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식사는 정각에 오늘날 서유럽국가들을 관광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식사 시간이다. 관광객이 많은 도시는 예외지만, 식사시간 이외에 정상적인 식사를 하기가 극히 힘들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레스토랑은 저녁식사 시간까지 닫든가 음료수만을 판매한다. 무심코 점심시간을 놓치면 길가에서 서서 먹는 햄버거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점심, 저녁 식사시간이 고정된 시각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점심시간은대개 정오 전후로 비슷하지만 저녁식사 시작시간은 로마가 7시반, 밀라노가 7시, 제네바가 6시로 각양각색이다. 어쨌든 서유럽인은 정각이 되면 반드시 충분한 시간 동안 천천히 식사를 한다. 먹는 것이 그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기업이 신문에 구인광고를 낼 때도 '시원식당 있음'이란 문구가 유력한 선택요인이 되기도 한다. *. 무엇이든간에 사람 손으로 이렇게 된 것은 원래부터 서유럽에서는 먹는 것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풍토적 조건이 열악한 서유럽은 바다나 산에서 나오는 자연적 산물이 매우 적었다. 또 주곡물인 맥류(麥類)는 매년 연작이 불가능하였고 사료작물과 윤작이 시작되기까지는 지력회복을 위해 휴경해야만 했다. 빵이 주식이 될 수가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자연의 풀들이 부드러운 상태에서 생장을 멈추기 때문에 가축의 방목에는 풍족하였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토지를 이용하는데 있어서 빵이 비싸지만 밀밭으로, 소고기가 비싸지만 목초지도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밀밭과 목초지는 상호이행의 관계에 있었다. 가축의 사육은 어패류를 잡는 것처럼 남들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소의 경우와 같이 성장하는데 몇 년씩이나 걸리는 가축은 최종적으로는 도살하여 식육으로 쓴다 하더라도 무계획적으로 사육할 수는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주식, 부식의 구별이 없고, 사람 입에 들어가는 모든 식품을 처음부터 사람의 손을 거쳐 조달해야 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먹는 데 대한 관심은 좋은 싫든간에 높아만 갔다. *. 원래는 '섞어찌게'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우라나라처럼 쌀이나 보리의 입자로 밥을 끓여먹는 것이 없으며 여기에는 제분과정이 필요하였다. 또한 어패류의 섭취방법도 다르고, 소나 돼지의 경우도 통채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도살 후에도 여러번의 해체작업을 거쳐 편육이나 내장으로 나눠놓기 전에는 요리로 만들 수가 없었다. 아무튼 서양요리의 주류는 유우, 버터, 치즈, 밀가루, 고기, 야채, 달걀 등을 뒤섞어서 약한 불에 흐믈흐믈하도록 끓이는 방식이였다. 옛날에는 밀가루를 우유나 산양의 젖을 섞어 끓이는 것이 전부였지만 점차로 섞는 내용물이 늘어갔던 것이다. 세기경에 위에서 말한 '섞어찌게'가 변용된 것에 불과하다. 요리에 있어서도 재료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까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탓인지 서유럽에서는 일찍부터 괴혈병이 진귀한 질병이 아니었다. *. 무르익은 음식혁명 근세 이후 서유럽인의 해외진출이 사태를 일변시켰다. 알지도 못했던 음식이 연이어 유입되었다. 16세기에는 아스파라거스(asparagus : 어린싹이 식용 야채로 쓰임), 멜론, 17세기에는 코올리플라워(cauliflower : 꽃양배추. 양배추의 일종), 가치, 완두콩, 18세기에는 토마토, 사탕무우 등이 서유럽에 첫선을 보였다. 이것이 일반에게 금방 보급된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서유럽의 식탁은 풍성해졌다. 그 가운데서도 17세기에 등장한 홍차와 커피는 혁명적인 위력을 발휘하였다. 원래 서유럽에서는 우유 종류를 제외하면 맥주 포도주 등 알콜음료뿐이였고 사람들은 항상 얼큰하게 취한상태였다. 거기에 취하지 않게 신경을 자극시키는 새 음료가 소개되었다. 처음에는 독성이 있을 것이라고 배척받았지만 18세기에는 서유럽에 일반화되었다. 또 16세기 말에 서유럽에 전해진 감자도 역시 처음에는 배척되다가 18세기경 일반화되었다. 또 18세기에는 사료작물 재배가 본격화되었고 방목과 축사내의 사육이 병행되면서 비육이 가능해짐에 의해 소, 양, 말 등의 도살량이 증대되었다. 18세기는 모든 점에서 음식혁명이 진행된 시기였고 누구나 스푼과 포크를 사용하게 되었다. *. 레스토랑의 배경 프랑스요리가 서양요리의 왕좌를 차지한 것은 18세기였다. 당시 프랑스 경제학자 케네는 음식의 사치는 품종개량을 낳았고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왕족, 귀족들은 오로지 미식을 추구하는 데 광분하였다. 남녀 모두 부엌에 출입하는 것이 유행하였고 파티를 열어도 남주인이나 여주인이 손수 만든 요리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이 최고의 예의였다. 물론 전부 다 부부가 도맡는 것은 아니였다. 솜씨 좋은 요리장은 왕족, 귀족들이 서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들은 직인이라기보다는 예술가 대접을 받았고 종종 치열한 스카우트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요리비법이나 새로운 요리가 계속 나타났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실업자가 된 요리장들이 남몰래 불특정다수의 손님들에게 요리를 제공하였던 것이 오늘날 레스토랑의 기원이였다. (서양사의 기초지식 - 신서원,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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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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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싸갈탱이 작성시간 04.10.26 오랜만에 들어와 보았는데 정말 로드님 대단하십니다!^^ 수능 끝나면 다 읽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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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싸갈탱이 작성시간 04.10.27 이른바 초기중세시대(암흑시대)때는 평민들은 말 할것도 없고 귀족들조차 접시와 포크,컵 같은 생활 필수품들이 없어 접시는 빵을 굳게 말려서 만들었고 음식은 손으로 먹었습니다.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부얶이 밖에 있는 홀에서의 음식은 항상 비에 젖어야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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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싸갈탱이 작성시간 04.10.26 그때 농민들의 주식은 소의피와 진흑,밀가루를 섞어 만든 붉은 빵과 나무뿌리같은 걸로 만든 거무스레한 죽이 전부였지요. 아니 그거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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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싸갈탱이 작성시간 04.10.26 중세의 요리사의 등급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참 이상한데 요리사들은 음식의 질보다는 멋에 굉장히 신경을 썼습니다. 예를들어 돼지바베큐의 배를 가르자 갑자기 참새때가 튀어나오던가 못지게 날개를 펼친 공작새구이, 소머리에 돼지머리를 꼬맨 엽기적이며 멋들어진 식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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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싸갈탱이 작성시간 04.10.26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정말 멋들어지게 만들었다 합니다. 후식으로 나오는 밀가루 과자또한 대단한 모양새를 뽑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