의 생활 방식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런던 일대에 퍼져 클럽의 이야깃거리가 됐을 때도, 일단 그를 직접 보게 되면 그의 명예를 실추시킬 만한 어떠한 소문도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세속의 때에 물들지 않은 사람의 표정이 느껴졌다.  상스러운 말을 하던 사람들은 도리언이 방에 들어서기만 하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들을 꾸짖는 뭔가가 순결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럽혀놓은 순진무구한 시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는듯했다.  그들은 그가 천박하고 육욕적인 더러움에서 벗어나 어떻게 그토록 매혹적이고 우아할 수 있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도리언 그레이는 종종 그의 친구들이나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억측들을 불러 일으키는 장기간의 외출을 비밀리에 하곤 했다.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오면 슬그머니 계단을 올라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열쇠로 잠겨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바질 홀 워드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앞에 거울을 가지고 섰다.  그렇게 서서 캠버스 위의 사악하고 늙어버린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윤이 나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그처럼 극명한 대조가 그의 쾌감을 자극하곤 했다.

그는 점차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고, 점점 자신의 영혼이 타락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주름진 이마에 낙인을 찍거나 대단히 음란한 입가에 스멀거리는 흉측한 선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때로는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환희를 느꼈고,  때로는 죄악의 흔적이나 노화의 흔적 중 어느 쪽이 더 끔찍할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는 그림 속의 거칠고 부은 손 옆에 자신의 하얀 손을 놓으며 미소를 짓곤 했다. 그림 속의 보기 흉한 몸과 노쇠한 팔다리를 조롱하기도 했다.

 

  밤이면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자신의 방이나 가명으로 변장을 한 채 뻔질나게 드나들곤 하는 악명 높은 작은 선창가 선술집의 누추한 방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순전히 이기적이었기에 더더욱 마음 아픈 연민을 느끼며 자신의 영혼을 키운 타락에 대한 생각에 잠기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흔치 않았다.  친구의 정원에서 자리를 함께 했을 때 헨리 경이 처음으로 도리언의 마음속에 불어넣어주었던 인생에 대한 호기심은 충족될수록 더욱더 커지는 것만 같았다.  알면 알수록 더욱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채우면 채울수록 미칠 듯이 허기는 점점 더 심해졌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사교계에 관련해서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매달 한두 번씩, 사교 시즌에는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저택을 공개했고, 당대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을 불러들여 그들이 선보이는  예술의 경이로움으로 손님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언제나 헨리 경의 도움을 받아 열리곤 했던 그의 조촐한 만찬은 이국적인 꽃들과 수를 놓은 식탁보와 금은제 골동품 접시들이 미묘하게 조화를 이룬 테이블 장식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취향과, 그에 못지않게 초대한 손님들을 세심하게 선정하고 그들의 자리를 각별히 신경 써 정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튼이나 옥스퍼드 시절에 자주 꿈꾸었던 전형적인 실제 인물, 학자가 갖춰야 할 진정한 교양과 세계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우아함과 뛰어난 기품과 완벽한 예절을 두루 겸비한 전형적인 인물을 도리언 그레이에게서 보았거나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도리언은 단테가 묘사한 '미를 숭배함으로써 완벽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티에 처럼,그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존재' 이유가 될 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분명 그에게는 삶 자체가 모든 예술 중에 첫손 꼽히며 가장 위대한 예술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예술은 그저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실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만 잠시나마 보편성을 띠는 유행, 그리고 나름대론는 아름다움의 절대적인 현대성을 주장하려는 시도인 댄디즘은 당연히 그를 매혹했다. 그가 옷을 입는 방식, 그리고 이따금씩 그가 즐겼던 독특한 스타일은 메이페어의 무도회와 팰멜 가의 여러 클럽을 드나드는 젊은 멋쟁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그가 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하며, 그로서는 그리 진지하지 않지만 우아하게 멋을 부린 일의 의도하지 않은 매력마져도 똑같이 재현하려 애썼다.

 

  그는 성년이 되자 곧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또 자신이 네로 황제 시대에 로마에서 <<사티리콘 Satyricon>>44 의 저자가 보여준 인간형을 오늘날 런던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로 묘한 쾌감을 느꼈던 반면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단순한 '심미안의 권위자," 즉 보석으로 치장 하거나 넥타이를 매거나 지팡이를 다루는 방법 따위에 대해 상담해 주는 사람 이상의 무언가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는 이치에 맞는 철학과 정연한 원칙을 갖춘 새로운 인생 계획을 정교하게 고안하고, 감각을 정화하는 것으로 그 계획을 최대한 실현하고자 했다. 

 

*44,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페트로니우스의 풍자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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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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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햇살 | 작성시간 15.03.17 잘 읽었습니다 ^^
  • 작성자순수 | 작성시간 15.03.19 여친의 죽음이후 몇년밖에 안흘렀는데 그림에선 어째서 노쇠와 주름 등이 거론되는지 시간성의 혼란이 다소 느껴지네요! 좋게 보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느낌...그러나 역시 공허한 아름다움...^^

    반면에 작가는 그 공허하고 유한한 아름다움의 절실함이 영원한 아름다움의 거울 같음을 말하고 싶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어떤 완벽한 아름다움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사실상 그 아름다움은 살아있는게 아닌 셈이니까요. 철저히 역설적 미학을 전개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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