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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답

Re:'예수님께서 죽으신 3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요?'에 대한 답글입니다!!.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4.07.09|조회수3,481 목록 댓글 7
안녕하세요 김정규 형제님!.

지난 주말 정도에 답글을 올리겠다고 하였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한 주간 이상이나 늦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을 지체하고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니 님은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인가 봅니다. 그런데 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음을 당하시고 장례를 치르신 이후의 3일간의 행적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이런 님의 질문의 내용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예수님이 죽으신 후 3일 동안 지옥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심판의 벌을 받으셨다'고 하네요. 맞나요. 그 근거로 죄의 댓가로 인해 인간은 1차 죽음(현세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인생을 사는 것 자체), 2차 죽음(육체의 죽음), 3차 죽음(최종적인 죽음으로 심판으로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함)을 당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형벌을 완전히 속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영이 지옥에 가서 3일 동안 고통을 당해야 했다고 설명하더군요.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죽으신 후 '지옥에 가셨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더군요. 왜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그 부분이 빠졌는지요...칼빈은 이 대목을 영적으로 그만큼 고통이 심했다는 표현이지 직접 지옥에 갔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던데요....

복음서에 보면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같이 천국에 있을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고요. 논리적으로는 예수님이 3차 죽음까지 당하셔야 우리의 죄를 영단번에 속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설명이 맞는거 같은데요...성자 하나님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좀...베드로전서엔가 보면, 옥의 영들에게 전파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던데...

답변 부탁드립니다. " 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이 질문에 답변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부활하시기까지의 3일간의 행적에 대한 질문과 관련하여 님이 언급한 인간의 죽음부터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님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 3일 동안 지옥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심판의 벌을 받으셨다'고 하네요. 맞나요. 그 근거로 죄의 댓가로 인해 인간은 1차 죽음(현세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인생을 사는 것 자체), 2차 죽음(육체의 죽음), 3차 죽음(최종적인 죽음으로 심판으로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함)을 당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형벌을 완전히 속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영이 지옥에 가서 3일 동안 고통을 당해야 했다고 설명하더군요.… 복음서에 보면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같이 천국에 있을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고요. 논리적으로는 예수님이 3차 죽음까지 당하셔야 우리의 죄를 영단번에 속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설명이 맞는거 같은데요..."라고 하였는데, 님의 이 말에 의하면 인간의 죽음을 3단계의 과정으로 배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인생을 사는 것 자체가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이를 1차 죽음이라고 하며, 육체의 죽음을 당하는 것은 2차 죽음을 겪는 것이요,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것인데 이것이 3차 죽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죽음에 있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차 죽음이니 2차 죽음이니 3차 죽음이니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첫 사람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범죄하여 타락함으로써 죄의 형벌로 언약에서 약속되어 있는 저주인 '죽음'을 선고받았으며, 이로써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인간은 죽음에 처해져 영원히 죽음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저주인 죽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저주가 주어진 즉시 인간은 죽음의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생명이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왕노릇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죽음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은 하나님에게서 쫓겨나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인간은 지옥에서 영원히 멸망당한다고 하는데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을 두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에서만 겪을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인간은 현세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축복의 참된 근원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생명의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없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은 결국 현세에서도, 그리고 내세에서도 죄의 형벌로 죽음을 당합니다.

그런데 죄의 형벌인 죽음을 당하는 인간의 상태는 참으로 '비참'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죄는 사망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써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저주인 사망[죽음]이 주어졌습니다. 죽음에 처해진 인간의 상태는 인간의 양면으로 말하게 되는 영과 육의 모든 기능과 모든 부분들[인생의 전영역]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선한 반응도 갖지 못하는 전적 부패한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가르침 받습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의 의[근본 의]를 상실하였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죄로 죽게 되었고 영[영혼]과 육의 모든 기능과 모든 부분들이 완전히[전적으로] 더럽혀졌다"(2항). 여기서 말하는 영과 육의 모든 기능과 모든 부분이란 인간의 생명 전체에 관련하여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것에 의해서 갖게 되는 모든 생각과 행위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선이 되지를 못하고 악합니다. 성경은 죄의 성격상 죄인에게 죄책을 가져다 주며, 그 죄책으로 말미암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어서 죽음을 당하되 동시에 모든 영적인, 그리고 현세적인 영원한 불행[고통]을 같이 겪게 됩니다(4-6항).

님이여, 이렇게 죄의 형벌인 죽음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먼저 죽음을 단계적 과정으로 다루지 않기를 바라서입니다. 님은 조직신학에서 죽음에는 1차 죽음, 2차 죽음, 3차 죽음이 있는데 1차 죽음은 현세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인생을 사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이요, 2차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고, 3차 죽음은 최종적인 죽음으로 심판을 받아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조직신학에서 죽음을 그렇게 1차 2차 3차의 셋으로 구분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에서 이해하였을 것이라 보는데 죽음은 1차 2차 3차가 없습니다. 인간은 나면서 이미 죽은 자의 상태에 있습니다. 가령 뿌리에서 잘린 매화나무나 나무 둥지에서 잘린 매화나무 가지에 매화꽃이 피어 있을지라도 그것은 산 나무의 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듯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참 생명과 축복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상태에 있으므로 처음부터 죽은 자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의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육체의 죽음을 겪는 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지옥(地獄)에 있게 하는 것에서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조직신학에서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로서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당하는 죽음의 형벌에는 그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차원에서이지, 죽음을 단계적 과정이라든지 죽음의 서로 다른 성격을 구분하고 있는 차원에서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육체적인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한 죽음을 겪을 자도 있으며, 이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육체적인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갈 자[그리스도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혹 육체적인 죽음을 일차적인 죽음이라고 말하고 영원한 죽음을 이차적인 죽음이라고 말할지라도 이것은 죽음의 순서가 일차적인 죽음에서 이차적인 죽음으로 진행되어 나간다거나 그렇게 두 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지 현세에서 내세로, 그리고 여기에서 있게 되는 개인적이며 또한 우주적인 순서에 따른 구분일 따름입니다. 님은 이점을 먼저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님이 질문하고 있는 본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님은 "(죄인은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형벌을 완전히 속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영이 지옥에 가서 3일 동안 고통을 당해야 했다고 설명하더군요." 하면서,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죽으신 후 '지옥에 가셨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더군요. 왜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그 부분이 빠졌는지요...칼빈은 이 대목을 영적으로 그만큼 고통이 심했다는 표현이지 직접 지옥에 갔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던데요.... 복음서에 보면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같이 천국에 있을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고요. 논리적으로는 예수님이 3차 죽음까지 당하셔야 우리의 죄를 영단번에 속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설명이 맞는거 같은데요...성자 하나님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좀...베드로전서엔가 보면, 옥의 영들에게 전파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던데... " 라고 하였습니다.

이 질문에서 님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장사[장례]를 치른 후 무덤에 묻히신 3일간의 행적에 관한 것입니다. 무덤에 묻히신 3일동안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이죠. 이러한 의문을 품는 것은 지금 우리 의 한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실려 있는 사도신경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빌라도 총독의 치하에서 있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신앙고백하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 예수님의 장사 지냄에 대한 신앙고백도 함께 말하면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님이 말한 대로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서는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라고 되어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장사되셨다: 그(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옥[또는 음부]으로 내려가셨다': 사흘만에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하늘에 오르셨다."라고 되어 있어서 'He descended into hell'(그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지옥[음부] 강하(地獄降下)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 찬송가의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예수님의 지옥 강하 부분이 빠져있게 되었는지는 이제까지는 그 까닭이 불분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연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다만, 나로서 알고 있는 한에서 언급을 한다면, 우리말 찬송가의 사도신경에서도 처음부터 예수님의 지옥 강하 내용이 빠져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988년 장로교신학대학출판부에서 발행한 나채운이 쓴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에는 한국교회 초기의 장로교회가 사용한 우리말 찬송가에 실린 사도신경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는데 1894년의 것에 보면 ''디옥에 ㄴ리샤"(지옥에 내리사)라고 지옥 강하의 내용이 분명히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1897년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가, 다시 1905년에는 '음부에 ㄴ리셧더니'라고 다시 삽입되었습니다(ㄴ밑에는 고어이기 때문에 점이 있습니다. 이것의 문자가 없기 때문에 그냥 ㄴ자만 쳤습니다). 그런가 하면 감리교회에서 발행한 찬송가(1897년, 1902년, 1905년)에는 모두 지옥 강하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1908년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연합한 연합공의회가 1905년에 찬송가를 통합할 것을 결의하고 1908년에 합동찬송가를 발행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지옥 강하 부분이 다시 빠져 있게 되었고 이후 장로교회에서도 오늘날까지 사도신경에서 지옥 강하 내용이 없는 채 사용하여 왔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교회 초기에는 사도신경에 지옥 강하 내용을 그대로 신앙고백문으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삭제할 것인지에 대하여 혼란을 겪었던 것 같으며, 범교단적 찬송가의 통합 사용 이후 결국은 더 이상 관심으로 대두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지옥 강하 부분을 삽입하느냐 아니면 삭제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한국교회에서만 있은 일은 아닙니다. 벌콥에 의하면 교회사의 초기에는 예수님의 지옥 강하에 대한 고백이 보편적으로 사도신경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퀼레이안(Aquileian)형의 사도신경(390.A.D)에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와 근동의 다른 형의 사도신경들은 예수님께서 지옥[음부]에 내려가신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장사를 다루면서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심의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여긴 까닭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심을 언급하면서 장사 지내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후에 로마형의 사도신경에서 장사를 언급하고 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진술이 첨가되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 내용이 우리말 성경에는 왜 빠져 있느냐 하는 것은 여기서 다룰 사항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사에서 존재해 오고 있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지옥 강하 내용이 들어 있는 신경들이 있어왔고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서도 그런 사도신경을 볼 수 있으며,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서는 분명히 '지옥 강하'내용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혀 계신 3일 동안의 행적 부분을 알고자 하는 것이므로 여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적인 순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 총독의 치하에서 십자가 못박히는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셨으며, 이런 예수님을 장사 지내고 돌로 된 무덤에 안장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의 문을 큰 돌로 막아 굳게 닫아 놓았습니다. 이렇게 장사 지낸 바 된 예수님은 그렇지만 죽음에 갇혀 있지를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까지의 3일간을 사도신경에서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신앙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신 이후에 반드시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만 되어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만 볼 수는 없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님도 이 부분을 거론하였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는 좌우편에 흉악범들도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형벌을 받았는데 이 중 한편의 강도가 예수님에 대해 가진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자, 우리는 이 내용을 사도신경과 대조하여서 볼 때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지옥 강하를 신앙고백하고 있는 내용과 성경에서 죽음을 당하신 그날에 낙원에 계실 것을 말씀하신 것은 서로 맞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는 틀리고 있는 것일텐데요.

과연 그럴까요?

만일 그렇다면 님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겠습니까? 아마도, 당연히 복음서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그러니까 성경일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반면에 사도신경은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구속사적인 신앙을 고백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구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는 듯한 구절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입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런가 하면 4장 6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신 듯한 뉘앙스를 품고 있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겐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도신경에서 신앙고백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 먼저 베드로전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의 의미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3장 19절에서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자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그는 성도들에게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할 것을 권면하는 중에 한 말입니다. 그는 1-6절에서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가질 자세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여자의 존재성은 외모를 꾸미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격에 있는 것인데 순복하는 데서 아름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남편을 '주'라고 칭하며 복종한 것을 들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가질 자세를 말하였는데, 곧 선한 양심입니다. 그는 그 권면으로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하였으며, 여자를 귀히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권면한 것은 인격은 일방적이 아닌, 곧 어느 한쪽에만 요구되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듯이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요, 여자는 남자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15절에서는 대인관계면에서 형제 사랑을 권면하였는데 열심히 선을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16-22절에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는 그 '선한 양심'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는데 이는 의를 위하여서 받는 것으로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그리스도의 선함과 고난받음을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인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선한 일을 하셨으나 그 자신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고난이 우리의 표본으로서 우리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그 선한 양심에 의하여 고난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온 이야기가 바로 19절에서의 "그리스도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한 것이 20절인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에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방주에서 나와 물로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인데 겨우 여덟 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4장 6절에서 "죽은 자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3장 19절에서 말하고 있는 '옥에 있는 영들'이 바로 이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3장 19절에서의 '옥에 있는 영들'은 4장 6절에서 설명되고 있는 '죽은 자들'이니, 과거의 구약 시대 때에 죽은 사람들이며, 또한 옛날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심판 아래 놓여져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옥에 있는 영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얻기 전까지에 놓여 있던 모든 죄의 사람, 곧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을 총칭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또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하시면서 '노아의 날 방주에서 구원 얻은 여덟 명'을 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던 죄인된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여 주심으로, 그래서 여덟 명인 이들만큼은 하나님께서 전하여 주시는 복음을 듣고서 그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에 의해 심판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모든 죄인된 인류에게 구원의 전파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선언하여서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이 노아의 여덟 식구처럼 물에서 건짐, 곧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3장 21절에서 하고 있는 말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선한 양심'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물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모든 사람이 수장되어 멸망당하는 심판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 있어서 물은 전혀 다른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데 물에서 보여지고 있는 심판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진 자기들에게 건짐을 준 구원의 표였습니다. 그것처럼 오늘날의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마림암아 이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 이것을 믿음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아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소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소망에 의해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됨으로 구원을 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처럼 구원을 받는 것이지 달리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선한 양심이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소망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선한 양심에 의하여서 우리들이 아내된 자로서 또 남편된 자로서 그리고 이웃된 자로서 선하게 살아가야 하며, 의를 위하여서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하면서 그러다가 고난이 주어지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가운데 기꺼이 받을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말한 의미를 이해하면, 그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가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 그곳에서 계신 3일간에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또한 4장 6절의 의미도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전서 3장 19절과 4장 6절의 구절 가지고는 예수님의 '지옥 강하'를 운운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도신경에서의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 곧 실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두고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에서인지를 알면 될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예수님의 '지옥 강하'에 대해서는 영문에는 장사지내셨다는 'and buried'란 말 뒤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He descended into Hell'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후에는 "옥에 내려가셨는데 그 옥은 지옥이다"라고 말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후에 부활하시기 전까지 3일간에 지옥에 내려가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베드로전서 3장 19절과 연계해서 지옥에 내려가신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통해 죄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선포하셨다는 견해를 갖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지옥 강하와는 상관없는 다른 의미에서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실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지옥 강하를 말씀하시는 곳이 없습니다. 혹자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 및 4장 6절과 함께 에베소서 4장 9절의 "올라가셨다 하셨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를 지옥 강하를 말씀하여 주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 구절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계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지옥 강하를 말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으시는 낮아지신 상태에 처하신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10절)라고 말씀하여서 땅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고 승귀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사도신경에서만은 예수님의 지옥 강하의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교리적으로 해설한 교리문답서인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서도 예수님의 지옥 강하를 다루고 있습니다.

44문. "Why is there added: He descended into hell?."
답. "In my greatest sorrows and temptations I may be assured and comforted that my Lord Jesus Christ, by His unspeakable anguish, pain, terror, and agony, which He endured throughout all His sufferings but especially on the cross, has delivered me from the anguish and torment of hell.

44문. "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왜 첨가되어 있습니까?."
답: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체 고난을 통하여, 특별히 십자가상의 고난을 통하여 겪으셨던, 말할 수 없는 고민과 고통과 공포와 고뇌로 말미암아 지옥의 고통과 고뇌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나의 가장 큰 슬픔과 시험 속에서 나는 확신하고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지옥 강하를 다루면서 이를 예수님 자신이 지옥에 내려가신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지옥은 예컨대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불못'으로, 그리고 21장 8절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옥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대적하는 죄인이요 원수된 자들을 버린 장소로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쏟아지는 장소라고 하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그런 지옥은 죄인이 영원히 죽음에 처하는 곳인 저주받은 비참한 곳입니다. 사도신경을 해설하고 있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른 저주의 상태에 처해진 것이 바로 이렇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신경을 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의 순서대로 읽는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후에는 당연히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예수님의 지옥 강하 내용을 빌라도 총독의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시고 그리고서 지옥 강하가 있었다는 시간적인 순서로 발생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신 그 즉시 지옥이 아닌 한편 강도에게 말씀하신 곳인 낙원으로 가셨습니다. 낙원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 천당과 동의적인 개념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지내심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내용을 첨가하고 있는 것은 지옥이란 장소적인 개념에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죽음을 당하시고 장사 지내신 이것이 갖는, 그래서 여기에 있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성격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고통에 의한 신음으로 계신 동안은 6시간이었는데, 이 시간에 죄인인 모든 인류가 받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그 한 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인 유명한 가상칠언이 있는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있습니다. 이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음에 처하게 하시는 하늘의 아버지께 한없는 원망으로 불평하고 있는 듯이 여겨집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보고자 몸부림 치는, 그래서 "나를 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나를 살려 주세요!."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외침인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죄인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고 직접 헌신제사로 드려지는 아들에 대하여서 비록 자신이 아들일지라도 죄값을 물으며 고개를 돌려 철저하게 외면하시는 하나님의 버리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실지라도 죄에 대한 진노와 저주를 쏟으셨습니다. 온 인류에게 쏟을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 외침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실지라도 죄를 심판하시는 진노와 저주를 내리시는 것을 보느냐? 하물며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피해갈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지금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들로서 하늘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일을 순종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지속되고 있는 동안 운명하시기 직전인 3시간에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운명하시기 전의 3시간은 이전의 상황과는 전혀 달랐는데 그것은 그 시간에 태양은 빛을 잃었으며 어둠이 임한 것입니다. 어둠이 세상에 덮였습니다. 이런 기이한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신 것에 대한 상징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외침을 거절하셨으며 아들을 떠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는 예수님을 점차 죄여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운명하신 예수님의 몸은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에 의해서 깨끗하고 고운 베로 싸여서 바위를 파서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시고 입구를 큰 돌로 막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이 이를 때까지 예수님의 시신은 그렇게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동안에는 사단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듯이 보입니다. 이제는 세상에 참 생명의 소망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렇게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3일째 날에 예수님은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던 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은 몇 몇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전해졌으며,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온 땅 끝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복음을 믿는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의 복을 누리는 기쁨으로 있습니다.

님이여!, 그렇습니다. 사도신경에서의 예수님의 지옥 강하 내용과 이에 대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예수님께서 문자적인 지옥[장소적인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총독의 치하에서 받은 고난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 제2권 16장 8-12항에서 그리스도께서 음부[지옥]로 내려가심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우리가 그가 음부[지옥]에 내려간 사실도 빼서는 안 되는 것은 그것이 속죄의 성취에 적지 않은 의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8항)라고 의미를 두면서 이에 대하여 기술해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의 고초를 맛보셨다는 것이요 이는 속죄를 위한 형벌적 수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10항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로서 악한 자들에게 내린 죽음을 그가 당하셨으니 만큼 그가 지옥에까지 내려간다고 한들 무엇이 이상할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이델베르교 교리문답은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서 가르칩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체 고난을 통하여, 특별히 십자가상의 고난을 통하여 겪으셨던, 말할 수 없는 고민과 고통과 공포와 고뇌로 말미암아 지옥의 고통과 고뇌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나의 가장 큰 슬픔과 시험 속에서 나는 확신하고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여 주기 위해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는 제44문에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왜 첨가되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지옥 강하가 갖는 의미에 있어서 한가지 더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상태의 가장 낮고 깊은 비하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님이여 이제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지옥 강하의 말이 들어 있는 것과 들어 있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함으로 본 글을 끝맺고자 합니다. 비록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지옥 강하 부분이 들어 있지 않을지라도 이것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지옥 강하 내용을 다루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를 굳이 삭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교리문답을 공부하는 중에는 이 부분을 굳이 빼고서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내용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오히려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바에 대한 가르침 위에서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견고히 가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지옥 강하 부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사실상 예수님께서 지옥에 실제 내려간 것이 아닌 의미상 문구인 한에는 이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 또는 어떤 신경에는 들어있는데 왜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빼놓았느냐라고 문제 삼을 일이 아닙니다(정작 이 내용을 뺀 사람들은 어떤 의도로 뺐는지 모르겠습니다만...내가 추측하기로는 예수님의 지옥 강하의 고백을 문자적인 장소적 개념으로 보고 이것이 문제 있다 싶으니까 빼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예수님의 지옥 강하에 관한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여기에 관련한 더 자세한 서적들을 참고하셔서 이에 대한 님의 생각과 견해를 확고히 가져나가실 수 있기를 주님께 구합니다.

그럼 주님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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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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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천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7.06 안녕하세요 김정규님!. 오랜 만에 본 글을 통해서 님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본 답변의 글이 큰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지금의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는 열심을 앞으로도 계속해 잘 가져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작성자드레스큐어 | 작성시간 04.07.09 저도 궁금했던건데..잘읽었습니다 ^^*
  • 작성자젊은칼빈 | 작성시간 04.07.09 잘 읽었습니다. ^^*
  • 작성자옥합 | 작성시간 04.07.15 잘 읽고 카페 숭사리의 교회자료실에서 퍼갑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로도요.^^.
  • 작성자새누리 | 작성시간 09.05.08 감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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