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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026.6.14.주일낮예배(창 18:13~15, 창세기 읽기(19) 위대한 인간, 어리석은 인간)

작성자최선을다하는삶|작성시간26.06.14|조회수111 목록 댓글 1

*2026.6.14.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창 18:13~15

*제목; 창세기 읽기(19) 위대한 인간, 어리석은 인간

 

 

 

프롤로그.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

한 교회의 전도 훈련, 시장에 가서 인사만 하고 돌아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후 그 시장의 60% 상인이 전도되었음. 그의 행위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기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면,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 한 권사님의 고백 >, 당신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뭐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 이 고백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 한 미국의 장로님의 금고 >

대못과 수첩만 있음. 수첩에 적힌 고백.

“나는 원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비참한 죄인이었다. 내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다.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내 평생에 이토록 과분한 물질과 복을 주셨는데, 나는 조금만 성공해도 교만해지고, 조금만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마치 내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룬 양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이 금고를 열고 주님을 못 박았던 이 대못을 바라보았다. '너는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며, 나의 교만을 죽이고 오직 예수로만 살기 위해 이 못을 가장 귀한 금고 안에 보관해 둔 것이다.”

 

이제는 진정 예수 믿는 사람이 되자!

 

 

 

1. 위대한 인간

 

실로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이 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거의 없다. 달을 보고 가고 싶다고 생각한 인류는 달로 가는 버스를 만들었다(우주왕복선 등). 인간의 친구 같은 로봇을 만들고자 한 인간은 이제 인간을 능가하는 컴퓨터와 로봇을 만들어가고 있다(AI, 알파고, 등).

 

인간이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것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외적 능력과 내적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해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성의 발전은 한계가 없는 듯 보인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놀라운 능력의 점화선은 무엇일까? 앞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바로 “마음”이다. 인간의 일이 잘 되는 이유는 그가 잘 되리라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의 삶이 자꾸 망가지는 이유는 그가 잘 안되려고(?) 마음먹기 때문이다.

 

보다 더 그럴싸한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긍정과 부정의 방향성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 난다는 것이다. 목회하면서 혹은 살아가면서 보면 인생이 망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기도 전에 ‘안 된다’고 다짐한다든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려 든다든지, 자신의 삶을 자신이 망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산다든지 말이다.

 

아들러는 모든 일의 결과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 정확하게는 내가 그렇게 선택해버리고 싶은 상황인 것이다. 더 아들러식으로 이야기하면 “목적” 없이 혹은 “잘못된 목표 설정”으로 인생을 결정하기에 인생이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났기에 위대하다. 그가 마음을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를 ‘긍정의 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긍정의 힘 이상의 ‘영적인 창조성’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먹어라! 그러면 다 이룰 수 있다.

문제는 마음을 먹지 않고, 먹어도 아주 약하게 다져 먹기 때문이다.

 

 

 

이왕 이런 이야기까지 왔으니,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해보자. 마음을 먹은 것을 이루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말하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어떤 사건이든지 그 출발점은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외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순간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때이다.

 

 

잘 마음먹고, 늘 입으로 선포하라! 그러면 일이 이루어져가는 것, 혹은 내가 변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 불쌍한 인간

 

인간은 분명 위대하지만, 인간만큼 도 불쌍한 존재도 없다.

 

먼저 인간은 수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육체의 한계(힘, 시청후각 등), 생명의 한계, 능력의 한계, 등등.

 

무엇보다도 인간의 이성의 한계도 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나 제한적이다.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이야말로 고작해야 지구촌에서의 경험이다. 그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영역으로 제한된다. 심해나 미크로 세상, 극한의 환경이나 미지의 세계의 이야기는 아직 다 알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판단 자체가 벌써 오류와 한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우리가 늘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이해되지 않지만 옳은 것들,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부지기수라는 것을 고백해야만 한다.

 

“그럴 수도 있다.” 이것이 심리학적으로 부족한 인간이 고백해야 하는 명제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을 볼 때는 이성적인 눈으로만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의 눈이란 인간의 세상 밖의 일들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1)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33:3)

 

 

 

3. 어리석은 사라

 

사라의 나이 당시 89세 정도였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이다. 이성적으로는 말이다. 그래서 내년 이맘때에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10절)에 “웃었다.”(12절) 성경에서도 이러한 판단이 매우 이성적이고 옳을 수 있다고 말한다. ‘11절’을 보자.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8:11)

 

아브라함도 이미 99세로 노쇄하였고, 사라도 이미 폐경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이성적인 사라도 이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 기준을 정하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만 가능하다. ‘14절’을 보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8:14)

 

 

 

위대하지만 어리석고 불쌍한 인간이여, 이성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면 네가 볼 수 없었던 크고 비밀한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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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선을다하는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4 이 설교는 창세기 18장을 바탕으로 인간이 지닌 이중적 면모를 심리학과 신앙의 관점에서 고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무한한 창의성과 긍정의 마음으로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성적인 판단력의 한계와 오류에 갇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노산의 약속을 비웃었던 사라의 사례를 통해, 인간이 육체적 조건과 이성에만 매몰될 때 겪는 영적 실수를 지적합니다. 결국 저자는 독자가 협소한 이성의 눈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갖출 것을 권면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영적인 창조성을 회복하는 것이 삶의 큰 변화를 이끄는 핵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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