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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토론방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의자왕 선택

작성자정성일|작성시간09.12.21|조회수447 목록 댓글 14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는 것이 좋을지 지키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처음 육지에 내려서 군사들의 기운이 안정치 못할 때에 급히 치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당나라[大國]의 후원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만일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세 좋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압니다."


제1안》 좌평 의직(義直)

군량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당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 곧바로 전쟁을 걸어올 것을 염두에 두고 내린 의견으로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며, 물에 익숙하지 않는 자들이 많으니 육지에 내릴 때 급히 치자는 의견임.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당나라의 소정방은 6월18일 내주를 출발하여 6월21일 덕물도에 도착하여 신라 태자 법민이 소정방을 맞이하였고, 신라에서는 병선 100척을 보냈다고 하니 그들에 필요한 음용수와 식량을 제공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7월10일 소정방이 덕물도에서 머물다가 백제를 공격하였으니, 당나라 군사는 오랜 항해로 인한 피로가 적었을 터이고 좌평 의직의 판단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지금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군대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형편을 엿보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주저하여 어느 말을 따를지 알지 못하였다. 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제2안》 달솔(達率) 상영(常永)

당나라 군사가 멀리서 왔으므로, 군량보급이 원활치 않으므로 급히 싸우려 할 것이며 길을 막아 저지하면 곧 식량이 떨어질 것이므로 이 때에 군사를 일으켜 피로한 군사를 치자는 의견이며, 신라는 예봉만 감당하면 나라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의견임.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당나라의 소정방은 6월18일 내주를 출발하여 6월21일 덕물도에 도착하여 신라 태자 법민이 소정방을 맞이하였고, 신라는 병선 100척으로 그들에 필요한 음용수와 식량을 제공하였을 것으로 판단됨.


7월10일 소정방이 덕물도를 떠나 백제의 남쪽을 공격하였으므로, 덕물도에서 20여일을 머물렀다면 당에서 실어온 식량은 거의 소진되어 신라가 제공한 군량으로 버텼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라의 당항성 또한 군량이 상당히 급했을 것으로 보이므로 백제가 한 달이라도 제대로 버텼다면 승자는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당나라 군사가 신라의 당항성으로 가서 군대를 합하였다고 하면 이는 백제가 바라는 바였을 것이다. 군대의 지휘체계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서로 보급품을 차지하려고 내분이 있었을 것이다.


백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는 여러 곳에서 전쟁을 맞이하는 경우로 백제의 어떠한 경우라도 대군과 대군이 벌판에서 마주치는 백병전에는 승산이 없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하며 더구나 신라와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호응하는 형세[掎角之勢]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친다면[對陣]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하였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重閉]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제3안》 흥수(興首)

당나라와 신라는 군사는 많고, 식량이 적음을 간파한 계책으로 당나라는 백강(百江)을 넘지 못하게 지키고, 신라는 탄현(炭峴)을 지키면 좁은 곳에서는 많은 수의 병사를 상대할 수 있다. 만약 그곳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도읍이 함락되지 않으면 곧 군량이 떨어져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 그 때에 적을 깨뜨리자는 계책이다. 이는 적은 수의 군대로 많은 수의 군대를 상대하는 방법이나, 사용되지 않았다.


이 때에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가히 쓸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方舟] 없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할 수[幷馬] 없게 함과 같지 못합니다. 이 때에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제4안》 제신(諸臣)

흥수(興首)의 의견과는 반대로 당나라는 백강(百江)의 좁은 수로를 건너게 하면, 물의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 없게 되니 이 때에 일시적인 잇점이 있다는 뜻이고, 신라는 탄현(炭峴)을 넘을 때 복병으로 치자는 의견으로 이 또한 시기를 놓쳐서 실행되지 못하였다.


왕이 그럴 듯이 여겼다.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堦伯)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크게 어울려 싸워[會戰]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이어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이에 군사를 합하여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치게 하였다. 정방(定方)이 왼편 물가로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王師]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步騎]을 거느리고 곧장 그 도성(都城)으로 나아가 30리[一舍]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우리 군사는 모든 병력을 다 모아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명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고 말하고는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이른 덕물도는 지금의 덕적도이고, 소야도(蘇爺島)에 소정방이 와서 머물렀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이다.) 지리상으로 지금의 충청남도의 부여군과 공주시의 북쪽에 위치한다.


지금의 학계는 소정방이 태안반도를 U턴하여 서천군과 군산시 사이를 흐르는 금강으로 진입하였다고 하나, 흥수(興首)와 제신(諸臣)들이 어떻게 금강으로 올 줄을 알았을까? 백제가 아산이나 당진에서 대비를 하다가 당했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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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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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미주가효 | 작성시간 09.12.27 두 분 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정성일님이 왜 이 '차령산맥이 없다' 는 이야기(아마 신문기사인 듯?)를 쓰셨는지 모르겠네요.
    차령산맥이 없다는 저 기사는 종래 차령산맥으로 생각했던 것이 '산맥' 이라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일 뿐 산 자체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령산맥개념은 '산맥을 잘못 그었다' 라는 의미이지요. 산경표의 개념으로 보자면, 금강에 의해 동강이 나는 '차령산맥' 개념은 없을 지 몰라도 대략 그 지역에 '금북정맥' 이라는 산맥이 위치하고는 있습니다. 당진 일대에서 부여-공주로 육로로 가려면 금북정맥을 가로질러야 하지요.
  •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2.28 금북정맥(구, 차령산맥)에 관한 위의 인터넷 견해는 저도 정확히 이해하는 바가 없어 설명하기 곤란하군요. 좀더 정확한 자료를 보려면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듯 합니다. 저의 견해로는 금북정맥이 옛날에는 사람의 통행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나, 또는 적은 인원으로도 막으면 지킬 수 있는 지역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나라군대가 금강의 진입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소수의 정예부대를 보내어 백제의 후방을 괴롭혀야 맞지 않나, 또 그런 기록은 백제와 당나라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느냐는 점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2.28 백제의 멸망시 신라의 김유신의 군대는 남천까지 북상하였다가 왜 다시 남하하였는가, 남천이 고구려와 가까워 자칫하면 고구려군이 쫓아오고 백제군이 막는 자칫하면 둘러싸여 신라군이 괴멸하는 상황을 맞이 할 수 있는데, 과연 김유신은 병법에 무지하였는가? 소정방의 당나라군대는 아산과 당진으로 상륙을 하는 것처럼 하여 성동격서의 전략을 보이지 않고 바로 금강하류로 진입하였을까? 백제는 아산과 당진방면의 방어는 보이지 않고 금강하류로만 들어올지 알았을까? 제가 보는 관점은 김유신은 남천에서 서진하여 웅진(옹진반도)로 갔으며, 소정방의 당나라군대도 덕물도에서 북상하여 웅진의 남쪽에 도달한 것이죠.
  • 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2.28 아마도 백제가 지켜야 하는 지역은 한강의 하류의 지역으로 지금의 강화도에 해당 할 것입니다. 백제의 수군이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 당나라군이 나아가기가 무척이나 까다롭죠. 무시하고 나아가지니 뒤를 칠 것이고, 여기를 먼저 치고 나아가자니 시간이 소요되어 웅진은 도착하지도 못하고 물러나야 하는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죠. 아직은 저의 견해와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고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미주가효 | 작성시간 09.12.28 정성일님// 차령산맥이나 금북정맥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져 별도 답글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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