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만약에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인생에 있어서 만약에 라는 가정을 참 많이 하게 되죠.
개인사에 있어서도 만약에 라는 가정 하에 아쉬움을 많이 갖게 되는데, 이걸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입을 하면 어떨까요?
역사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 ‘만약에’ 라는 가정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불문율이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학식이 깊은 선생님들께서도 짧게나마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시곤 합니다.
하여 우리근현대사에 있어서 여러 선각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 제가 아주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인
그분이 우리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으로 올리는 글이니 너무 진지하게
보시진 말고, 지식을 하나 추가한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1854년 미국 페리 함대의 무력에 의해 강제개항을 해야 했던 일본은 메이지유신에 성공하며,
서양의 발전된 산업과 경제체제를 도입해 서구화, 근대화 정책으로 마침내는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반면, 조선은 청과 일본 등 당시 동아시아 국가가 서양세력에 의해 침탈당하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대비에 실패함으로써, 그 당사자였던 일본의 무력에 의해, 1876년 굴욕적인
개항과 평등하지 못한 조약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마침내는 34년 뒤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죠.
이는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능력 부족과, 개방 이후 자주적인 개혁을 위한 내부의 동력과,
경제적 환경을 만들지 못한 왕실을 비롯한 조선 지도층의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부패함이 그 바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방 이후 사회변혁기 조선에서는 과감한 개혁과 혁명을 통하여, 봉건적 구체제의 타파와 부국을
꿈꿨던 선각자들은 물론이고, 식민지 국민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며 자주성을 높였던
독립 운동가들과, 식민지 일본정부에 적극 협력하는 친일부역세력 등 다양한 삶을 영위한 사회지도층이
고루 존재하였지만, 아쉽게도 그 누구도 조선민중을 비참한 삶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는 못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한 후 이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한 세력 중에는, 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
이렇게 되었으니 스스로 힘을 키워 자치를 받아내자고 주장한 이광수, 윤치호 등 ‘실력양성론자’,
외교에 주력하여 국제여론을 조성하고 열강의 후원을 얻어 독립을 얻고자 한 안창호, 이승만 등
‘외교론자’, 그리고 일제에 대해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는 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무장투쟁론자’들이 있습니다.
의열단을 조직한 약산 김원봉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의 무장전투로 활약한 김좌진, 홍범도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죠.
이와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 중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분이 바로
몽양 여운형입니다.
경기도 양평의 양반가 출신인 몽양은 서구학문을 배우고자 스스로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근대학문을
익히면서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합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파견하고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기획하기도 했죠.
1920년 사회주의 계열인 고려공산당에 가입을 해서,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대표로 참석해 연설을 했으며, 김규식과 함께 대회 의장단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쑨원의 중국국민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상하이에서 1929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습니다.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엔 국내를 무대로 항일운동을 계속하면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후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기도 합니다.
보통 일장기말소사건이라고 하면 동아일보라고 알고 있는데, 동아일보는 이 조선중앙일보의 사진을 옮겨다
실은 것이랍니다.
여운형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적과 우리,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활동을 보여준 인물로서,
자신의 신념과 필요를 위해서라면 중국, 소련, 미국, 일본 등 세계 어느 지역의 인사들과도 만남을
가졌습니다.
3.1운동을 도모하면서는 중국의 쑨원을 만났고, 1918년 찰스 클레인 미국 윌슨 대통령 특사를 만난 자리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강압과 악랄한 간계로 말미암아 합방을 당했고, 일본인들의 억압이 날로 심해져 가고 있으나,
조선국민은 결사적으로 이를 반대하여 유혈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며, 일제의 압박과 지배에서 해방을 위해서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하고자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으로 임명된 이후에는, 당시 조선의 독립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레닌과
트로츠키와도 교류를 했으며, 중국의 장제스,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치민 등 좌우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인맥을 활용하여, 오로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는데, 그 중 최고의 백미는 3.1운동 이후 조선민중에게
가장 신망이 높은 여운형을 포섭하기 위해 일제가 그를 일본으로 초빙을 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1919년 11월 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와 여운형의 대화 일부입니다.
“그대는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는가?” (미즈노 렌타로)
“그대는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는가?” (여운형)
당시 여운형은 일본의 하라 수상과, 다나카 육군대장 등 고위 관료들을 만나 여러 차례의 회담을 갖는
과정에서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일목요연한 논리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여 그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도쿄제국주의호텔에서 500여 명의 청중들과 내외신 기자, 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논리정연하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일본 정계는 큰 혼란에 빠져 마침내 하라 내각의 총사퇴를 유발하게 되었답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미국의 참전으로 여운형은 “제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일본이 전쟁에서
반드시 질 것이며 전쟁 후의 평화회의에서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가 또 다시 검거되는 등
뛰어난 통찰력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늘 조선의 앞날을 예견하는 길을 걸어온 정치가인 것입니다.
일본의 패망을 예견한 그는 1944년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며 새로운 국가건설을
준비하여, 마침내 일본의 패망한 1945년 8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 받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지부를 결성하여 치안을 유지하였으며,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존 하지 장군이 극비리에 미국정부에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에
“남쪽에서 대통령 선거를 하면 여운형이 당선된다. 그 다음은 김구와 김규식이고 우리가 미는 이승만은
그 다음일 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여운형은 해방 이후에도 대중적 인지도와 신망을 확보하고 있던
인물로서,
1946년에는 이북의 조만식, 김일성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 대처 문제를 논의하고, 김규식, 김창숙 등과
함께 남북의 통일정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