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정차
(56번 거리의 뫼르소)
Novelist 소원
여름이 끝난 뒤에도 바다는 쉽게 식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해변을 떠난 계절이었지만 모래 위에는 아직 늦여름의 열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소년은 거의 매일 그 바다를 찾았다.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었다면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발길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소년은 겉보기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려 노력했다. 아침이 되면 가장 먼저 해변으로 나가 밤사이 밀려온 해초와 부서진 나무 조각들을 한곳에 모아두었고, 파도에 떠밀려온 병이나 빈 깡통도 말없이 주워 담았다.
근처 가게 주인이 무거운 상자를 옮겨달라 하면 잠자코 도왔고, 낡은 의자를 고치거나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도 곧잘 해냈다. 사람들 틈에 오래 섞여 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일상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긋남이 자꾸만 드러났다. 셔츠 단추를 끝까지 반대로 끼운 채 한참을 돌아다니거나 물건을 내려놓을 때마다 꼭 같은 방향으로 맞춰 두었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면 무심코 주워 원래 있어야 할 자리처럼 보이는 곳에 다시 올려두곤 했다. 한번 흐트러진 배열을 보면 견디지 못해 다시 맞춰야 했고 누군가 그 순서를 바꾸면 내내 신경이 곤두서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그런 소년을 보며 가끔 이상하다는 듯 웃었다. 소년 역시 아주 잠깐, 자신이 남들과 다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붙잡히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애썼다. 이상한 사람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금세 등을 돌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더욱 입을 열지 않았다. 웬만하면 말을 하기보단 익숙한 행동을 반복했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대부분 종이 위에 적어 내려갔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엔 늘 작은 공책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년은 무릎 위에 공책을 펼쳐두고 오래도록 문장을 고쳐 쓰곤 했다. 단어 하나를 적고 지우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문장이 어긋나면 자신까지 어긋나는 기분이 들었다.
해가 기울 무렵이 되면 소년은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찢어 모래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근처에서 주운 조약돌 하나를 그 위에 얹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어쩐지 누군가에게 말을 남겨두는 의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년은 한동안 그 종이를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멀리, 해변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녹이 슨 표지판 하나가 서 있었다.
‘56번 거리’
글자는 바닷바람에 바래 거의 지워질 듯 희미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 길을 잊지 못했다.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운 날이면 늘 그 길을 따라 걸었다. 한때 자신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던 존재가 머물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날지 못하고, 대신 바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던 갈매기. 소년에게 그 갈매기는 이상하지 않은 순간 그 자체였다.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주었고,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의 이방인처럼 느껴질수록 소년은 더욱 그 늦여름의 바다를 떠나지 못했다.
소년은 자신이 남들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수록 불안해졌다.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마음속에 가라앉은 채 오래 머물렀다. 그럴수록 소년은 공책과 연필, 그리고 자신이 적어내는 문장들에 더욱 몰두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만큼 소년의 감정은 입 밖에 꺼내기보단 가슴속에 맺히기 일쑤였고 그것을 견디기 위해 택한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시를 쓰는 일이었다.
소년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공책을 펼쳤다. 해변에 멍하니 앉아 파도 소리를 듣다가도 그랬고, 잠들기 전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순간에도 그랬다. 생각을 글자로 옮기는 동안만큼은 머릿속을 휘젓던 감정들이 잠깐이나마 얌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소년이 만들어낸 문장들까지 불안한 것은 아니었다. 여름의 바다 냄새와 모래의 감촉, 해가 기울 무렵의 미지근한 바람 같은 것들이 담긴 문장들은 오히려 지나치게 아름답다 여길 정도였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외로움과 공허를 문장 속에 녹여냈다. 그걸 읽는 모든 사람들은 소년의 결핍을 바라보기보단 재능에 박수를 쳤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흔히 총망받는 예술 작품들이 그렇듯이 소년의 결핍 역시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소재처럼 보였으니까.
그렇게 소년은 평범한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매일 해변의 빈 깡통을 주워 담고, 밀려온 해초를 걷어냈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무언가를 하다 보면 아주 잠깐이나마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러다 지칠 때 바위에 기대어 시를 쓰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날은 유독 파도가 눈에 들어왔다.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그러다 또다시 돌아가는 물결이 꼭 자기 자신 같았다. 같은 바다인데도 파도는 매번 다른 모양으로 무너졌다. 소년은 한참 동안 문장을 고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그 모습을 종이 위에 담아내려 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고양이 울음소리 같기도, 술에 취한 아저씨의 고성같기도 한 소리. 갈매기였다.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무언가 이상했다.
갈매기는 한쪽 날개가 젖은 듯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밀려오는 파도를 따라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소년은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한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바다와 갈매기를 번갈아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쓰던 시를 다시 이어 적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다시 고개를 들어 갈매기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그때마다 소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종이 위에는 지워진 자국과 검은 연필 가루만 쌓여갔다.
소년은 자신이 다가간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괜히 손을 댔다가 상황을 더 망쳐버린다면 그건 정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갈매기는 계속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물에 잠긴 몸이 뒤집혔다 떠오르기를 반복할 때마다 소년의 시선도 자꾸만 바다 쪽으로 흔들렸다. 연필 끝은 종이 위를 맴돌기만 했다.
철퍽.
짧고 둔탁한 물소리에 소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검은 파도만 거칠게 밀려오고 있었다.
소년은 그제야 바다를 향해 달려갔지만 이미 닿을 수 없는 거리까지 멀어져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갈매기를 만나면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을 나눌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틈 사이, 몇 번이고 뒤집히던 갈매기의 몸은 순식간에 바다에 잠겨 사라졌다.
소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을 뻗을 수 있었던 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결과가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졌다.
반가움을 느낄 틈조차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리 또래 아이답지 않은 소년이라 해도 허우적대는 갈매기를 보자마자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바꿀 수 없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소년은 늘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치고 싶은 문장은 지우면 됐고 엉망이 된 시는 찢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바다는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았다.
모든 것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뒤였다.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사건이 일어난 그 삼십분의 시간은 소년에게 지울 수 없는 한 문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소년은 여전히 시를 썼다. 남들과 다르지 않게 보이려 했던 일들은 자연스럽게 그만두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소년은 존재에 대한 그리움보단 늦음에 대한 후회에 붙잡혀 있었다. 감정은 말이 아니라 글이 되었고, 모든 것은 문장이 되었다. 이전에도 소년의 문장은 결핍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제는 그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소년의 시는 전부 같은 의미를 반복하고 있었다. 소년에게 후회란 소재가 아닌 주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소년 자신이 되어갔다.
한때 시가 되었던 바닷바람과 모래알, 흘러가는 구름의 모양은 이제 바라보는 것조차 잊은 지 오래였다. 한자리에 오래 머물며 글을 쓰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소년은 목적 없이 거리를 걸었고, 두 눈은 줄곧 공책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는 시가 되지 못했다. 같은 단어가 반복될 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들은 서로 엉킨 모습으로 페이지 위에 늘어져 있었다.
어느 날, 연필을 힘껏 쥔 소년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을 땐 같은 단어들만이 겹쳐 쓰여 있었다.
‘늦음’
‘늦음’
‘늦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던 소년은 그제야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늦음’
소년은 한참 동안 자신이 적어놓은 단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끝내, 애써 외면해오던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망설이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들은 소년의 가슴 한가운데를 아프게 짓눌렀고 그림자처럼 소년을 내내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소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면 늦지도 않았을 것.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어딘가 어긋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할 만큼, 그 생각은 소년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소년의 손이 문장 위에서 멈춰 섰다. 짙게 눌러 적힌 ‘늦음’이라는 단어 아래로 연필심이 얕게 떨리고 있었다. 손끝에는 어느새 검은 흑연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소년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종이만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파도 소리가 끊겼다.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귓가를 메우고 있던 바람 소리도, 하다못해 옷자락이 떨리는 소리 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세상의 숨통을 한순간에 틀어 막아버린 것 같았다.
멈춰 있었다. 밀려오던 파도는 허공에서 일그러진 채 굳어 있었고, 흩날리던 모래는 바닥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풍경들은 모두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고요히 멎어 있었다.
소년은 그 광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단 편안함이 앞섰다.
주위를 둘러보던 소년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멈춘 세상 속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작은 톱니바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의 움직임은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
소년은 돌아가는 톱니를 보자마자, 어떤 의문을 가지기 보단 오로지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이 먼저 떠올랐다. 흐르지 않는 세상이라면 더는 늦음도, 후회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소년을 그렇게 만들었다.
소년은 망설임 없이 톱니에 손을 댔다. 그리고 그것을 뽑아 들었다. 마치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응어리를 뿌리째 뽑아내는 것과도 같았다.
그 순간, 소년의 머릿속에 오래 눌려 있던 장면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이상한 눈빛과 아무렇지 않게 던져지던 차별 섞인 말들, 그리고 또래 아이들의 무심한 손가락질까지.
모든 것이 파도처럼 겹쳐 지나갔다.
톱니가 빠져나간 순간, 큰 소리가 났다. 거대한 무언가가 크게 꺾이며 내려앉는 듯한 소리였다. 소년도 그 소리를 들었으나 톱니가 낸 소리는 아니었기에 어디서 비롯된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손안의 톱니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거대한 구조물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마치 풍력을 모으기 위해 세워진 것처럼 보이는 형태였다.
소년은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방향성을 느꼈다. 마치 그곳이 모든 것의 기준인 것만 같았다.
소년은 그곳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신비한 일을 겪게 되었다. 멀리 공중에 멈춰 있던 작은 파편 하나를 바라보았을 때, 분명 그것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감각에 이끌린 소년은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톱니를 쥐었다. 금속의 감각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차갑다기보다는 멀리서 멈춰 있던 무언가가 이제 막 손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소년은 손에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그 순간 파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소년은 숨을 삼켰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톱니 하나가 멈춰 있는 것들 사이에 손을 뻗을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소년은 한동안 톱니를 쥔 채 서 있었다. 어느새 소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질감도, 늦음에 대한 후회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러자 웃음이 나왔다.
좀처럼 웃지 않아 웃는 법을 모를지도 몰랐던 소년이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때, 고개를 숙이며 웃던 소년에게 발끝의 모래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에서 온 소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일한 흔적으로 보였다.
차가운 톱니를 더 세게 쥐며 모래알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신발에 있던 모래가 조금씩 움직이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어딘가에서는 건물이 계속해서 무너져내렸다.
무너지는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오래 준비해온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아무 일도 없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남겨진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늦어버린 삼십 분의 시간이 그들을 영영 기다릴 수조차 없게 만들 줄은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잠깐의 시간이 영영 늦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사이 소년은 멈춰버린 세계를 끝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흐르는 시간 자체가 사라진 세계였다. 무너진 도로와 뒤집힌 신호등 사이를 지나자 어느 순간 커다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조차 멈춘 도시 한가운데에는 반쯤 열린 카페 문 하나가 비스듬히 흔들린 채 멈춰 있었다.
소년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걸터앉는 순간,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사람처럼 몸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세계는 멈춰 있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원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소년은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손등 위로 낮선 감각이 느껴졌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소년의 눈가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눈물에 놀란 소년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짐했다. 감정이라는 것은 남김없이 버리겠다고.
되돌아가던 소년은 그곳에서 남자와 소녀를 발견했다. 멈춘 세계를 헤매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소년은 자신이 들었던 굉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톱니가 빠져나간 순간 들었던 것은 단순한 굉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간과, 누군가의 약속, 그리고 누군가 당연히 도착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하루였다.
소년은 한동안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어렵게 얻은 평온이 다시 흔들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붙잡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처럼 늦어버린 순간에 붙들린 사람들. 후회와 상실 속에서 허우적대는 그들에게, 흐르지 않는 시간은 분명 안식이 될 거라고 소년은 믿었다.
하지만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소년의 생각과 달랐다.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도 그들은 끝내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다. 종이 한 장을 놓치지 않으려 몸을 던지고, 끝났을지도 모르는 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년은 그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이미 늦어버린 것들을 붙잡으려 하는 행동들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희망 같은 것을 아직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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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아직 자신의 손아귀에 있음을 확인한 소년은 그것을 다시 확인하듯 정차의 사간을 걸어 다녔다. 소년의 두 눈에는 더 이상 감정의 반짝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처럼 빛을 잃은 안광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발걸음에 맞춰 소년의 주변 풍경이 마구잡이로 뒤틀렸다.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이 나타났다가, 혼자 잠들던 방의 한구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을 때,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녹슨 표지판 하나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56번 거리’
하지만 소년은 그 앞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손에 쥔 공책에 시를 적어 내려갈 뿐이었다. 시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의미를 잃은 줄글들이었다.
무너진 거리와 녹슨 표지판, 그 위로 스쳐 지나가는 모든 풍경은 소년에게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의 안에서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고 있었다.
소년의 비뚤어진 마음은 서서히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한 거슬림이었고 그다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이 되었으며 결국 그것은 분노로 변질되었다.
그들이 여전히 품고 있는 희망. 끝을 끝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다시 늦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반복하는 방식. 소년은 그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희망’을 한데 모았다. 붕괴된 건물 안의 사람들이었다.
이미 그의 손 안에서는 시간이 의미를 잃은 뒤였다. 태엽을 쥐는 순간부터 어떤 형태든 고정할 수 있었다.
소년은 그들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태엽을 감듯 공기를 비틀었다. 그는 색을 잃고, 그대로 굳어갔다. 마치 석고상처럼 변하지 않는 상태로 멈췄다.
소년은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의도대로 세계가 정렬되는 감각 속에서 그는 그것을 처음으로 ‘구원’이라고 불렀다.
소년은 공책을 펼쳐 시를 적어 내려갔다. 말보다 글을 쓰던, 오래된 습관이었다. 의미 없이 나열되는 글자들이 적힌 공책은 소년의 손에서 구겨졌다. 시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것들이었다. 소년은 계속해서 쓰고, 구기고, 던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한 여자가 소년을 향해 걸어왔다. 무너진 거리와 멈춰 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주저함 없는 걸음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소년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에서는 소년이 버리고자 했던 감정이란 것이 느껴졌다. 슬픔과 반가움,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마치 소년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적이 잠깐 내려앉았다.
소년은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태엽을 감듯 공기를 비틀었다.
여자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완전히 굳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눈빛만은 더 또렷해졌다. 소년을 향한 채 흔들리지 않았다.
소년은 이전과 다른 결과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등을 돌렸다.
남은 것은 멈춘 사람들과 구겨진 종이들뿐이었다.
한 사람, 한빛만이 멈추지 않은 채 소년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 소원
소설과 시를 사랑하는 작가.
끝없는 상상을 글로 펼치며,
읽고 쓰는 일을 삶의 중심에 두고 내면의 세계를 확장한다.
E-mail | sowon_428@naver.com
Brunch | https://brunch.co.kr/@leesowon
Instagram | @sowon.ink
*이 소설의 권리는 크레이프사운드에 있으며,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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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EDILU(환생) 작성시간 26.06.13 의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죠. 결국 놓치고 늦어버리더라도 움직여야 무언가를 심지어는 그게 고통뿐이더라도 얻을 수 있기에 정차의 시간이 없는 세상이, 우리의 이 시간이 소중한 거 아닐까요? 언제나 좋은 노래, 좋은 뮤비, 좋은 소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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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나무늘보 작성시간 26.06.14 매번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건데
어떻게 이런 글을 쓰고 이런 노래들을
만드는지 늘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소설과 노래가 많이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작성자영율 작성시간 26.06.17 new
이번 소설은 소년의 모습이 저와 비슷했기에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생각이 많아지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상해 보이지 않으려는 모습, 나쁜 감정이 들 때는 어딘가에 의지하는 것, 주변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꼈던 것, 저도 그랬던 것 같아서 읽으면서도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은근히 소년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의지했던 갈매기가 이젠 더 이상 곁에 없다는 것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어떤 감정들이 몰려올지는 상상도 할 수 없네요 소년이 시간이 멈춘 세계로 간 것도 단순히 갈매기에게 손을 뻗지 못한 후회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감정들이 한 번에 터져버려서 지금의 소년의 모습을 만든 걸 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소년은 손 내밀어줄 누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소년의 마음 한편이 허전한 것은 갈매기의 빈자리 때문일지도요 이번 스토리는 지금까지 나왔던 사건들을 정리하면서도 앞으로의 소년의 변화를 기대하네요 생각보다 한빛의 분량은 적었지만 이번 소설에서 한빛이 나왔다는 건 한빛이 소년을 위로해 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속으로는 소년과 대화를 나눌 사람이 소녀든 차오늘이든 소년과 대화를 나눌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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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영율 작성시간 26.06.17 new
누군가 소년을 위로해주기를.... 다음 내용은 어떨지 의문을 품고 후기 끝냅니다 뭔가 이번 후기가 우울한 느낌이 있었지만 우울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너무너무 잘 읽었어요!! 어쩜이리 뮤비와도 잘 어울리는지...! 저와 비슷한 특징을 찾아서 지금까지 소설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좋았습니다 앞으로 나올 소설, 노래, 뮤비 모두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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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베미 작성시간 15분 전 new
작품들이 점점 쌓여 가면서 세계관과 스토리가 조금씩 연결되어 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후회를 가진 사람들이 올 수 있다는 정차의 시간이라는 곳에, 한빛 또한 그 장소에 도착한 것으로 보여요. 어떤 이유와 사연을 가지고 정차의 시간에 도착한 것일까요? 차오늘에게 표현 없이 기다리기만 한 것에 대한 후회일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정차의 시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얼른 밝혀지길 바라면서 다음 작품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이번 작품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