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것이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문의해야 알 일입니다만, [자료등록수정/게시판]의 게시물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순흥안씨 안재홍이라는 사람이 '죽산안씨 시조 안원형(安元衡)이라는 인물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인물자료에 등재하여야 한다.'고 요청한 게시물이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죽산안씨 시조는 안원형이다. 증손자의 묘갈을 보면 죽성군(竹城君)이 아니라 광산군(光山君)이다. 그리고 순흥안씨와 상관없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인물등재요청을 한 것이고, 이 청이 받아들여져 인물사전에 등재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만약 이와 같은 과정이 제 생각과 같다면, 안원형 선조님께 그 후손들의 죄스러움에 대해 우리 신죽산안문은 창피함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인물사전 등재요청] 죽산안씨 시조 安元衡 (안원형) 안원형(安元衡)은 한 씨족의 시조입니다. 역사적 기록도 분명합니다. 당연히 죽산안씨 문중의 중요한 인물임으로 귀 연구원의 [인물사전]에 등재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로 볼 때, 안원형(元衡)보다 못한 사람들도 인물사전에 多數 올라 있다고 봅니다. 당연히 [인물사전]에 이름 석 자가 적혀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안원형의 증손자인 '안복초 묘갈명'에 분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曾祖 諱 元衡。重大匡 光山君。 증조는 휘가 원형(元衡). 중대광 광산군.
이름은 원형, 벼슬은 중대광(重大匡)이었고 군호가 광산군(光山君)입니다. 고려 중엽의 벼슬 가운데 '중대광'은 종1품입니다. 아무나 올라가는 자리가 아닐 것입니다. 고려 시대나 조선 때에, 아무에게나 군호를 내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고려 때는 '불알 깐'자들에게도 군호를 내렸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고려 때, 벼슬이 '중대광'이었고 군호를 받았으면 이것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귀 연구원의 <성씨와 본관>에 안원형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죽산안씨 2 (신죽산) 시조 안원형(安元衡)의 자(字)는 경보(敬甫), 호(號)는 일호(一湖)이다.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사(密直司使),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보국문하시중(輔國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후에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올라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 귀 연구원의 기록을 보면 '안복초묘갈명'에서 보이는 사실과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안원형의 군호가 광산군(光山君)이 아닌 죽성군(竹城君)으로 되어 있습니다. 죽산안씨 안철손(哲孫)이 자기의 아비 무덤에 세울 비석, 묘갈명에 증조부의 벼슬과 군호를 잘못 적었을까요 ? 안철손 보다 6년 뒤에 과거에 합격한 이승소(三灘 李承昭)에게 아버지의 묘갈명을 부탁하면서 증조부의 벼슬과 군호를 다르게 적으라고 부탁했을까요 ?
안철손이 그런 불효를 했을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럴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 고려 말의 인물 가운데 죽산안씨 안극인이 있습니다. 진짜 '죽성군'은 이 사람입니다. 竹山人 門下侍中 政堂文學。封 竹城君。
안극인(安克仁) 죽산안씨 한평(漢平)의 손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중대광우문관대제학(重大匡右文館大提學)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공민왕(恭愍王) 정비(定妃)의 아버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안극인 [高麗政堂文學竹城君文貞安公墓表]
公諱克仁。竹山人。 祖諱漢平。門下贊成事 襄良公。 考諱社卿。門下侍中 僖靖公。 公亦累官至 政堂文學。封 竹城君。
三世爲高麗宰相。門戶赫舃。洪武癸亥四月十七日。公卒。諡文貞。葬于平山猪灘。配慶興宮主嘉利李氏。議郞林宗女。動安居士承休孫也。別葬高陽。有三男。天老左尹。仲老判書。叔老都廵問使。女爲恭愍王定妃。公之後承。則天老子騰官判書。而子姓 無傳。仲老,叔老二派獨傳世。而叔老派尤盛。曰參判紹之,校理美,正言石根,弼善重吉。仲老派也。曰都觀察 望之,參知敬之,延昌尉孟聃,知中樞貧世,文科郡守士鉉,文科府使景深,參判縝,文學䋊,司諫相徽,高士號月窻應世,文科察訪永錫,吏曹正郞世彦。叔老派也。公之事行。則世遠不詳。 惟忠穆王時。杖殺亂法倖臣。恭愍王營魯國公主影殿。役民多。上書力諫。玆二事略見於史。足可想剛毅正直之一端矣。所著詩文皆放佚。只數首載輿地勝覽,帝王韻記等書。亦可以一臠識全鼎也。公墓無圭首之植。豈公卒未 幾。麗運告訖。勢有未遑而然歟。今公後孫。改修塋域。營立石表。要余記其事。余念宣廟國舅金公悌男爲延昌外裔。而不佞又爲外裔於金公。則於公實爲彌甥矣。誼不可終辭。謹識之如右。[도곡집 20]
--------------------- 순흥안씨 안목(牧)은 고려말 '명문 중의 명문'이던 광산김씨 태현(台鉉 文正公)의 사위입니다. 광산김씨 족보에 의하면 문정공 김태현(台鉉)의 아들이 김광철, 순흥안씨 안목(牧)의 처남이 김광철(光轍), 김광철의 아들이 회조(懷祖)입니다. 회조의 사위가 바로 죽산안씨 안원형. '죽산인'이라고 되어 있고, '회조(懷祖)의 따님과 혼인하여 아들 儉과 勉을 낳았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전해집니다. 다음에 족보 기록을 올리겠습니다.
광산김씨 김광철(光轍)은 순흥안씨 안목(牧)의 처남, 광산김씨 김광철(光轍)의 아들 회조는 안목(牧)의 아들인 안원숭(元崇)과 외종형제 곧 외사촌.
죽산안씨 안원형(元衡)은 광산김씨 회조(懷祖)의 사위임으로 순흥안씨 안원숭(元崇)의 '처조카사위'가 됩니다. 아닙니까? 분명하지 않습니까 !
순흥안씨 안원숭이 어떻게 죽산안씨 안원형과 친형제가 될 수 있습니까 ! 순흥안씨 안원숭이 어떻게 '처조카사위'인 안원형과 친형제가 된답니까 ?
이건 말 없는 선조님에 대한 엄청난 모독행위입니다.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동물들의 '섞붙이기(交配)'라면 몰라도 ........................
마루 밑의 고양이가 可 可 笑 笑 할 일입니다. 可可笑笑笑 ---------------------------------------------------------------------
참고로, 귀 연구원의 2 월 17 일 기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순흥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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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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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병주 작성시간 09.11.16 챙피한 일이군요. 남의 시조를 두고 왈가왈부하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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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주혁 작성시간 09.11.17 오원 안재홍은 고려시대에 근친결혼이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역사에 무지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료들을 수집하여 기고만장하는 오원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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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재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11.17 고려말 유학자들은 중국에서 우리민족을 오랑캐라는 이유를 처가살이와 근친혼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처가살이와 근친혼의 풍속을 바꾸고자 노력하면서, 같은 성씨 끼리 근친혼 뿐 아니라 내외종사촌, 처가집과 중혼 등을 막고, 먼 지역으로의 촌외혼을 권했지만, 우리의 풍속은 처가살이와 근친혼, 촌내혼 뿐 아니라 재혼과 이혼이 가능했고... 제사를 모시는 방법에 있어서도 윤회봉사(아들 딸 큰아들 작은 아들 가리지 않고 돌아가며 제사를 모시는 것), 외손봉사(대를 이을 아들이 없거나, 아들이 있어도 똑똑한 사위로 대를 잇게하는 것), 장자 위주가 아니라 남녀 차별없는 재산분배가 조선 중기(1500년대) 까지 실제로 있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