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주님의장막님.
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법적 선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성도는 '죄인인 동시에 곧 의인이다'라고 한 말도 이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구요.
위 사실들로만 봐서는 성도의 변화는 신분의 변화로만 생각되어 지는데요....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말하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성경은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지식과 거룩함을 새롭게 회복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성도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요?
제가 얼핏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비록 성도일찌라도 그 본질은 그대로 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여전히 죄인일 뿐이다라는 것이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비록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할찌라도 그 성도의 본질 자체는 타락한 본성 그대로이란 의미인가요? 용서만 받았을 뿐 여전히 죄인의 속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요? 혼란스럽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님의 이 질문을 보면, 성도의 변화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분의 변화라고 했으며, 다른 또 하나는 성도의 본질적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분의 변화를 성도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인데, 루터가 ‘죄인인 동시에 곧 의인이다’라고 한 말을 들면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법적 선언으로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님은 성도의 본질적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지식과 거룩함을 새롭게 회복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성도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말하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에서 본질적 변화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님은 혼란스러워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제가 님이 비록 성도일찌라도 그 본질은 그대로 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여전히 죄인일 뿐이다라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록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할찌라도 그 성도의 본질 자체는 타락한 본성 그대로이란 의미인가요? 용서만 받았을 뿐 여전히 죄인의 속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입니다. 여기서는 ‘죄에서 구원’, 이것이 구원의 개념이고 성격이고 본질입니다. 그러면 그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그 ’죄‘의 개념, 성격, 본질은 무엇이며, 또한 ’구원‘의 개념, 성격, 본질은 무엇인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이름을 ” ’임마누엘‘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하신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라는 말씀에서 알게 됩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죠. 이는 말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는 언약 관계를 회복케 하실 것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오신 것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사실로 그들과 함께 하셔서 다스리실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의 하나님이 되신 분의 다스림을 받음에 있는 일이 일어날 것에서 ’구원‘이 말해지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다른 신을 숭배하는 악한 죄에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 자식들에게로 마음을 돌이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에서, 그리고 그에 따라서 자식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돌이켜 자신을 향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에 있을 것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죄‘에 있었는지가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성경구절을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장에서 볼 수 있으니, 이것을 찾아 정독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 읽으시며 이것을 기록하신 의미를 파악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는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인 ‘죄에서의 구원’을 말씀하시는데, 이 구원이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말하고자 하는 강조에 따라서 어떤 때에서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에 의해서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가 하면, 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시켜 주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인 의와 지식과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음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둘이 다 포함된 것에서 구원이 말해지기도 하구요.
이러한 구원을 교회사에서 보게 되는 ‘구원론’인 교리, 그에 따른 신학 사상을 세우는 것이 있게 됩니다. 즉, 구원을 교리로 세우고, 신학으로 정립하는 일이 있는 것이죠. 여기서는 구원을 신분적 상태로서의 변화와 성분적 상태로서의 변화로 구분하여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은 자는 ‘죄책’이 용서됨으로 의롭다 함에 있는 ‘칭의’란 용어를 사용하여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법정적인 선언에 따른 ‘신분적 변화’로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은 자는 ‘죄의 부패(죄의 오염)’에서 용서됨으로 죄의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됨에 있는 거룩에 있는 것을 ‘성화’란 용어를 사용하여서 죄인이 ‘죄 씻음’의 용서로 깨끗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죄에서 구원받은 자의 상태의 변화에 따른 ‘성분적 변화’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님이 주의하여 알아야 할 것은 ‘성화’의 본질적 개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사실입니다. 이러한 ‘거룩’을 교회사에서는 ‘성화’란 용어를 사용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구원, 곧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으로서 ‘칭의’와 ‘죄의 부패’로부터의 구원으로서의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구원, 곧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중적 면으로 이해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의 구원’입니다.
그러한 구원을 어느 때부터인가, 그리고 어느 누구에 의해서인가 칭의는 신분의 변화를 말하는 법정적인 선언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구원의 성격으로, 그리고 성화는 상태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점진적인 구원의 성격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잘못의 오류에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죄로부터의 구원을 즉각적이며 또한 점진적으로 이해하여 오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결코 없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이해는 참으로 잘못된 것이며, 이러한 구원관은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 있는 자에게서는 부정되어야 할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님이여.
‘칭의’의 개념에서의 구원으로 말하든, ‘성화’의 개념에서 구원을 말하든, 그 구원은 죄에서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이겠는지요. 우리의 모든 죄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죄책‘으로부터 용서하시는 구원이 날마다 있는 것이며, ’죄의 부패‘로부터 용서하시는 구원이 날마다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님에게 말입니다. 님이 인용한 루터가 ’죄인인 동시에 곧 의인이다‘는 그러한 것에서입니다. 루터가 이 말을 한 것에는 ’칭의‘의 개념의 성격이 강한 것에서 입니다만, 이는 ’성화‘의 개념의 성격에서도 동일합니다. 구원은 ’칭의‘를 말하는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인 동시에 또한 ’죄의 부패‘로부터의 구원인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님은 자신의 모든 죄에서 하나님의 의를 입히시므로 의롭다 하심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행해지는 은혜를 날마다 받고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에 두심으로 거룩함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행해지는 은혜를 날마다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님을 의로우신 하나님의 온전처럼 ’의인‘으로 여기시며, ’죄인‘인 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온전처럼 ’거룩한 자‘로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님을 그렇게 여기시기에, 하나님께서 님을 그렇게 인정하시기에 그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항변하거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이 구원은 말이죠. 결코 ‘점진적’이지 않습니다. 점진적이란 점차적으로 진행되어서, 그래서 서서히 되어 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 아닌, 그렇게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모든)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며, 그래서 (모든)죄에서의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을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것에서 보게 되면, 그래서 이러한 것에서 즉각적으로 의인으로 변화받은 신분적 상태에 있는 자가 점진적으로 의로운 자로 변화되어가는 성분적 상태의 변화에 있게 되는 자로 잘못 알게 되면, 님이 자신을 가지고 말한 바와 같이 비록 성도일지라도 자신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인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왜 자신이 성화되지 못한 자로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전혀 풀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성화되어 간 만큼 거기에 걸맞는 뭔가 그 수준에 이른 합당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래서 성화되기 이전보다 몇 %이든지간에 변화(성화) 되어 있어야 하며, 이는 그 후에 더욱 성화되어 몇 %가 더 상승하여 성숙한 변화에 있어야 하며,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성화의 완전함으로 말하고 있는 영화에 상태에 이르러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런데 아니거든요. 그래서 항상, 날마다, “나는 죄인입니다”를 고백하며, “주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죄 용서를 구합니다. 성도가 영화에 이르는 것은 그렇게 점진적으로 성화되어서 마침내 성화의 최종 상태로서의 영화의 상태에 이르러서가 아닙니다. 성화는 성도가 얼마큼의 변화에 있어서가 아니라 죄에 오염된, 그래서 부패한 죄인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함에 있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이 온전<완전>하신 것처럼 또한 그도 온전케 하신 것에서 입니다. 영화의 상태란 이 구원에 있는 자가 육신의 완전한 구속 - 죽지 않을 새 몸 - 에 있는 것이며, 이는 우리 몸의 부활에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구원을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인 면으로 구분하여 말하는 것은 구원의 개념, 성격,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교리가 되고 신학이 되어 오고 있는 중에 이에 대한 이해를 잘못 가져오며 잘못 말하는 사람에 의해서 그 영향이 끼친 것은 실로 참으로 큽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우리네 주위에서의 교회에서 보게 되는 잘못된 구원관(구원론)을 말함으로써 님이 가졌던 혼란처럼 혼란에 있게 하였습니다.
님이여, ‘칭의’의 은혜로 말하든, ‘성화’의 은혜로 말하든, 죄 용서의 은혜는 님의 모든 죄에 미칩니다. 왜냐하면요. 하나님께서는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실 구주로 보내셔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자기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로 희생제사에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날마다 드릴 희생제물을 종결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들의 주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들을 위하여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는 ‘속죄’에 의해서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가 구속력(拘束力)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는 정죄와 심판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救贖)은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자에게 행사되며, 그 구원의 효력은 영원히 미칩니다. 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으므로 이 은혜로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이 하나님의 은혜에 결코 누구도 있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님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입음에 있는 복 있는 자입니다. 어디서 그 사실을 보나요? 육신의 연약함에 있는 님의 모든 죄에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함에 있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는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게 하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님 또한 의롭다 하심에 있는지요. 그래서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님 또한 거룩함에 있는지요. 이것을 님에게 있는 모든 죄에서 보고 깨달아 그 믿음에 있는지요. 그렇다면, 성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즉 어떤 것인지를 알았을 것이라 여깁니다. 님은 “비록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할찌라도 그 성도의 본질 자체는 타락한 본성 그대로이란 의미인가요? 용서만 받았을 뿐 여전히 죄인의 속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요?“ 라고 하였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타락한 본성 그대로인 자신을 보는 것은 사람은 본래 육체인 까닭에 그 육체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욕망인 죄인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도는 용서만 받았을 뿐이고, 그래서 법정적으로 ‘의인’의 선언만 받은 것 뿐이고 결코 의롭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요. 지금까지 설명하는 것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그 안에 있는 성도에게 이루시는 죄에서의 구원은 단지 선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은혜가 님에게 있는 모든 죄에 날마다 효력있게 미침으로써 실제 하나님의 의에 있는 ‘의인’인 것인 동시에 또한 죄의 부패에 있는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심의 은혜가, 곧 성화란 용어로 말해지고 있는 ‘거룩케 하심’의 은혜가 님에게 있는 모든 죄에 날마다 효력있게 미침으로써 실제 하나님의 거룩에 있는 ‘거룩한 자’인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의인인 내가 의롭게 살아가는 무슨 의로운 행동을 해서 보다 더 나은 의로운 자가 되고 거룩한 자가 되어가는 것에서가 아닌, 항상 육체인 죄가 활동하는 ‘죄인’됨을 보는 자신에게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구원을 입는 것에서입니다. 이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구원의 일을 하시는 것에서는 우리의 죄가 있는 모든 것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현재 완료적이며, 그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입고 있는 우리에게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하여 비로소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 깨달음에 있기 때문에 항상 과거 완료적입니다. 이러한 구원에는 ‘점진적 진행’의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항상 완료됨에 의한 온전<완전>의 개념에 있습니다.
님이여.
우리의 죄가 있는 곳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인 의가 존재합니다. 우리의 죄가 있는 곳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인 우리를 ‘의인’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믿음에 있다면, 이 은혜가 님을 주님과 함께 의로우신 그분의 나라에 있게 하실 것을 보기에 님은 참으로 복 있습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본 답글이 궁금해 하는 님의 질문에 이해를 돕는 유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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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님의 장막 작성시간 11.12.09 감사합니다 목사님! 정형화되어버린 칭의와 성화의 개념 때문인지 한번에 목사님 답변의 진의를 못 깨우칠지도 모르겠지만^^;; 반복해서 보면 더 깊은 은혜를 깨달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목사님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깨달아지는 그 은혜가 우리 삶의 선한 행위로 드러나고 나지 않고는 크게상관이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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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천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12.09 안녕하세요 주님의장막님. 님께서 말한 우리의 삶에서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의 선한 행위로 드러난다면 이는 참으로 기쁜 일이며 하나님깨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한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의 자랑과 의를 삼는 것에는 우리의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일로 말미암아 갖는 관심은 "자랑하는 자는 다만 주님만 자랑하라" 에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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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삼손 작성시간 11.12.12 종교적 행동 양식과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 얼마나 가깝게 인과관계가 형성되는가가
믿음 이후의 변화라고 보여집니다.
그 변화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이며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